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나는 제임스와 만날 때는 사람으로써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줬다. 헤어질 때는 거기에 분노와 슬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호소가 섞였든 그렇지 않던간에 마무리는 지었다 이거다. 나는 그에게 분명하고 똑똑하게 연인으로서는 우리 사이에 진전이 없을 것임을 되도록 담담한 어조로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제임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헤어질 때도 내가 만약 헤어짐을 고하는 쪽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도록 노력해왔다.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드. 이 서사시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루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영혼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의 몸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전체 줄거리는 한 편의 복수극이다. 그리스군 용사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무시한 총사령관에게 화가 나, 자신의 어머니인 여신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여신은 아들의 바램을 들어주었다. 아들의 소원은 비록 우리편이지만 자신을 무시한 데다 쏙 빼놓고 출전한, 그야말로 고대 그리스판 왕따를 주도하고 있는 그리스군이 지는 것.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원하던 대로 그림은 진행되지 않는다. 그리스군이 지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아킬레우스의 소중한 파르토클로스가 그만 전투에 참가해 전사해버린다. 그에 절망한 아킬레우스는 신들의 무기로 단단히 무장하고 헥토르를 처단, 몇날 며칠에 걸쳐 분노를 쏟아낸다. 한 마디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 분노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분노를 쏟아내기에 적절한 고대에는 그 힘을 전투에서 적을 죽이는 것으로 승화했다지만,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두 번이나 잠수 이별을 하면서 나를 농락한 자를 눈앞에 끌어다 놓고, ‘네 죄를 알렸다’라면서 몇 대 때려주거나 말로 단죄하면 좋겠지만, 그럴 방도가 없다. 술에 취했는데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세 병째의 KGB로 나발을 불면서, 홧김에 저지른 사람들의 실수와 범죄들을 검색해보았다. 부인과 말다툼을 하고 홧김에 현금 600만 원을 창밖으로 뿌려버린 남자,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하자 홧김에 상대의 집에 불을 질러버린 사람, 돈을 빌려간 사람이 갚기는 커녕 자신을 무시하자 중장비를 몰고 나타나 상대방을 협박하고 경찰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다가 체포된 사람, 말다툼 뒤에 차로 건물을 들이받은 중년의 여성.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이런 걸 할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상대와의 통화였다. 기껏해야 전화로 욕이라도 해 주면 조금 나아질 텐데, 잠수이별한 남자는 전화 조차 받지 않는다. 문자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대답도 없고 반응도 없는 문자로는 전혀 타격감이 없고, 분노를 잠재울 만한 재료도 얻지 못한다.
그를 향해서는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분노가 치밀었다. 당한 사람에게서 이유를 찾는 것은, 마치 “너 왜 방심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거야”라면서 환한 대낮에 이마트 앞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을 맥락없이 비난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가해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그 역시 잠재워야 했다. 아니, 그는 소시오패스 같은 놈이었어, 본인이 이런 놈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게 하지 않았고, 항상 젠틀맨처럼 굴었어. 누가 알았겠어? 이딴 식으로 마무리를 지을 정도로 나를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중요도가 낮은, 그리고 이렇게 행동해도 반격할 패가 없는 우스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심리학자 조지 로웬스타인(George Loewenstein)과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가 수행한 연구를 종합해서 결론 하나를 도출하자면, 강렬한 감정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배고픈 상태에서 쇼핑했을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물건을 많이 사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쇼핑 뿐 아니라, 격정적인 상태에서는 판단을 그르치게 마련이다. 그건 극단적으로 살인이 될 수도 있다. 뭐,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중에 돌아보면 지워버리고 싶을 말과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을 위로하겠다고 다가온 친구와 절교를 선언한다던가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는 누구나 낼 수 있다. 그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은 그럴 만한 사람에게 적당한 정도로, 적절한 때,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그 이후로 약 일주일 넘게 술에 절은 채로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분노를 다루는 데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상태에서 섣불리 사람을 만나러 돌아다니거나 모임에 참가하거나 하는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았다. 대개 더 이상한 사람과 꼬이거나 더 더러운 기분을 불러오는 대화로 상처가 더 깊어지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들어간 웹사이트는 항공권 구매 사이트였다. 과거 연애는 물론 일에서 실패했을 때도 나는 여행으로 시름에 찬 마음을 달래곤 했다. 마지막 도피 여행은 대만이었다. 대만에서 일본산 푸딩을 먹으며 약 2주 정도 한국에서 떨어져 지낸 뒤 돌아왔을 땐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상처가 꿰매져 있었다.
두 남자가 떠올랐다. 유럽에서의 여행담을 쏟아내던 제임스, 그리고 유럽에 가지 못해서 어딘가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잠수 이별자.
‘나는 네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해 주지.’
항공권은 저렴했다. 나는 그 때도 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을 내가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구매 버튼을 눌렀다. 리턴 항공권이 없는 원 웨이 티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