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과장,노선을 정해
워크와 라이프에 대한 태도
나는 친절하지만 살갑지는 않다. 상대방을 배려하지만 빈 말은 하지 못한다. 맡은 바를 열심히 해내지만 회사에서 임원을 달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다. 상사와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는 있지만 저녁까지는 함께 할 수 없다. 나는 아주 무난하게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무난한 나에게 상사가 묻는다. 때로는 열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욕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모습이 진짜냐고.
유난히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많은 우리 부서에는 캐릭터가 분명한 사람들이 많다. 상사로부터 어떤 일이 떨어져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쓸개까지 내어줄 것 같은 A과장, 부장이 이야기를 하면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해서 분위기를 오싹하게 만들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열을 주는 B과장, 자신의 가족과 삶이 중요하여 일이 조금이라고 삶을 침범하면 딱 잘라 거절하는 C과장까지 모두 회사생활에서 자신의 노선을 정하고 노선대로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노라면 나는 이 길도 저 길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에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아마도 나에게는 회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과 떠날 수 없는 두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업무에 열정을 다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때로는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먼저, 떠나고 싶어진 이유는 더 이상 이 곳에는 나의 꿈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세계를 누비는 마케터’가 되고자 했을 때 이 곳은 나의 판타지였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자 다양한 국가를 넘나들며 나의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간부급이 되면서 회사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패기 있게 하고 싶은 일을 제안하고 펼치기보다는 조직과 상사의 이득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때로는 고객과 시장이 원하는 것보다는 임원의 의지에 따라 모든 일들이 재정렬되기도 한다. 회사는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다니던 곳에서 이제는 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기 위해 인내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한편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는 12년간의 내가 이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곳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중요한 보고 앞에서는 마음 졸이며 금요일만 되면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지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회사는 내 청춘 절반의 ‘정체성’을 담당한 곳이다. 이 곳을 떠나 ‘고 과장’이 아닌 ‘고밀도’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아직은 자신이 없다.
최근에 글쓰기에 열심을 다하느라 잠을 많이 줄여야 했다. 혓바늘이 돋아 괴로워하면서도 글을 계속 쓰는 나에게 신랑이 물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집중하는 것은 어때? 노선을 확실히 해야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야.”라고 나는 답한다
그렇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돈 때문에 선택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고 과장’도 ‘고밀도’도 모두 나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나를 버리는 것이 어렵다. 이성과 감성이 복잡 미묘하게 뒤엉켜 있는 지점이다. 그래서 ‘고 과장’과 ‘고밀도’ 사이 경계선에 서서 이도 저도 아닌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쪽의 마음이 더 커져서 선택이 쉬워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경계를 왔다갔다하는 현재가 나의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노선을 정해야지!’라고 말한다면 ‘어중간한 이 지점이 내 노선’이라고 말해주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