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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13. 2021

아니, 그게 아니라

한 페이지 소설

* 짧은 소설   



  제는 연필 가루를 먹고 산다. 이렇게 말하면 그저 그렇고 그런, 쉬어빠진 문학적 비유처럼 보일 테지만 이건 어떤 수사도 코미디도 아니다. 사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사는 게 속 편하다. 먹는 걸 눈으로 봐야 믿겠다는 이들 앞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한 톨도 넘길 수 없고 혼자 있을 때만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이미 농담이 되어버리는 데 뭘 어쩌겠나. 정말이라고 강조할수록 거짓에 가까워지는 일들을 어디 한두 번 보아온 것도 아니고 그러니 제는 입장을 이해시키는 대신 오해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낫다고 일찌감치 체득해 버린 터였다. 일반식과 연필식을 겸하다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지만 어디 가서도 연필 가루 먹고 산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송이 알게 된 것도 제의 발설이 아니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저 예쁘게 보이려고 깨지락거리나 했다. 송이 먹고 싶은 거 주문해 난 아무거나 괜찮아. 아무거나. 제 취향이 없는 건 매력 없다 여기고 있던 터라 아무거나, 라는 주문은 아무래도 살짝 김이 빠졌으나 더 김빠지는 건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놓인 후였다. 기껏 시켜 놓은 탕수육과 리코타 샐러드를 두고도 맥주만 꼴깍꼴깍 마시는 걸 어떤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지 영 감이 오지 않았다. 평생 타인의 기호를 해석하며 살아야하는 게 인간인지라 관계에서 빚어지는 미묘한 감정선들의 조율에 피곤해질 때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때 주어지는 새로운 데이터들은 불면을 감당하고서라도 기꺼이 해독하고 싶어지는 데, 제가 뭘 씹어 삼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알아챈 건 곰곰 곰곰 그 불면의 해독이 남겨 준 예상치 못한 결과치였다. 제, 뭘 좋아해? 맥주랑 커피만 있으면 돼. 난 그것보다 송이 제일 좋지롱. 송이랑 먹는 맥주가 제일 맛있지롱. 얼렁뚱땅. 제의 방에 유난히 연필이 많다고는 여겼었다. 제는 주로 연필깎이 통에 모인 가루를 먹는다. 아침은 보통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갈고, 연필가루를 나란히 놓고 예쁜 각도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시작한다. SNS에 올리고 싶지만 혼자 보고 만다. 대신 갓 내린 커피와 갓 갈아 낸 연필의 풍부한 향을 오롯이 향유하며 가슴이 살짝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긴다. 각각의 향도 뛰어나지만 그것이 뒤섞이면서 퍼지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건 좋아서 때로 쓸쓸하기도 하다,고 제는 생각한다. 밖에선 먹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아침에 충분히 갈아서 남은 걸 작은 밀폐용기에 싸들고 나가기도 하고, 일이 바쁘겠다 싶은 날엔 심이 많이 닳은 연필을 몇 자루 더 챙기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문구용 커터는 오프너와 함께 파우치에 늘 상비해 두기 때문에 그건 따로 챙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연필깎이에서 갈려 나온 가루와 커터로 깎은 거친 가루는 씹는 질감도 맛도 판이하다. 가끔 송에게 깎아달라고 해서 종이에 모은 걸 버리는 척 곱게 싸 주머니에 넣어 두기도 하는데 이게 또 별미다. 누가 깎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게 연필 가루의 맛인데 아무튼 이 좋은 걸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과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때때로 울적해지기도 한다. 그 날은 허기 때문에 성급히 깎았다. 어떤 시간을 복기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건 후회되는 순간이다. 제는 이후로 내내 그 ‘성급히’에 눌려 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송의 방점은 달랐다. 버리러 가는 척 입에 조금 털어 넣고 오물거리면서 나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을 때, 황급히 잡는 손, 송이었다.


2017. 8. 28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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