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은 너처럼 뮤지션이야. 음반도 내고 버스킹도 하니까 둘이 말이 잘 통할거 같은데?”
니노는 우리 둘을 인사시키고는 사무실 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로빈은 낮과는 달리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단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지 않았다. 소개를 받았는데 바로 사라지는 것은 좀 예의없는 짓이니 잠깐 말이라도 섞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상대방이 말할 의지가 없다면 애써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나는 코코아를 타서 3층으로 올라갈 생각으로 전기 포트에 불을 올렸다. 그리고 그가 말을 붙였다.
“우리는 항상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아?”
간신히 이름이나 소개받은 다음에 할 말은 일반적으로 아니지만, 이 호스텔은 이런 종류의, 핀트가 좀 나간 사람들이 주로 많이 오는 곳이다. 어제는 독일 언어학 박사 커플을 만났는데 한국처럼 존댓말을 쓰는 것이 그 나라 시민들의 뇌의 활용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두 시간이나 이야기했다. 그리고 로빈은 뮤지션답지 않게 이 주제에 대해 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도 할 말이 많았다. (읽는 분들이 잊었을 수도 있어서 상기시켜 드리는 건데, 나도 핀트가 좀 나간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 의해서 인정과 수용 같은 작업으로 특정한 역할을 연기하게 되는 걸 사회화라고 하는 거잖아.”
“그런 면에서 인간을 가축이라고 일갈한 철학자도 있었지.”
그와 나는 융, 페르소나 등을 끌어와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사실은 가면을 써야 하는 압박을 받으며 본질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마치 식용으로 길러지는 가축들과 다를 바 없는 점에 대해서 말했다. 둘 다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우리 사이에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정말 갑자기였다. 그가 낮에 버스킹 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혹시 낮에 리버티 스퀘어 앞에 있지 않았어? 내가 비슷한 사람을 본 것 같았는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로빈은 갑자기 푸하핫, 하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넌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구나. 사기 같은 건 절대 못 치겠다.’라면서 놀리듯이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으로 ‘무슨 얘기야?’라고 되물었지만 그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라면서 비칠 비칠 웃을 뿐이었다.
나는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 왜인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져왔다. 이 녀석, 머리가 좋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날 알아봤지만 시치미 떼고 딴 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 방심한 순간에 물어보게 되면, 상대가 그 주제로 긴장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긴장하지 않으면 아닌 거고, 긴장하면 정답은 굳이 상대에게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예스인 법.
그나저나 표정도 지나치게 잘 읽는다. 보통 사람들은 인종이 달라지면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을 읽는 능력이 둔화된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으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래뵈도 최소한의 반응을 했단 말이다.
아무래도 동양인이랑 밀접한 관계로 오래 지냈거나, 아니면 사귀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런 접근은 여행지에서 한 번 뜨거운 만남을 해 볼까 하는,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종류의 대화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실연을 극복하고 다시는 연애 같은 불확실하고 노력을 배반하는 인간관계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러 온 거지, 또 다른 해결 불가의 문제에 빠져 허우적 거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혀를 찼다.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피곤하다고 핑계를 대며 거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아무래도 분야가 겹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된다. 얼마 뒤, 나는 스마트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곡을 보아하니 로빈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독하게 잘 쳤다. 리버티 스퀘어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실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청중들에게서 팁을 많이 끌어낼 욕심이었는지 엄청나게 빠른 속주와 현란한 기교를 선보이고 있었다.
실력 면에서는 나와 비교가 안 된다. 아, 열등감. 다행히 군중들이 두껍게 모여 있어 내가 그의 연주를 듣고 있다는 걸 들킬 염려는 없었다. 음악이 멈췄다. 사람들 사이로 뭘 하고 있나 몰래 살펴보니, 그의 실력에 감동한 조지안들이 술을 사다 바치고 있었다. (담배나 술을 주는 경우가 꽤 많다.) 한동안 연주는 하지 않겠구나 싶어서 군중의 숲을 지나쳐 거의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내 이름을 커다랗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오르기였다. 하필이면 사람들 중에 기오르기가 있을 줄이야. 나는 못 들은 척하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자기 목소리가 작아서 내가 듣지 못한 것인 줄 알고 기오르기가 더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뭐가 이렇게 안 풀리지? 나는 고개 들어 원망하듯 하늘을 잠깐 쳐다본 다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기오르기는 나와 언제 버스킹을 같이 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했다. 약속을 정하고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다를까 로빈이 옆에 와 있었다.
그는 기분이 조금 나빠 보였다. 아까 사람들의 숲 사이로 몰래 봤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행복한 표정이었는데. 로빈은 혹시 자기 연주를 들었냐면서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나치는 길이었다고 한 뒤 버스킹 열심히 하라고 파이팅을 외친 다음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오늘 연주는 끝났어. 밥 먹으러 갈 건데 혹시 배고프면 같이 갈래? 내가 쏠게.”
“….”
지금은 저녁 일곱 시다. 버스킹에서는 피크 타임의 시작이다. 그런데 벌써 접는다고? 물론 힐끗 본 그의 팁박스는 동전과 지폐로 가득 차 있으니 이쯤에서 접어도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필이면 나는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데 어쩌지? 라고 생각하는 과정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번에도 로빈은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답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는 잠깐만 기다려, 라고 말한 뒤 내려 놓고 온 악기며 팁박스에 돌아가서는 서두르는 손으로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빨랐다.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다는 틈을 타, 나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이제 와서 배가 부르다는 둥, 약속이 있다는 둥 하게 되면 내가 그를 피한다는 사실이 너무 티가 나 버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