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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May 15. 2023

순례길 여섯 번째 이야기

용서에는 끝이 없다

구간 :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
거리 : 24KM
소요 시간 : 10시간


  이미 내가 쓴 이전 글을 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내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애도로의 초대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추모시를 중심으로"이다. 영미시를 전공하고 있는 내가 논문의 소재로 사용한 시인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iliam Butler Yeats)였으며, 그의 작품을 '애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애도의 개념은 많은 정신분석학자에게서, 그리고 철학자들에게서 자주 다뤄진 주제이지만 특히 나는 그중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애도 이론을 선택했다. 그의 애도 이론은 간단하게 말해서 애도란 끝나지 않으며, 신뢰할 수 있는 한계도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 이전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로서 애도를 끝낼 수 있는 것, 즉 상실된 타자를 잊음으로써 애도의 성공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애도에 반박하여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성공은 실패가 되고 애도 작업의 실패가 곧 성공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데리다는 애도와는 다른 개념인 '용서'에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시킨다. 여기에는 한계나 절제, 측량할 수 있는 범위가 없으며 우리는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 타자에게 향하는 조건적 용서가 아니라 우리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까지 용서해야 한다. 죄를 지은사람에게 '기적과도 같은 선물'로 주어질 수 있는 용서여야 한다. 애도 이론, 환대 이론과 마찬가지로 용서에 대한 논리에 대하여 데리다 역시 자신이 사용하는 '용서'라는 단어가 가진 절대적 가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자에 대한 마음이  닿을 수 없는 극한까지 갈 숫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언덕 초입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로 가는 길목에는 '용서의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오래전 '용서의 성모'를 모시던 작은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당의 역할은 성당 자체로의 기능과 더불어 이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의 아프고 지친 몸을 돌보는 병원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언덕을 오르기 위해서는 돌산을 끊임없이 올라야 한다. 용서의 언덕의 정상이 보이면 점차 길이 가파르게 변하고, 험해지는데 특히 도착하기 30m 전부터 굉장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용서의 언덕이 있는 산등성이에 풍력 발전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장소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부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 바람은 그늘 한 점 없는 언덕을 오르느라 고생한 순례자들을 시원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용서의 성모를 모시는 성당이 바람이 세게 부는 곳에 지어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순례자들은 어떠한 이유로 바람이 부는 이 언덕까지 힘겹게 올라오고서야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지도교수님께서 어떤 선생님의 말을 빌려 용서의 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이 잘못한 일을 어떻게든 기억하려 바위 위에 새긴다고 한다. 두고두고 기억해야 복수든 용서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모래 위에 써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야 바람이 불었을 때 금방 사라지도록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용서의 언덕에 세찬 바람이 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풍력 발전기를 돌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고, 이곳을 통과한 바람이 한계도 없이 날아가버리는 것을 보면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들을 여기에서 부는 용서의 바람에 날려버리도록 말이다.

용서의 언덕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용서의 언덕 반대편 비탈길에 있는 기념비였다. 여기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된 92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기념비가 있었다. 이들은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희생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죽음이 더 끔찍한 것은 어떤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 사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무엇이든 용서해야 하는 언덕에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애도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까지도 용서해야 하는 바람이 부는 장소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가 함께 있다. 상반된 두 가지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어떤 이들은 용서의 언덕에 올라 내가 어떤 것을 용서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고 한다. 즉, 용서의 주체와 대상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가 이 '용서의 언덕'인 것이다. 용서의 주체로서 어떤 것도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용서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상대방이 용서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죽었다 해도 자신의 잘못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끝없는 용서를 구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푸엔테 라 레이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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