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 전날의 일기
내일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5개월 만에 출근을 준비하는 마음은 참 무겁다.
작년 12월, 다니던 회사의 조직개편으로 인해 희망퇴사를 하고 5개월 동안 쉬었다. 원치 않던 시점에 퇴사하게 되어 억울했던 마음 반, 드디어 회사로부터 탈출이구나 하는 마음 반. 나의 머릿속과 회사에서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러했지만, 솔직한 나의 마음으로는, 퇴사를 하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조직개편으로 인해 혼란해하고 화나있는 팀원들 사이에서 행복한 표정을 숨기지 못해 팀장님으로부터 조금은 표정관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으니.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느지막하게 잠에서 깼다. 집 안은 햇살로 가득 차 밝았고, 밖에서는 새소리와 옆 초등학교의 수업종소리가 들려왔다. 에어프라이어에 베이글을 굽고, 차를 끓여 늦은 아침을 먹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원할 때까지 누워있다가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에 나섰다. 평일 한낮의 도서관, 한강, 영화관. 그동안은 볼 수 없었던 여유롭고 한적한 풍경이 펼쳐졌다.
퇴사를 하고 나서는 피어싱을 했다. 일단 귀걸이 용으로 무난하게 양쪽 귓불에 하나씩. 그리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연골 피어싱도 하나. 볼 모양의 무난한 디자인의 피어싱은 지금 많이 아물어 링 피어싱으로 바뀌었다. 나는 대학생 시절 타투를 했을 정도로 일탈과 개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얼얼한 피어싱 자리를 느끼며 집에 가던 날, 나는 몰려오는 도파민과 카타르시스로 가득 찼다.
지난 5년간의 치열했던 회사생활. 매번 빠듯한 타임라인을 맞춰야 했고,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항상 일정과 잠재된 위험을 걱정하고, 짧은 문장이라도 두세 번씩 검토하였다. 그러면서도 밤만 되면 혹여나 실수를 했을까 봐, 일정을 맞추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었다. 지금은 여행을 가도 계획 없이 떠난다. 정말 큰 실수가 아니라면 개의치 않는다. 일정이 미뤄져도 웃어넘기고 가려던 식당이 닫혀있어도 하나의 해프닝이 된다.
"고광님은 참 해맑고 활발하시네요."
지난 파리 여행 중에 만난 분에게 들었던 말. 해맑고 활발하다는 말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항상 눈치를 보며 기죽어 있던 일상. 혹여나 내가 말실수를 했을까 봐, 예의가 없었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매일 밤들.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떨었던 지난 날들.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해맑고', '활발한'이라는 단어가 들려오니 아, 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년간의 나 자신을 잃고 쥐어 짜냈던 회사 생활. 그리고 자연스럽고 나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지난 5개월. 그 5개월 간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개성 있고 캐주얼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 계획 없이도, 뭔가 실수가 있어도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 해맑고 활발한,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사람.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앞으로 다시 일을 하게 되더라도 다시는 나 자신을 잃지 말아야지. 다시는 나 자신을 바꿔가면서 혹사시키지 말아야지.
내일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게 된다. 지난 다짐들이 무색하게 마음이 떨려온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회사에 적응할 수 있을까?
작년 4월, 업무 중에 종종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나오고 몸이 굳으며 식은땀이 나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용량을 낮춰도 좋을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다음 회사에서 또 증상이 나올까 봐 무서워서 계속 유지하고 싶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무리 5개월간 휴식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해도 마음속 불안은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넘어 내가 지난번처럼 힘들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밤 새 마음 졸이며 불안해하게 된다면. 미팅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이유 모를 눈물을 참게 된다면. 쉴 새도 없이 자책하고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래도 선물 같았던 지난 5개월 동안 배운 것은 단 한 가지. 어느 상황에도 나를 잃지 말고 나를 지키자. 나를 가장 최우선으로 지키자. 아무리 일이 바쁘더라도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나를 끝까지 밀어붙여 자책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더라도,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 생각할 것이다.
새로 시작할 회사 생활은 다르길. 이 5개월이 나를 단단하게 바꾸어놓았길 희망하며 내일의 첫 출근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