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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May 20. 2019

환상이 만들어내는 진실을 믿어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스, 민음사)의 블랑시 두보아

  [가상 인터뷰]


  여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폭력적 세계에서 얇은 날개 한 장으로 위태롭게 팔랑거리는 여자가 있다. 살던 곳에서 떠밀려 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불시착한 그 여자, 블랑시 두보아.


  블랑시, 미치에게 알려주셨겠지만 이름에 대해 다시 한 번 소개해 줄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물론이죠. 프랑스식 이름이에요. 미국으로 처음 온 제 조상들은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였어요. 두보아는 ‘숲’, 블랑시는 ‘흰색’. 하얀 숲이란 뜻이죠. ‘봄의 과수원’이 떠오르지 않나요? 질문을 받고 생각해보니, 묘한 이름이네요. 하얀 숲이라는 건 쉬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다채로운 색이 피어나는 봄에만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싶어서요. 말하다보니 문득 쓸쓸하네요. 이후의 계절에 저는 뭘까요... 이미 인생에서 봄은 지나갔는데 관성으로 덩그러니 남아버린 게 지금의 제가 아닌가 싶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이 당신과 잘 어울리는걸요. 봄의 과수원, 듣고 보니 더 근사한 이름입니다. 그 안을 자유롭게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이기도 한 당신만의 풍요로운 세계. 초록과 단풍과 얼어붙은 계절을 지나는 동안에도 당신은 늘 블랑시 두보아, 봄의 과수원입니다. 그런데 블랑시, 남부에 살다가 동생인 스텔라의 집엔 어떻게 오게 되셨나요?

  하나하나 차례로 무너져 내렸어요.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그 모든 것이요. 집도 농장도 남편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모두... 그 곳에선 더 이상 나를 지탱할 만한 것이 없었어요. 거의 밀려나오듯 떠나온 것이나 다름없었죠. 동생 집밖에는 갈 곳이 없었어요.


  동생의 남편 스탠리를 왜 그렇게 싫어했나요. 이렇게 말씀드려서 유감입니다만, 어쨌든 오갈 곳이 없으면 현실적인 문제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과도 다름없는 것이었을텐데 좀 맞춰주며 살 순 없었나요?

  당신이라면 동생에게 험악하게 굴고 손찌검하는 남자를 두고 볼 수 있겠어요? 제 것도 아닌 돈을 내게 요구하듯 몰아붙이고, 험한 말을 쓰고, 예의라곤 없고, 대화도 통하지 않고, 성향도 전혀 맞지 않아요. 게다가 폭력이라니요. 그 사람은 내가 경멸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전형적인 남자더군요. 그런 사람에게 푹 빠져서는 맞으면서도 헤어지지 않다니, 견딜 수 없었어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과목을 가르쳤나요?

  “난 불행히도 영어 선생이에요. 겉멋 든 사춘기 소년, 소녀에게 호손과 휘트먼과 포를 존경하게 만들어야 하죠. 학생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전통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리고 봄이 되어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랑을 발견하는 걸 보면 감동하곤 해요! 일찍이 누구도 사랑을 몰랐던 것처럼!”(57)


  당신이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사람이란 건 아무렇게나 입지 않는 옷차림이나 매무새는 물론이거니와 생각하는 방식에 조금만 귀 기울여 봐도 쉬 알 수 있겠더군요. 그 점이 바로 스텔라-스탠리 부부와는 정반대가 되는 뚜렷한 차이점이기도 했고요. 특히나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엄격함이랄까, 그런 점이 인상 깊더군요. 공감이 되기도 했고요.

  제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 공감을 해주신다니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군요. 이 가차없는 폭력의 세계에서 당신 또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귀한 사람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실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목에서 그런 점을 느끼신 건지...


  당신을 (정신)병원으로 보내기 전 유니스와 스텔라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면서 짧은 대화를 나눌 때 당신에겐 빛이 났어요. 물론 유니스도 스텔라도 그걸 무시하거나 미친 소리처럼 들었을테지만. 유니스가 “파란 재킷이 예쁘기도 하지.” 했더니, 스텔라가 “라일락 색이에요.” 했을 때 말입니다. 그 때 당신은 두 사람의 말을 곧장 수정하죠. “둘 다 틀렸어요. 그건 델라 로비아 파랑이에요. 옛날 성모 마리아 그림에 나오는 푸른 가운 색깔이에요.”(155) 파랑이든, 라일락이든 뭐든 빨리 꿰어 입기만 하면 그만일텐데 그걸 누가 신경 쓴다고 그 색깔을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저는 그 대목이 참 눈부시게 느껴졌고, 잊히지 않더군요.

