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세 명의 노인들, 지팡이를 짚은 피아노 연주자

by 위키별출신

앞서 밝혔듯 나의 여행의 시작은 초입부터 원대했다. 그렇다, 반어법이다. 해당 국가의 문화를 공부하고 간다던가, 거기 만나고 싶은 작가나 뮤지션이 있다던가 하는, 나보다는 건전하고 눈부신 이유로 유럽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소가 바뀌었을 뿐 실연의 상처를 술로 달래고 싶다는 희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내가 그 잠수이별자의 집 앞에 쳐들어가 죽여버리겠다, 라던가 헤어지자는 예의바른 문자 하나가 그렇게 어렵냐, 라고 소리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가 아니라 내 통장의 잔고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승화를 선택했다. 그건 자해나 마찬가지로 조금 자멸적이고 스스로에 대한 공격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 준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했다. 하지만 내가 분노를 합법적이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표출하는 데 대해서 약간의 노하우라도 있었더라면, 이곳까지 날아오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트빌리시의 뮤직 카페에 앉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음악과 음식을 동시에 즐기는 장소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레스토랑과 까페는 많지만 그들이 틀고 있는 음악은 보통 노트북에 켜 놓은 가상의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Mp3 파일의 나열이다.

MP3파일은 알려져있다시피 음질이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입장이다. MP2, , WMA, Vorbis, AAC, Opus 등의 손실 압축 포맷과 WAV 파일 또는 오디오 CD의 PCM 데이터같은 원본, 혹은 이를 무손실 압축한 파일과 달리 사람이 듣기 힘든 부분을 잘라내어 용량을 줄이기 때문에 얼핏 듣기에는 원본과 별다를 바 없이 들린다. 하지만 이는 플랫하면서 소리를 뭉개지 않는 스피커를 사용해서 들으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특히 해상도가 다르다. 베이스가 찢어지거나 하지도 않고 멜로디와 보컬도 좀 더 투명하다. 하지만 가성비(!) 때문에 MP3로만 카페 음악을 사용하다보니, 카페의 일반 이용객들은 카페 사장의 간편함과 맞바꿔 음악적인 즐거움을 한 단계 강제로 낮춰서 즐겨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조지아는 아직 라이브카페가 성행한다. 아직은 7-80년대에 흥하다가 지금은 사라져버린 한국의 노선을 밟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지아는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다 보니 우리나라보다 이런 면에 대한 집착이 더 심하다. 즉, 공장도 없고 돈벌이 수단이라고 할 만한 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라이브카페는 여행지의 매력을 찾는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털기에 효율적인 방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냥 돈벌이를 위해서만 라이브카페가 있는 게 아니었다. 후술하겠지만 조지아는 음악과 술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나라였다.


이날도 나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라이브 카페 하나에 들어가 식사를 시킨 상태였다. 이곳의 웨이터는 전부 남자였고 하나같이 잘생겼기 때문에 나는 호스트클럽(;;)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여행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머니도 두둑하겠다, 세 시부터 이곳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이 메뉴는 뭐가 들어있고 무슨 맛이냐’고 웨이터를 귀찮게 굴면서 이런 저런 메뉴를 시켜먹었다. 그들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낮부터 쳐들어와 혼자 앉아서 네 개 넘는 메뉴를 먹어치우고 있는 동양 여자에 대해서 수근거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동양인은 곧 중국인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며, 소련 연방이었던 과거 때문에 중국에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진국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편의점에서 일해도 자신들의 월급의 두 배는 넘게 벌 수 있는 나라 출신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듯 했고, 끝없이 돈을 낭비하고 있는 동양 여자의 존재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즉, 저 비리비리하고 없어 보이는 동양 여자가 어떻게 저 많은 음식을 먹지? 돈을 낼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다소 깃들인 시선이 자꾸 내게 와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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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만의 상상이 아니다. 상상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이런 추측을 할 만한 몇 가지 단서들을 발견했다. 다른 손님들에 대해서 그들은 나를 몰래 훔쳐보는 것 만큼의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자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 특유의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실컷 식사를 맛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반 이상 남겼고, 식후 입가심을 위해서 술과 레모네이드를 시켰다. 이렇게 소비를 해 줬으니 내가 여덟 시까지 이곳에서 버텨도 눈치를 주지는 않을 터였다. 카페의 입구에는 흑색 표지판에 조지아어로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아래 쪽에는 영어로 라이브공연 8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의 라이브카페처럼 멋지게 연주복을 차려 입은 여성 연주자나, 아니면 젊은 남자 두셋으로 구성된 버스킹 밴드나, 아니면 통기타 하나와 멋진 음색만으로 좌중을 압도할 수 있는 무명 가수가 등장할 줄 알았다. 적어도 공연에서 사람의 음성이 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 조지아도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공연자는 세 명의 노인이었다. 한 명의 노인이 느린 발걸음으로 무대로 다가왔다. 그 뒤에 있는 노인은 다리가 불편한지 조금 절고 있었으며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마지막 할아버지는 커다란 더블베이스를 들고 있었는데, 세 명 중에서는 비교적 젊고 건강한 편에 속하는 듯했다. 더블베이스는 무게가 10kg이 넘는데 그냥 쿨하게 한 손으로 들고 왔다는 점이 그의 팔팔한 건강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셋 다 놀라울 정도로 나이가 많아 보였다. 서양인들이 조로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 와중에도 이들은 한없이 백살에 가까워보였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70살보다 어릴 것 같지 않았다. 팔순은 넘어 보이는 그들은 각각 더블베이스와 기타, 피아노였다. 다리를 절던 어르신이 피아노였고,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다음 이제까지의 운동량만으로도 벅차다는 듯 한계에 달한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장으로 오는 것만도 굉장한 노동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의 보행을 가능하게 해 준 지팡이를 소중하다는 듯 피아노 옆에 기댔다.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고용주인 듯했다. 네 사람은 조지아어로 뭐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어색함이 없는게 매주 오는 팀이 틀림없었다. 다만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혹시 헛된 노력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물론 연주에 나이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할 수 있어서 공연의 품질이 좋아질 것은 예상되지만, 그래도 너무 지나치게 어르신이다. 피아노도 체력이 필요하다. 걷는 것도 힘든 데다가, 멀리서도 보일만큼 다리를 떨고 있는 품격 없는 할아버지가 과연 공연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저래가지고 과연 연주를 할 수는 있는 거야?’


