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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May 08. 2023

순례길 세 번째 이야기

청춘은 그렇게 낙엽이 된다

구간 : 생장 피에드 포트 - 론세스바예스
거리 : 24.2KM
소요시간 : 10시간




  순례자들은 프랑스 길의 출발점인 생장 피에드 포트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구간인 "나폴레옹 길"을 걷게 된다. 나폴레옹 길은 가장 아름다운 코스이면서 가장 힘든 코스로 유명하다. 끊임없이 펼쳐진 오르막에 좌절하다가도 올라온 길을 되돌아본 순간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광경에 감탄하게 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오르다가 정상을 맞이해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도 잠시, 오르막보다 더 끔찍한 내리막이 시작된다. 순례자들에게 이 구간이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첫날부터 이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배낭을 메고 잘 걷는 요령을 터득한 다음 이 길을 만나게 된다면 좋을 텐데, 나폴레옹 길은 이제 막 까미노를 시작한 순례자들을 사악한 미소로 맞이한다. 까미노를 준비하면서 얻은 정보들로 짐을 꾸리고 걷는 연습을 했지만, 피레네 산맥이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방식은 그동안의 준비를 모두 무너뜨린다. 이 구간에서 까미노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발생한다고 했던 순례자 사무소 봉사자의 말은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게 해 준다.


  앞으로 나에게 펼쳐질 순간들에 대한 기대와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여름의 까미노는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다섯 시쯤 알람을 맞춰두었다. 기껏 알람이라고 해봐야 손목에 찬 시계가 진동을 울리는 정도이니 그것만으로 피곤에 찌든 순례자들이 깨겠냐마는, 긴장하고 있던 내게는 약간의 진동만으로도 잠을 깨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어둠 속에서 침낭을 접고, 씻을 준비를 하고, 짐을 싸려니 여간 오래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결국 여섯 시가 넘어서야 까미노에서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출발할 때의 생장

  마을을 빠져나가자 이 구간이 힘든 이유가 곧바로 와닿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달구는 태양은 가장 호기로운 첫날의 순례자들을 좌절시켰다. 무수한 글과 영상은 이곳을 걸으면서 느끼는 고통을 10분의 1도 담아내지 못했다. 불과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짐을 내던지고 싶어 졌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 차라리 오르막의 끝이 보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매번 종점인 듯 희망으로 가장한 이 길은 내게 더욱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해가 떠오를수록 산의 공기는 뜨거웠고, 걸어가는 땅은 딱딱했다.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더위를 뚫고 다시 내려간다는 것은 오르막을 계속 오르는 것만큼 끔찍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평지가 등장했다. 그리고 평지와 함께 오르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오솔길이 나타났다. 오르막을 올라오느라 고생했다고 보듬어주듯 나폴레옹 길은 내게 시원한 그늘과 푹신한 바닥을 제공했다. 숲의 그늘은 산의 더운 공기를 낮춰주었고, 낙엽이 쌓인 바닥은 돌 길을 밟으며 걸어온 길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니 이 광경이 기이하게 보였다. 7월의 오솔길은 청춘의 색으로 가득했다. 모든 나무들은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득한 청춘의 바닥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쌓여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낙엽들이 쌓여있었다. 쌓인 낙엽의 두께는 한 두해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무에 달려있는 푸른 잎들은 시간이 지나며 생명력을 잃고 떨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해가 되면 그에 맞게 새로운 청춘이 피어나 다시 낙엽이 되는 과정을 무수히 겪은 길이었다.


  아무도 청춘이 바래버린 낙엽들을 방해물로 여기지 않았다. 나이 들고 생명력을 잃어간 것들은 새로 피어나는 것들을 위해 치워져야 하겠지만, 이곳은 있는 그대로 두었다. 푹신하게 쌓이기 전까지의 낙엽은 사람들을 미끄러지게 하고, 또 짓이겨져 썩어가며 불쾌함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새로운 잎이 돋아나기 전 길에서 밀려나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들의 늙음과 쇠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니 그들끼리의 의미를 다시 한번 발산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큰 위안이었고 그 자체로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었다.


 이 길은 앞으로 걸어갈 많은 시간을 위한 힘을 주고 있었다. 물론,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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