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타:로빈1

by 위키별출신

내가 로빈을 만난 것은, 기오르기와 산초와 파푸너와 일리야를 만나서 버스킹을 하러 다닌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파푸너와 일리야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할 예정이다.


그날 나는 리버티 스퀘어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피아노 가방의 손잡이가 떨어져나가는 통에 한동안 버스킹을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가방을 고쳐야 한다’는 내 말에 호스텔 관리자인 니노는 ‘이곳에서 그런 거 수선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면서 안 됐다는 식으로 말했다. 수많은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선하는 곳을 어렵게 찾아가보니 그 말 대로였다. 고작 천으로 된 손잡이를 고치는 데 60유로를 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곳 물가로 생각하면 한국 돈 몇 십만 원을 내고 고치라는 건데, 어디에서 이 가방과 같은 것을 찾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수선을 맡기는 것을 선택했다.(근처의 악기상을 가도 적당한 가방을 못 찾음)


쉬는 동안에 놀면 뭐 하나.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는 버스킹으로 낭만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와서 실행해보니 그것은 머릿속에 있었던 상상과는 차이가 현격하긴 했다. 외쿡 서양인들과 어울려 함께 노래를 하고 합주를 하면서 버스킹을 하고 문화를 교류하고…. 는 첫 단추부터 꿰기가 쉽지 않았는데 나와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사람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눈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은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아까부터 연주하는 곡이 내가 한국에서 연습하던 곡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뭐,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고 밴드는 같은데 선곡한 곡이 다르다던가 하는 차이점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상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면서 청취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손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묘하고도 미묘하여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며,

신비하고도 신비하여 소리가 없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므로 능히 적의 생사를 맡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微乎微乎至於無形

神乎神乎至於無聲

故能爲敵之司命


스텔스 기술은 적군의 레이더에 뜨지 않고 그의 지역을 방해받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이순신처럼, 멀리서 버스커의 음악을 듣는 데는 장점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실망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해서 떠날 때도 그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나는 그의 눈에 든 청중 중 한 명이 아니었으므로. 인사하고 떠나면 되지만 그렇게까지 하는데 팁을 안 주고 가기는 어려워진다. 나는 상대가 전혀 눈치 채지 않는 순간에 팁박스에 돈을 넣고 사라지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주자가 돈을 넣은 나를 향해 ‘쌩유’라고 인사를 하는 순간의 어색함보다는 아예 그가 내가 팁을 줬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쪽을 택해 왔다.


그러나 이 날은 무엇때문인지 내 기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아닌 척 하면서 상대의 음악을 들었다는 것을 알 만큼 눈치가 빠른 연주자는 흔치 않다. 사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전화 하는 척, 근처의 고양이나 강아지 만지는 척, 옆 사람과 대화하는 척 하면서 연주자의 근처에서 시간을 끄는 데 능숙했다. 그런데 이 날 내가 개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은 다음 살짝 고개를 돌렸을 때, 기타 연주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마침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후렴인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부분이었다. 그는 내가 안 듣는 척 하는 걸 알고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기라도 한 듯 쿡, 하고 웃어보였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행동을 멈추었고, 다음 순간에는 내 행동이 읽혔다는 점에 짜증이 났다. 어서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내가 눈이 마주친 순간에 한 명의 조지안이 동전을 박스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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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뿐인줄 알았다.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여행을 온 나와 달리, 다수의 버스킹 여행자들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햇볕 좋은 땅을 찾아다니는 철새들처럼, 실컷 노래를 부른 다음에는 질렸다는 듯 주저없이 그 지역을 떠난다. 장비를 보아하니 버스킹을 한두 해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실력도 괜찮았고 기타도 얼핏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상판이 무척 고급져 보이는게 기백만원은 할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날 파푸너와 스마트 마트에서 만나 일리야에 대한 푸념을 조금 들은 다음 언제 버스킹할지를 정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다른 호스텔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이런 저런 호스텔을 전전했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곳은 리버티 스퀘어의 알토란 같은 땅에 위치한 A 호스텔이었다. 호스텔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고급지고 오래 된 역사가 돋보이는, 마치 박물관을 호스텔로 개조한 듯한 곳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조지안이 아니라 뉴질랜드인으로, 나중에 조지안들이 해당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게 되면 가격이 뛸 것으로 예상하고 투자 목적으로 이곳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건물을 놀릴 수는 없기에 호스텔로 개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지역의 예술가란 예술가는 다 철판에 붙는 마그넷처럼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화가, 작가, DJ, 사진가 등 온갖 예술 분야 종사자들이 귀신같이 알고 묵으러 들어오는 통에 이곳에서 지내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오늘의 모험(?)은 일찍 끝났냐며 말을 붙이는 니노(호스텔 관리자)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거실 쪽으로 향했다. 앞서 밝혔듯 이곳은 호스텔이 아닌 곳을 개조한 곳이라서, 거실이라기 보다는 역사 건물의 콘코스 같은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지나칠 정도로 넓었다. 천장은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높이였고, 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아래에는 소파가 몇 개 놓여져 있었는데 그 앞에는 오늘 새로 묵게 된 멤버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빈. 낮에 〈Across the Universe〉를 치던 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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