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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May 15. 2023

순례길 다섯 번째 이야기

팜플로나는 미쳐있다

구간 : 수비리 - 팜플로나
거리 : 20.4KM
소요시간 : 7시간 30분

  

  순례길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출발점에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아야 한다. 물론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크레덴시알이 있어야 완주증서를 받을 수 있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발급받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내가 생장에서 순례자 사무소에 방문했을 때 주의사항을 들었다. 순례자 사무소 봉사자는 특히 한 가지를 여러 번 당부했는데 그것은 바로 팜플로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걷는 시기에 팜플로나 지역 최대 축제인 산 페르민(San Fermin) 축제가 열리고 있고 숙소가 다 찼을 것이니 될 수 있으면 돌아가라는 이야기였다. 산 페르민 축제가 방문객에게 우호적인 축제이긴 하지만, 모두가 소란스럽고 흥분해 있으므로 소매치기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말해주었다. 간혹 강도, 폭행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니 잘 고려해서 루트를 선택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실제로 팜플로나에 도착해 숙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로 전날 새벽에 여러 명의 지역 10대들에게 모여서 인도인 한 명이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하필 내가 도착할 예정이었던 7월 14일은 산 페르민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숙소를 검색한 결과 팜플로나에 숙소가 있긴 했다. 그리고 일행 중 한 명이 팜플로나에 친구가 있어 그곳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해주었다. 고민 끝에 팜플로나에 가서 축제 현장을 느껴보기로 결정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안전에 주의만 한다면 순례길을 걷는 중에 생기는 좋은 경험일 것 같았다. 아무런 계획 없이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지역에서 가장 큰 축제라니! 산 페르민은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페르민(Saint Fermin)을 기리며 열리는 종교 축제이다. 9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기간에는 바스크 지방의 전통 경기, 종교 행사, 민속 음악과 춤 공연 등 150여 개의 행사가 펼쳐지는데 단연 가장 유명한 것은 '엔시에로'(Encierro)라는 소몰이와 매일 저녁 열리는 투우 경기라고 한다.

까미노의 아이콘인 조개 껍데기

  걱정과 기대를 한껏 안고 새벽 이른 시간 출발했다. 먼저 간 사람 중 누군가가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가는 길은 이전 길에 비해 어렵지 않고, 4~5시간이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다고 기록해 두었다. 그 말만 믿고 가벼운 마음 가짐으로 길을 나섰는데, 웬걸. 열두 시면 팜플로나에 도착할 줄 알았던 나는 한시 반이 넘었음에도 길 위에 있었다. 분명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열심히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도를 펼쳤을 때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가 주는 절망감은 엄청났다. 날은 점점 뜨거워지고, 점심도 도착해서 먹을 계획이었으므로 그늘이 있는 곳마다 앉아서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시 반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순례길 중간 중간에는 주스, 빵 등을 주고 기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팜플로나 바로 전 마을인 부를라다(Burlada)부터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페르민의 상징인 하얀 옷과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한 마을 전인데도 불구하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흥분은 팜플로나의 그것이 어떨지 엄청난 기대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팜플로나에 도착했다. 도시 초입부터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착장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시내로 들어가니 이 복장의 사람들은 모든 골목을 꽉 채우고 있었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모두 춤을 추고 있었다. 급격하게 뜨거워진 스페인의 기온에 팜플로나 사람들의 열기까지 더해지니 도시는 그야말로 불가마와 같았다. 잔뜩 신난 사람들을 보며 얼른 짐을 정리하고 나가서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며칠 동안 이어진 뙤약볕 아래서의 강행군은 내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날부터 몸에서 열이 빠지지 않더니 급기야 오늘은 발에 땀띠가 가득하고 상기된 얼굴이 가라앉지 않게 되었다. 충분히 차가운 물로 적셨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더위는 내 몸속에서 자리 잡고 빠져나가지 않겠다며 시위하고 있었다.

  휴식이 간절했다. 그런데 산 페르민 축제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이들의 열정은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7시에도 그들은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잠을 자야 하는데도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축제의 마지막임을 알고도 이 마을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문화와 전통인 이 축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 역시 3년 만에 진행된 행사를 즐기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준 교훈처럼 그들은 모든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기고 있었다. 축제에 대한 짜증은 그들의 열정에 대한 부러움으로 변했다. 조금 더 몸이 건강하고 체력이 받쳐줬다면 나 역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나에게는 가야 할 길일 있었고, 여전히 열정적인 그들을 뒤로한 채 다음 마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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