나는 당시에 아직 조지아가 얼마나 음악에 미친 나라인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세 사람을 얕보고 있었다.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내 여행은 순수한 여행이 아니라 사실 실연한 사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홧김 어린 행동이었고, 그에 따라 이 나라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를 치는 노인은 온몸을 희미하게 떨면서 걸음을 옮길 때와는 이제 사뭇 달라졌다. 숨도 고르게 내뿜고 있었고, 피아노를 앞에 두자 점점 기운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일단 표정이 달랐다. 세 사람이 처음 연주한 곡은 조지안 전통 음악이었다. 셋 중 누구도 보컬이 아니었고, 단지 베이스가 들어갔다가 빠졌다가, 기타가 춤추듯 한바퀴 도는 듯했다가, 피아노가 현란한 곡조를 연주하거나 하는 변주가 있었을 뿐이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매력적이었다. 곡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피아노 치는 어르신의 손가락은 엄청나게 빨라서, 마치 90년대에 유행했던 스피드메탈을 연상하게 했다. 노파가 갑자기 젊어진 것 같은 마법같은 장면이었다. 식사를 하느라 세 사람의 등장을 놓친 사람들과 달리 나는 처음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보아왔던 지라, 이 갭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곡이 끝나자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조지안들은 잘 들었다면서 무대로 다가와 연주자들에게 술을 주고, 자신이 시켰던 음식 중의 일부도 나눠주고, 심지어는 담배까지 기증했다. 피아노 치는 노인이 가장 반긴 것은 담배였다. 그는 수준 높은 연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왼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물려주는 대로 담배를 피웠다. 셋 다 긴장이 풀려 있었다. 처음 연주하기 직전은 대부분의 연주자가 긴장한다. 나도 버스킹을 했었기 때문에 그 감각을 안다. 첫 연주가 가장 힘들고 긴장된다. 하지만 다음 부터는 한결 공연하기 편하다. 이들 역시 그런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설마 그렇다고 담배를 문 채로 두 번째 곡을 시작할 줄은 몰랐다.


‘담배 재가 피아노 위로 떨어지고 있는데요, 할아버지..!’


그는 담배 재가 여러 번 피아노 위로 떨어져 건반 사이로 들어가버리는 중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음악에 취해 있었다. 고개를 조금 느릿하게 흔들면서 그가 선택한 곳은 유명한 팝송의 변주였다. 그의 선택은 꽤나 특출난 것이었는데, 워낙 변형해서 치는 바람에 얼핏 들어서는 그 곡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30초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나는 그가 연주하는 곡이 내가 알고 있는 곡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연주한 게 아니라 즉흥으로 곡을 꿰어맞추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코드가 중간부터 원곡과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요가 그렇듯 반복이 많기 때문에, 다른 악기들이 메인 악기에 맞춰서 연주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베이스와 기타도 오늘 이 곡을 처음 연주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워낙들 실력이 출중한 탓인지 결과물은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자기 턴이 올라오면 기교도 현란했다. 피아노만 그런 게 아니라 베이스와 기타도 손가락이 빠르고 감성이 풍만했다. 서울에서 버스킹을 하러 다니면서 다른 많은 팀들도 봤고, 공연도 다수 관람했지만 이런 실력자는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연습해서 실력을 끌어올린 게 아니라 즉흥으로, 그저 술 한잔 걸치고 담배도 피워대면서 흥에 겨워 치는 건데 이 정도 퀄리티가 가능하다고?


나는 이날 그들의 공연을 본 뒤, 버스킹을 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현란한 기교에 환상적인 즉흥연주였다. 황홀하고도 씁쓸했다. 이런 연주를 듣고 사는 사람들을 내 공연으로 감격시킬 자신이 없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조차 패배한 채로였는데, 오자마자 또 패배를 당했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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