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시간

by 파롤


만취한 창윤이 승희의 집에 들어가려다 택시에 강제로 태워져 귀가한 다음날이었다.


창윤은 승희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승희가 출근을 할까, 어떻게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던 창윤이 사무실에 들어오자 승희가 인사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당황한 창윤이 “어.. 안녕!” 하고 인사하자 승희가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창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어색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점심시간. 창윤이 승희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하자 승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순대국밥집. 창윤이 민망한 표정으로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 씨.. 아니 승희대리. 어제는 미안했어. 사실은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팀장을 맡게 되었는데.. 승희대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너무 들뜬 나머지 큰 실수를 했네. 미안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과를 하는 창윤을 바라보던 승희.


“네.. 많이 취하신 것 같았어요.”


승희가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고 술자리를 즐기는 편도 아니어서.. 앞으로 회식 자리를 좀 줄여주실 수 있을까요?”


창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억지 미소를 지은채 승희를 바라봤다.


“그럼!! 요즘 회식 강요하면 큰일 나지. 어제는 잊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


승희는 살짝 미소 지었다.


“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오후 3시. 은정이 승희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승희 댈, 우리 빨리 친해지자. 거기 남자들밖에 없어서 외롭지 않아?”


“아직 괜찮습니다. 업무를 빨리 익히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거기.. 그렇게 일 시키는 곳 아니야. 승희 댈 전임자도 업무 시간에 맨날 놀다가 퇴근하고 창윤팀장이랑 술만 마셨어.”


승희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전.. 일에 집중하고 싶어요.”


“아니 그렇게 어깨에 힘 들어갈 필요 없다니까! ㅋㅋㅋㅋ 근데 거기, 민석 인턴 있잖아. 나 좀 친해지고 싶은데.. 우리 셋이 같이 술 한잔 하자!”


은정의 멈추지 않는 메신저에 승희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오후 5시. 창윤 팀장, 정훈 대리, 민석 인턴과 함께 팀 회의가 끝나자 승희가 조심스럽게 민석 인턴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잠깐만..”


민석이 승희를 바라보며 회의실 문을 닫았다.


“대리님, 어제 잘 들어가셨죠? 모처럼 재밌었어요!”


“네. 잘 들어왔어요. 저 혹시.. 오늘 은정 대리님이랑 같이 저녁에 술 한 잔 할래요?”


민석이 깜짝 놀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승희대리님도 같이 가는 거죠?”


승희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네..”


“네! 이따 봐요!”


민석이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흥얼거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승희는 자리로 돌아와 은정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민석 인턴도 오늘 시간 된다고 해요. 이따 어디서 만날까요? 아! 저는 술을 잘 못해서.. 앉아만 있다가 갈게요.”


은정이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민석 씨가 온대?? 웬일이야!!! 우리 승희 댈 능력 있네! ^^ 그리고 불편하면 승희댈은 안 와도 돼.”


승희는 뜻밖의 제안에 솔깃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 가고 싶었던 승희가 답을 하려던 차에 은정이 말을 이었다.


“굳이 민석 씨한테 말할 필요는 없고! 암튼 알아서 해.”


승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다가 남은 업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는 가지 않았다. 어제의 피로가 이어지기도 했고 또다시 불편한 술자리에 끼고 싶지도 않았기에.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민석이 승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제 안 오셨네요? 왜 그러셨어요?”


승희가 할 말을 찾고 있던 차, 민석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실망했어요.”


차가운 눈초리로 돌아서는 민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승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이어 은정이 승희에게 다가와 어깨를 톡톡 치며 인사를 건넸다.


“어제 왜 안 왔어~~~ 너무 재밌었는데!”


승희가 은정을 바라보자,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덕분에 땡큐!! 다음엔 같이 해~~”


승희는 아침부터 피곤했다.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사람이 힘들었다. 그리고 업무 시간. 승희는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이내 창윤에게 말을 건넸다.


“팀장님, 저 오늘 해야 할 업무가 어떤 걸까요?”


창윤이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쉬고 있어.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승희는 계속 창윤의 업무지시를 기다리다가 점심시간이 왔다. 또다시 탕비실에 모인 여직원들. 승희가 도시락을 사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자 탕비실에선 또다시 쌍욕이 난무했다. 승희는 다시 저 공간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표정이 안 좋은 승희를 발견한 정훈이 다가왔다.

“점심 같이 먹을래요? 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가볍게 먹을 건데.”


승희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정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다이어트 도시락을 파는 곳.


“저 요즘 식단하거든요. 그래서 샐러드 먹어요. 퇴근하고 헬스장 가서 2시간 운동한 다음엔 엄청 먹지만요.”


정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전 점심시간엔 혼자 있고 싶어요. 사람들 다 말 많잖아요. 남자들은 담배 피우면서, 여자들은 탕비실에서. 다들 너무 피곤해요. 근데 이렇게 마이웨이로 지내면.. 좀 살 것 같아요. 외롭긴 하지만.”


샌드위치를 고르던 승희는 정훈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저도.. 같이 와도 돼요?”


승희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정훈이 웃었다.


“저야 좋죠! 외롭지도 않고.”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더 이상 탕비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고마워요. 대리님! 아, 퇴근 후에 헬스장에서 2시간이나 운동을 하신다고요? 대단하시네요!”


승희가 웃으며 말하자 정훈이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겁먹지 말아요. 제가 마이웨이긴 하지만.. 승희대리님이 커피 마시자고 하면 언제든 같이 가줄게요.”


승희는 갑자기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힘든 아침이 지나고 더 힘든 점심시간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 이런 순간도 찾아오는구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저도 커피 좋아해요. 드립커피 좋아하는데.. 제가 내일 드립커피 해드릴까요?”


“완전 좋아요! 내일 오후에 회의실에서! 일도 알려드릴게요.”


승희와 정훈이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승희가 회사에서 처음으로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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