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분노와 술과 여행 결심과

by 위키별출신

짜증이 났다.


다시 돌아온 그를 받아줬던 나 자신에게 말이다.


나는 카톡 프로필에 떠 있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연락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연락하면 지는 듯한 느낌이다. 전화해서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상대도 그걸 알고 있겠지. 그런 애매한 대화를 하지 않도록 배려할 셈이었으면 적어도 문자는 남겼을 거다.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발렌타인 데이가 조금 지난 어느 주말, 내가 아직도 그가 연락을 할 지 여부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깨끗이 정리할 방법은 한 가지. 전화를 걸어서 크리티컬 히트를 맞는 거다. 이제 우리, 더 이상 안 만나는 거지? 아니면 녀석에게 펀치를 날리는 거다. 전화를 받으면 소리라도 질러주는 거다. 너 다시는 나에게 돌아올 생각 하지 마. 그 정도의 염치없는 놈은 아니겠지? 네가 좋아하는 얄랑한 철학자들, 섬세한 작가들이 이런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하니? 인간은 행동으로 본인의 인성을 증명하는 거야. 넌 줄곧 자신의 지성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네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굴었지만, 이제 알게 됐네. 너는 네 가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그거, 혹시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거 아니니? 스스로에게는 네가 정당하고 진보적이며 공정한 인간이라고 멋진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니니? 난 바닥에 기어다니는 개미를 오른손 엄지로 지긋이 짓누르는 것처럼 날 침묵과 무시의 감옥에 가둬 두고는,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그것 또한 잔인함이라는 걸 모르는 거니? 다른 사람에게는 이딴 식으로 하지 마. 적어도 네게 내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도, 마침표는 찍을 정도의 예의는 보여줄 수 있는 거잖아?


cat-2356021_1920.jpg


두 번의 잠수 이별. 이번에는 우리는 연인사이냐는 물음에,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사람을 홀리는 예쁜 눈웃음을 지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비겁한 녀석. 나는 예상했다. 이 남자는 전화 조차 받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 예상을 확인하기 위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지 않으면 그런 대로, 내 스스로에게 답을 주기 위해서.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걸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혼자서 의미를 부여하고, 마무리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러 보드카 베이스의 KGB를 다섯 병 샀다. 나는 주량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보통 KGB 한 캔이면 기분 좋게 취하는 편이었다. 전화를 건 것은 평일 오후 열한 시 정도였다. 손님은 나 밖에 없었다. 집에서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단골이라 얼굴을 아는 사이인 70대의 사장이 아는 체를 했다.


“아니 낮부터 술이야?”


“그러게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술을 싸들고 좁은 내 방으로 올라갔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던가.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추억을 불러들인다. 완벽하게 결말이 났다는 걸 확인한 상황에서 내가 떠올린 건 이번에 헤어진 남자와의 얄랑한 추억이 아니라, 그 전 남자였다.


그 남자 역시도 미국인이었다. 이름은 제임스. 그는 이번에 잠수이별을 한 녀석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반대 타입. MBTI로 보자면 ESTJ. 키는 조금 더 커서 180cm를 훌쩍 넘었으며 미국 여자들이 좋아하는 마초맨 스타일은 아니지만 완전히 스키니하지도 않았다.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여행을 좋아해서 한국 이전에도 여러 나라에서 여행을 하거나 거주하거나 했었다. 중남미에서 강도 당한 이야기, 아프리카에서 맹수와 마주친 이야기, 돈이 떨어져 유럽의 지하 통로에서 친구와 함께 잤던 이야기 등 그와 있으면 여행담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와 만났던 것도 제주도에 여행 가서였다. 호스텔에서 일본 여자들과 이야기하다가 나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어봤던 것이 시작이었다. 몇 번 말을 섞다 보니 꽤나 성격이 맞는다는 걸 알게 돼서 한동안 제주도를 함께 여행했다. 여행할 당시에는 별 말이 없었는데 얼마 더 알고 지내다가 서울의 내 집 앞으로 찾아와서는 ‘결혼해 달라’고 했다. 자길 한 번 믿어달라면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 그리고 너 보다는 연애 경험이 많지. 그래서 잘 아는 데, 이런 잘 맞는 조합은 흔치 않아. 날 놓치면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뭐 이런 말투였기 때문에 좀 열받았던 기억이 난다. 날 설득하러 온 거 아니었어? 좀 더 공손해야 하는 거 아냐?


그와 나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농담처럼 나와 결혼해서 7명의 애를 낳아서 잘 살고 싶다고 얘기했고, 나는 애 낳을 생각은 커녕 너랑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느냐고 했고, 그는 카톨릭이라고 했고, 나는 너처럼 자유분방한 애가 카톨릭이라니 웃기다, 한두 명도 아니고 7명이라니 날 가축 취급하는 거냐고 했고, 뭐 그러다 보니 헤어졌다. 정확히는 내가 찼다. 너랑 얘기하는 건 즐겁지만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목숨 걸고 사랑한 여자랑 친구로 지낼 생각 없다면서 자신에게 연락할 생각 말라고 호통쳤다. 몇 달 지나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지금은 후쿠오카에 살고 있다.


나는 그와 알고 지내는 내내 그의 여행벽과 그 때문에 쌓게 된 다양한 경험에 콤플렉스를 느꼈다. 전 세계 곳곳 안 가본 데가 없는 그의 경험의 총량을 조금이라도 따라잡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와 만났을 때 나의 여행 경력은 주로 동남아와 일본에 몰려 있었다. 뭐, 일본어를 잘 하니까 일본에 자주 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긴 했지만, 왜 더 다양한 곳에 가 보지 못했던 걸까? 특히 금발의 미남미녀가 거리를 활보하는 유럽은 어째서 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유럽에서 겪은 일을 들을 때 나는 조금 어깨를 수그리곤 했었다. 그가 꽤나 부유한 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좋은 수입원이 있다는 것도 나를 주눅들게 하지 못했지만 그가 가진 풍부한 여행 경험이라는 자원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하고 실행해 온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결정으로 두 발 딛고 얻어낸 소중한 결과였고, 그것을 조금도 성취하지 못한 점에서 나는 그와 동등해질 수 없었다.


keyword
이전 01화01. 내가 잠수 이별을 당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