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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May 17. 2019

그 여름이 다시 오지는 않겠지만

『여름의 끝』(윌리엄 트레버), 엘리 딜러핸과의 가상 인터뷰

* 책 속의 인물이나 상황을 기반으로 '가상 인터뷰' 형식의 글을 드문드문 써볼까 한다. 첫번째 인터뷰로, 참여하고 있는 작은 매체에 기존 실었던 글을 우선 올려둔다.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 엘리 딜러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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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을 때 당신의 내면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소설 속 인물이 처한 어려움에 함께 곤란을 느끼기도 하고, 화 낼 땐 분노 하며, 인물이 웃을 때 함께 신나거나 환해지고, 두근대는 시기를 지날 땐 덩달아 설레기도 하고, 아플 땐 같이 앓고, 울어버리고, 그런가요. 소설이 끝난 후 그 인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푹 빠져 있던 이쪽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야기 속에서는 미처 다 알 수 없었던 인물의 내면은 또 어떤 걸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가상 인터뷰 첫번째 시간 함께 이야기 나눠 볼 인물은 윌리엄 트레버 장편 소설 『여름의 끝』, 엘리 딜러핸입니다.


  안녕하세요, 엘리. 만나 뵙고 싶던 당신과 마주 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우선 전하고 싶습니다. 그 여름이 끝난 후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안부부터 여쭤 봐도 될까요.

  여전히 닭 모이를 주고 달걀을 모아 담지요. 그렇게 모인 달걀들은 자전거에 실어 라스모이로 배달을 나가기도 하고요. 남편과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들판에 가져 갈 샌드위치를 만들고, 주방을 정리하고, 집안 안팎을 손 보거나 남편을 도우러 나가기도 합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거지요. 똑같습니다. 평범하고, 작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스모이가 그런 것처럼요.


  ‘평범한 작은 라스모이가 그런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셨지만 사실 당신도 남편도 라스모이의 사람들도 모두 각자가 자신의 파고를 넘거나 견디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과는 달리 말이죠.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어떤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요...적어도 나와 남편은, 그랬죠. 그리고 우린 이렇게 살고 있어요. 이렇게 살 수 있을 뿐이죠.


  당신은 딜러핸의 가정부로 왔다가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로 결혼하였고, 후에 플로리언을 만난 후 뒤늦게 ‘사랑’을 알아버리고 맙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분이 계실 테니 최소한의 질문만 드려볼까 합니다. 딜러핸과의 결혼 과정은 어떠했나요.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저는 고아였어요. 제 유년기는 클룬힐에서의 기억이 전부입니다. 그 곳에선 우리 같은 아이들을 업둥이라 불렀어요. 거기 살던 우리는 모두 어디선가 주워 온 업둥이였죠. 어느 날 어떤 홀아비의 집에 하녀로 가게 되었고 지금의 남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죠. 아내와 아이를 사고로 한 번에 잃고 죄책감만으로 살던 사람의 일상을 돌보다 결혼까지 하게 된 거예요. 템플로스의 수녀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으로 그와 저를 챙기며 살았습니다. ‘사랑’은 그 후에 왔습니다. 함께 떠나려고도 했었지만, 네, 아시다시피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죠.


  플로리언 얘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글쎄...글쎄요. 그 사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여름으로부터 이미 시간은 많이 지났고, 스칸디나비아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겠죠, 나의 플로리언은. 마지막 날 보았던 자전거 전등의 불빛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입니다. 때로는 그런 것이 전부이기도 하죠. 종종 우리가 쪽지를 주고 받던 장소를 가보기도 합니다. 이젠 다 지난 일이죠. 그도, 그런 날도 다시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아요.


  그가 떠난 후 코널티 양에게는 모두 이야기 하셨는데 이유가 뭘까요. 그는 떠났고, 굳이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내게도 ‘사랑’이 있었다는 걸 털어놓고 싶었어요.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사랑의 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했어요. 그 사랑의 결실 여부와는 상관없이요. 그리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렸을지도 몰라요. 사람은 가끔, 살려고 비밀을 말해요.


  따라가지 않고 남은 걸 후회하진 않나요.

  후회라기보다 뭐랄까요, 사람의 운명은 뭘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사실 그 사람보다 제 쪽의 마음이 더 강렬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날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곳을 정리하고 떠나기로 예정했던 사람이었고 함께 가자고 적극적으로 말한 적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저를 아껴주었던 그의 마음은 아주 잘 알아요. 내 결혼 반지를 보지 않았더라면, 내게 남편이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요? 나는 사랑을 몰랐어요. 그 사람이 내겐 첫사랑이나 다름 없었죠. 후회...하지 않아요. 따라 나서기 위해 자전거 뒤에 실을 수 있는 트렁크까지 마련했지만 하필이면 그날 그런 일이 생겼고, 나는 딜러핸을 떠날 수 없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였죠. 플로리언과는 거기까지였던 거예요. 그런 걸 운명이라 하는 거겠죠.


  곤란한 질문도 있었을 텐데 성의껏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 보고 인터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삶은 무엇인가요, 엘리.  

  여름이 지나면 어김없이 가을이 오지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사랑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물으셨나요. 너무 크거나, 너무 의미 없는 질문이군요. 글쎄요. 슬픔이 닥쳐 오고, 슬픔이 지나가고, 혹은 여전히 그 슬픔 속에 있으면서도 채소를 키우고 닭에게 모이를 주고 달걀을 모으는 것이죠.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아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거예요. 그것이죠.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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