  ......그걸 알아주시다니. 이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네요. 당신과 나는 적어도 삶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주파수가 잘 맞는 것 같군요. 대부분의 타인들과는 늘 지직거렸어요. 그들에게 내 말은 잡음과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미친 소리였겠죠. 직선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저는 한 마리 나비처럼 천천히 곡선의 유영을 하고 싶어요. 그것이 내 세계를 지키는 나만의 방식이죠. 직선과 이분법과 크고 작은 폭력이 서로를 다치게 하는 세상에서 저는 섬세하고 우아한 방식으로 제 세계를 지킬 거예요. 저에겐 다른 무엇보다 ‘델라 로비아 파랑’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냥 파랑이나 라일락 색깔이 아닌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런 점의 연장선에서 보면 될까요, 당신에겐 전구에 종이갓을 씌우는 게 다른 무엇보다 매우 중요하게 보이던데.

  “난 상스러운 말이나 천박한 행동처럼 갓이 없는 알전구 같은 건 참지 못하겠어요.(56)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131)


  사물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 것,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세계 속에서 오가는 말들의 질감과 강도를 당신은 어떻게 느끼고 있나요. 저에겐 사람들이 말들의 화살 속에서 어쩜 저렇게 아픈 걸 모르고 살 수 있는지 그게 더 신기하게 느껴지는걸요. 침묵이 아니라 '굳이' 말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면 왜 그것이 타인을 공격하고 거짓을 퍼뜨리고 소문을 전달하거나 부풀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건가요. 우리가 주고 받는 말 속에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죠? 사실, 진실이라는 게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전달되기나 하는 건가요? 사람들은 거짓에 더 잘 현혹되죠.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속아도 괜찮다고 여기며 속고 자신에게도 속고 그렇게 속은 것을, 자신도 잘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타인에게 전달하면서 의도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속임수를 재생산하고 확산시키는데 가담을 하죠.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설마? 사람들도 실은 환상 속에 살고 있어요.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이죠. 저는 그걸 인정할뿐더러 긍정하고 있다는 점만 그들과 다를 뿐이에요. 사실주의가 왜 싫은지 물어보셨나요? 어차피 사람들은 사실을 보려하지 않아요. 사실을 둘러싸고 있는 겹겹의 환상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진실로 육박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주는 것이죠.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공감합니다. 사실과 환상의 거리는 어쩌면 멀지 않을 거예요. 생각보다 가까이 붙어 있어 그것을 혼동하는 지도 모를 일이죠. 때문에 사실이 환상에 스미기도, 환상이 사실에 섞여 들기도 하는 것일 테고요.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는데, 스텔라와 스탠리가 당신의 진짜 형편에 대해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샤워하면서 당신이 흥얼거린 노래의 가사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어요.

  ‘마분지 바다를 항해하는 종이 달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나를 믿어 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처럼 가상의 세계라 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믿어 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 ‘그건 그저 가짜가 분명한 종이 달에 불과하지만, 당신이 나를 믿어 주신다면, 그건 가짜가 아니랍니다!‘(107~109)

  말 그대로입니다. 하루키가 그랬던가요, 말을 해야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설명을 해주어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뉘앙스나 비유 등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맥락에 가 닿을 수 있어요.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진실과 만나는 것이고요. 앞서 ‘마법’이라 표현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장 쉽고 폭넓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비유 혹은 메타포metaphor이고요.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나 신념은 사실의 세계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체가 나쁜 것인가요? 나는 ‘거짓’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히 해두도록 하죠. 시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의 세계는 모두 가짜라 해야 하나요? 흔히들 말하죠. 손가락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 좀 어긋난 대답이긴 했지만 글쎄요, 제가 저 노래 가사에 대해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까요? 너무 말이 길었네요.      


  흥미롭습니다. 보시는 분들께도 이미 충분히 의중이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괜찮으시다면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마무리할까 합니다. 마지막에 당신은 자신을 데려갈 의사의 팔에 바짝 붙어서 “당신이 누구든,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164)라고 말했더군요.    

   아는 사람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아는 사람은 나를 정말로 잘 아는 것이 맞나요?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거나, 잘 안다고 생각하여 더 알려고 하지 않는 데서 오해가 자라지는 않나요? 내 옆의 사람이 오히려 나를 가장 다부지게 오해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나요? 아는 사람은 게을러요. 안다고 생각하고 더 알려는 생각을 멈추죠. 그러고는 자신을 탐색해요. 자신 안에 심어 놓은 그 ‘아는 사람’을 키우는 거죠. 그렇게 그 사람 내면에서 ‘아는 사람’은 무럭무럭 자라는 거예요. 나를 가장 잘 모르고(말 그대로 모르는 걸 참 잘해요. 잘 몰라요),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일 먼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은 대부분 ‘아는 사람’이었어요.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라고 했죠. ‘아는’ 타인보다, ‘모르는(낯선)’ 타인이 덜 지옥입니다. 제 경험상 그랬어요. 각자가 경험하는 지옥이 다를 테지만, 아무튼 저는 그랬습니다. 아마 가족에게 낯선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사회적 태도를 보였다면 세계 평화까지도 가능했을 걸요?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진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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