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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May 20. 2023

순례길 여덟 번째 이야기

까미노의 꼬레아노

구간 : 에스텔라 - 토레스 델 리오
거리 : 29.2KM
소요 시간 : 8시간 30분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외국인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음식 주문을 주문한다거나 무언가를 구입할 때 나누는 가벼운 대화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 한국 군대의 특징 등 무거운 대화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대화에 앞서 가장 먼저 그들이 내게 하는 질문은 어디서 왔냐는 것이다. 요즘에는 조금 형편이 나아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첫 번째는 중국인이냐는 물음, 그리고 두 번째는 일본인, 그리고 나서야 어디서 왔냐고 물어왔다. 한국인들은 해외에서도 서로를 쉽게 알아보지만, 서양인의 시각으로 한국인을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 역시 그들을 보며 백인, 흑인 정도로만 판단할 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듯, 그들 역시 우리를 바라볼 때 동양인일 뿐 구체적인 국가까지 구별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서양인들은 한국인들을 기가 막히게 구분해 낸다.

에스텔라를 나오면 만나는 와인 수도꼭지. 너무 일찍나가서 마시지 못했다.

  사실 그들이 한국인을 구분해 낸다기보다는 굉장히 많은 한국인들이 순례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인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면 80퍼센트 정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까미노에서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인데, 순례길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적 높은 유럽인들은 굳이 이 길을 걷기 위해 열 시간 이상의 비행을 거쳐 온 한국인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도대체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물어본다. 그러면서 자신이 길을 만난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마치 내가 그 한국인과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어디에 살고 외국에는 무엇 때문에 나왔는지 아주 상세히 알게 된다. 외국인의 입에서 한국인들의 정보를 듣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고 까미노에서 한 번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마을 이름에 격하게 공감

  길을 걷다 보면 이런 방식으로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다. 처음에는 '올라~ 부엔 까미노'로 시작한 인사가 며칠 뒤에는 '헤이~'로 바뀐다. 서로 며칠 동안 길을 걸으면서 눈에 익숙해졌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눈으로 먼저 익숙해진 다음 대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이 좋지 못하다보니 대화 소재는 금방 떨어져 버리게 되고, 대화 나누는 것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갉아먹게 된다.


  그런데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신나게 소통할 때가 있다. 그들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일치했을 경우다. 이 날은 걸으면서 아일랜드에서 온 17세 소년을 만났다. 엄마와 함께 까미노를 걷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각자의 속도대로 엄마와 따로 걷고 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전공이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이기에 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들의 수업을 어떤 방식으로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와 나의 공통 관심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축구였다. 그는 학교 대표 축구선수로 뛰고 있기 때문에 축구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 나 역시 축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축구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것을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손흥민뿐 아니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선수들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응원하는 팀에 대한 이야기와 빅클럽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축구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그늘 한 점 없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그렇게 그와는 로스 아르꼬스 마을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내 예상보다 로스 아르꼬스 마을에 일찍 도착해 버렸기 때문에 고민 끝에 목적지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바뀐 목적지는 토레스 델 리오였고, 이 마을에서 약 8킬로 정도를 더 가야 했다. 다시 출발한 지 10분 만에 후회가 몰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후회로 가득했고,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면서 겨우 토레스 델 리오로 가는 도중, 그늘에서 쉬고 있던 22세 미국인을 만났다. 이때부터 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둘 다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날씨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그는 먼저 떠났다. 그리고 토레스에 도착해 알베르게에 들어갔는데, 그늘 아래서 만났던 잭이 같은 방에 있었다.

목적지 800미터 전!

  우리는 알베르게에서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과 석식을 신청하였고, 함께 시간을 보낸 뒤 저녁을 먹게 되었다. 대화의 소재가 떨어졌을 때쯤 그는 나에게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 대해 슬쩍 물어보았다. 내가 가진 관심사와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직접 플레이하는 것과 보는 것을 모두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LCK의 T1과 페이커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자신이 페이커의 엄청난 팬이며 5~6년 정도 계속 경기를 팔로우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주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서 기쁘다고 했다. 덕분에 수많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나는 외롭지 않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수많은 뉴스에서 그들의 유명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로 인하여 안국 문화가 발전해 나가는 방식에 대해 논의한다. 오늘 이야깃거리였던 손흥민, 페이커뿐 아니라 굉장히 많은 순례자들과 방탄소년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자신이 아미(방탄소년단의 팬덤)라고 밝히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북한 이야기까지, 어느새 한국은 외국인들의 적지 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뿌려놓은 한국에 대한 관심은 낯선 땅에서 만난 외국인과의 문화적 친밀감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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