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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May 17. 2023

순례길 일곱 번째 이야기

각자, 또 함께

구간 :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텔라
거리 : 22KM
소요 시간 : 5시간 40분


  둘째 날 수비리를 가는 길에서 총 다섯 팀의 한국인이 모이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만난 팀은 혼자 온 셰프 형과 아빠와 아들이 함께 온 부자 팀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론세스바예스에서 한국인 부부를 만났고, 마지막으로 어린 조카와 함께 온 이모를 마주쳤다. 나까지 총 다섯 팀, 여덟 명은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까미노를 걷고 있었다. 우리가 이 길을 걷는 이유도, 이 길을 완주하기로 계획한 기간도, 길을 걸으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도 모두 달랐다. 그런 우리가 며칠 간 함께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낯선 곳에서 각자가 가진 장점으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함께 적응하여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며칠을 같은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출발하는 시간도, 쉬는 곳도, 도착하는 시간도 모두 달랐다. 다만, 도착해야 할 곳에서 그들을 찾을 수 없을 때면 서로 걱정해주었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우린 에스텔라에서 완전히 헤어졌다. 두 부자는 우테르가에서 로르카로, 셰프 형은 팜플로나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부부와 이모-조카는 우테르가에서 머무는 것으로 했고, 나는 우테르가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로 왔다. 아마 우테르가까지 가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각자의 컨디션에 따라서 이 마을에서 멈출 것인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에스텔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테르가에서 머물기로 한 두 팀이 끝내 에스텔라까지 걸어왔다. 해가 지는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자고 다음 날을 위해 장을 보고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순례길을 시작한 며칠 동안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됐던 그들이 없으니 마음 한 켠이 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들이 이 도시에 도착했고, 저녁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그 때 그 소식이 얼마나 반갑게 들렸는지 모른다. 우리는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끝이 아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또 다시 길에서 만납시다.

언덕 위의 성 같았던 시라우키(Cirauqui)

  며칠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두들 까미노를 걷고 싶던 목적과 얻으려는 것이 뚜렷해보였기 때문이다. 혼자 걷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뚜렷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약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약해지는 순간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내 무거운 다리를 단단한 그들의 걸음에 함께 묶어주었다. 우리는 힘들어도 함께 보폭을 맞춰 끝까지 갈 수 있었고, 모르는 길이 나와도 두렵지 않았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텔라까지 혼자 걷게 되었을 때, 말하는 힘을 아낄 수 있었고 그들과 보폭을 맞추지 않아도 되기에 이전보다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지만,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힘이 들 때면 포기하고 집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더운 날씨와 보이지 않는 목적지보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더 주저앉게 만들었던 것을 보면 하루 이틀 사이에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의지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랬던 그들과 에스텔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누었을 때, 이제는 이 길을 내가 혼자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새로이 펼쳐질 앞으로의 까미노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동안의 시간 동안 비슷한 시기에 출발했던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고, 그들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는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그들과 함께 걸어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기고 있었다. 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길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같은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텔라로 들어가는 길

  같이 걷기에 받는 위로가 있다. 또 홀로 걷기에 생기는 설렘이 있다. 이 길에서는 홀로 걷는다고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함께 걷는다고 해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길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각자의 속도대로 걷다가 헤어지고,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곳이다. 각자가 같은 속도로 걷다가, 다른 속도로 헤어지는 곳. 각자의 시간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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