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가 잠수 이별을 당하다니!!!!

by 위키별출신

사실 홧김이었다.


더 라스트 쉽(The last ship)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원작은 1988년 윌리엄 브링클리로 2014년 방영 시작했는데, 한 번 시작하면 놓을 수 없다고 해서 예전에 호평이었던 24(hours)못지 않은 몰입감이라며 호평인 드라마다. 팬데믹 상황은 현재의 코로나19를 떠올리게 하는데, 정도가 좀 더 참혹하다. 현재가 레벨 3이라면 소설 및 드라마는 레벨 10 정도.


드라마는 미합중국 해군의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 USS 네이단 제임스(Nathan James)의 무선침묵으로 시작한다. 무선침묵(Radio silence)란 군사작전 중에 적군에게 도청당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외부와의 통신을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선 침묵에 들어가면 내부는 물론 외부로부터의 연결이 전면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의 업데이트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네이단 제임스호는 전세계가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한 팬데믹으로 거의 괴멸 수준까지 갔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있다가, 무선침묵을 해제한 이후에야 간신히 화질이 좋지 않은 영상 몇 개를 보면서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이렇다 보니 이메일도 전화도 거의 두절 상태라고 보면 된다.


6개월 넘게 잘 데이트하던 남자가 갑자기 무선 침묵에 들어갔다.


헤어지겠다, 그만 만나자, 여기까지 하자, 다 좋다 이거다. 가타부타 뭐가 됐든 메시지를 남기라 이거다. 물론 전화로 하거나 문자로 하거나 형식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이쪽에 대한 예의범절이나 인성이 어느 정도인지 논하게 될 수도 있다. 문자 하나 남기고 차단이라니 나쁜 놈, 이라던가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장외(場外)의 수.


그는 아무런 힌트도 남기지 않았다. 그냥 연락이 안 됐다. 그가 무선침묵에 들어간 것은 발렌타인 데이를 불과 4일 앞둔 날이었다.


그는 만나던 중에는 성실했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 저녁 늦게 헤어졌고, 어떤 주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둘 다 만났다. 주중에는 만나진 않았지만 연락은 자주 했다. 행동 자체는 여느 연인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동부 출신의 미국인, 금발에 옅은 녹색 눈동자, 키는 나보다 조금 크니까 175cm 정도, 입술이 얇은 게 흠이지만 얼굴 자체는 상당히 귀염상이고 눈동자도 크고 살짝 쌍커풀이 진 데다 금색의 속눈썹은 길고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우유 알레르기가 있어’라면서 꽤나 먹을 것을 가렸고, 완전한 채식은 아니었지만 웬만하면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했다. 성향은 진보주의, 트럼프 지지와는 노선이 많이 달랐다. 그는 페미니즘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해서 꽤나 신랄하게 말하곤 했다. 한국과 일본의 여권이 낮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며 미국은 비교적 낫지만 요즘은 백래시를 맞아 엉망진창이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성산업화를 지나치게 부추겼다,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에 지긋지긋해져서 한국에 왔다, 여기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보다는 견딜 만하다, 원래 자신의 고향의 단점은 참기 힘든 게 아니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절친은 게이였고 그가 보자고 하는 영화는 거의 대부분 철학적이고 음미할 거리가 있었다. 그는 유명한 영화는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영화를 찾아내서 함께 감상하자고 하곤 했다. 그의 직업은 흔하디 흔한 원어민 영어 강사로, 교수를 준비 중이었으며 다수의 과외학생들로 꽤 좋은 수입을 벌고 있었다. 그래서 강남의 알토란 같은 위치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차는 없었다. 운전하는 걸 원래부터 싫어했다나.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난 사람 가르치는 게 좋아. 특히 최근에 내가 과외하고 있는 사람은 변호사야. 일도 적당히 하면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다녀왔다고 했는데, 솔직히 부러웠어.”


“너도 가면 되잖아?”


“그러게. 난 그런 면에선 좀 소심한 것 같아.”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는 그가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유럽에 가고 싶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무엇이 그가 실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부추기려는 나의 의지를 일순 스톱 시킬만큼 어딘가 맥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는 내 시도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의 금발은 금색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조명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삼파장 형광등을 쓴 작은 식당이었는데, 왜 푸른 색을 띄고 있었을까. 난 그 머리카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바로 저번 주였는데 말이다. 한 주도 빼먹지 않고 매주 토요일 황금시간대를 차지해 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버려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우습게도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4년 전이었다. 시작이 어디에서였는지는 흐릿하다. 잠시 지인으로 알고 지내다가 그가 카페에서 내게 고백하면서 본격적으로 사귀는 모드로 들어갔다. 둘 중 누구의 입에서도 우리 사귀는 거다 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매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는 그가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고, 장소를 바꿔가며 다양한 곳에서 대화를 하곤 했다. 데이트만 한 게 아니라 강원도 쪽으로 1박 2일 여행도 같이 갔었고 서로의 집도 오갔었다.


그러나 그는 1월 말에 증발했다. 갑자기 나가 놀자는 말이 멈췄다. 왜 나를 더 이상 꼬시지 않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난 내가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증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 년이 조금 지나서 그가 되돌아 온 거였다. 나는 크게 따져묻지도 않았다. 때마침 만나던 사람과 안 좋아 헤어짐을 고한 직후에 타이밍 좋게도 그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에, 옳다구나 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다시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이번에야 말로, 이번에는 연인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2월 14일이 되기 직전에 못된 버릇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또 다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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