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갑자기 회사에서 책임의 크기가 커졌던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신입사원의 패기와 열정은 기억나지 않은지 오래였고, 이제는 ‘배워야 한다’는 밑밥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실수하거나 상사에게 깨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시작되면서 보고는 나에게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실수를 해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순발력이 사라지고 있었기에 실수를 하지 않도록 모든 보고를 사전에 스크립트를 적어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달 외웠다고 하더라도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망신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보고를 시작하기 전부터 내 심장이 요동쳤다. 기회만 생기면 앞에서 발표를 하고 주목을 받고 싶었던 신입사원 고밀도의 모습은 온 데 간데없었다. 신입사원 때는 갑작스러운 발표에도 센스 있는 스토리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여서 거래선을 감동하게 하는 프레젠테이션의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내가 변해버린 것인지, 이제야 본래의 내 모습이 드러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은 절대 망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나는 수능시험 칠 때도 마시지 않았던 우황청심원을 먹어 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 몸에 맞지 않아 이상 반응으로 실전을 망치면 안 되니 전날 미리 마셔보고 내 몸에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도 처음 마셔 본 우황청심원은 효과가 좋았다. 갑자기 내 몸에 흐르는 피의 속도가 늦어지는 느낌이었고 심박수가 안정이 되었다. 보고를 받고 있는 최고위 임원이 그저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로 느껴져서 긴장을 하지 않고 보고를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혹시나 모를 ‘험한 꼴=보고를 망치거나 실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우황청심원을 사두고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누가 봐도 긴장이 될 법한 보고 자리를 앞두고 먹다가 이제는 작은 보고에도 실수를 두려워하여 우황청심원을 마시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보고를 하지 않고 평생직장생활을 하면면 좋겠지만, 업무 특성상 보고가 일상인 나는 우황청심원을 의지하는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단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10년이 넘으면 보고쯤은 눈감고도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판타지가 있었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인 것이다. 10년을 훌쩍 넘게 한 직장에 몸담고 있는 장기근속자인데도 나는 점점 마음이 여려지고 물렁해지는 느낌이다. 심신이 미약한 나는 어느덧 ‘버티기 단계’에 돌입한 직장인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버틸 바에는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지난 약 40년의 생활 동안 한 방향으로만 걸어왔기에 우회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에 쏟아지는 책이나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성공한 이직러’, ‘퇴사한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는다.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이야기, 대리 만족할 수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버티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버티는 이유는 각자 다양할 것이다. 버티며 지내는 어느 날에는 뜻밖의 성취감이나 보람이 선물로 주어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버티었던 시간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도 만나는 것이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일상을 버티는 직장인들의 이야기다. 그런 버티는 삶에 대해 오늘도 나는 기록한다.
나는 때로는 서글프고,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버티는 일상을 기록하는 13년 차 장기근속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