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몇 번이나 외면해도 시선을 거두지 않는 눈빛처럼,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으로 규민이 악수의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잡아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내내 거절해야 하는 걸까.’
재희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이게 뭐야?’ 하는 표정으로 규민이 재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별명이 여군이에요. 깍듯하게 인사드렸습니다.”
규민은 말없이 한참 동안 재희를 바라보았다.
다음날.
재희, 현지와 회의를 하던 승훈이 입버릇처럼 규민 욕을 했다. 입사 이후 매일 같이 틈만 나면 규민 욕을 하는 승훈의 모습에 재희는 피로감을 느꼈다.
“팀장님. 규민 과장님 열정이 대단한 것 같아요. 전 응원해드리고 싶어요.”
승훈이 배신감에 치를 떠는 눈빛과 표정으로 회의를 종료했다. 그리고 재희를 따로 불렀다.
“난.. 재희 대리의 행동이 몹시 불쾌해.”
“어떤 면에서요?”
“나한테 했던 행동이 무례하다고 느껴져. 이건 당한 사람만이 아는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불쾌했는지, 제 행동의 무엇이 문제가 된 것인지를 알려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재희가 승훈에게 말했다. 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승훈은 회의시간마다 재희의 말을 비판했다. 승진 욕심이 있었던 현지는 승훈 옆에 붙어서 재희의 말마다 끼어들었다.
승훈과 현지는 두 사람만 아는 정보를 통해 재희의 업무 능력을 폄하했다. 그들만의 단단한 성벽 밖에서, 재희는 천천히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제가 모르는 정보였습니다. 지금 확인했으니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재희가 이를 악물며 답하자 승훈과 현지가 비웃었다. 재희가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저도 알려주세요. 같이 웃고 싶습니다.”
승훈이 입꼬리를 비틀며 현지를 바라봤다. 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내내 승훈은 재희에게 시킬 업무에 대해서도 현지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재희가 현지보다 상사였지만 승훈은 그 반대로 두 사람을 대했다.
이후, 현지는 영옥을 비롯한 여직원들에게 귓속말을 하며 재희를 따돌리기 시작했고, 승훈은 규민에게 vvip 고객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시끌벅적하게 웃고 친한 척했다.
“나 담배 다시 시작할까 봐! 규민과장이랑 얘기 많이 하고 싶어!”
규민은 15살 차이가 나는 승훈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뭐~ 좋죠.”
어느 날 재희는 의문의 종이 한 장을 받게 되었는데 승훈이 현지의 승진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그래, 현지 씨도 장점이 있으니까.’
재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에 집중하려던 그때, 승훈이 재희를 따로 불렀다.
“안 좋은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요?”
재희가 묻자 승훈이 뜸을 들였다.
“대표님께 보고 하고 알려 줄게.”
‘그럴 거면 대표님께 보고하고 알려주던가. 미리 불러서 안 좋은 일을 예고하고 기다리라는 건 또 뭐야?’
재희는 승훈이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더 의구심이 들었다.
3시간 뒤. 대표님 보고를 마친 승훈이 재희에게 말했다.
“현지 씨, 임신했대. 혼전임신이라 결혼식도 안 할 거라는데.. 지난주에 우리 미팅했을 때 나를 따로 불러서 말하더라고. 으이구! 자기 관리도 못하고. 일이 지금 이렇게 몰렸는데 임신하면 어쩌자는 거야!!!“
‘언제는 둘이서 나를 그렇게 소외시키고 비웃고 왕따 시키고 별 짓을 다 하더니만.. 그 예뻐하던 직원의 임신소식을 듣고서 저런 말을 하는구나.’
재희는 승훈을 보며 실망을 넘어 서글픔까지 느껴졌다.
“그래도 임신했다는데.. 축복할 일이죠.”
승훈이 재희를 흘겨보며 말했다.
“일시켜야 하는데 빼잖아! 나한테는 안 좋은 일이지!! 난 직원들한테 잘해주기는 해도 진심으로 예뻐하지는 않아. 어차피 회사 나가면 연락 끊거든. 그래서 이럴 땐 진짜 짜증 난다니까!!! 암튼!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절대로!!”
승훈이 손을 입에 갖다 대며 재희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한편에서 규민이 두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가 문득 시선을 돌리자, 규민과 눈이 마주쳤다.
퇴근 시간.
재희의 움직임에 맞춰 규민이 함께 일어난다. 엘리베이터 안의 두 사람.
"우리 언제 친해져요?"
규민이 슬쩍 미소 지으며 재희를 바라본다.
"일하다 보면 기회가 있겠죠."
재희는 피곤에 찌들어 대꾸할 힘도 없었다.
"저, 대리님하고 일하고 싶어요. 우린 진짜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집이 회사 근처이면서도 재희를 따라 지하철역까지 걸어오며 계속 말을 건네는 규민. 재희는 개찰구 앞에 서서 규민을 바라봤다.
“과장님, 우리 내일 만나요!”
애써 밝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재희. 규민이 시선을 떼지 않고 재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