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뒤를 더듬는 형태에 가깝다. 이렇게 기억에 기대어 글을 쓰다 보니 애로사항도 많다. 일단 아무리 대단한 음식 사진을 찍어 놨더라도, 음식과 관련된 기억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얼핏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 흐릿할 것 같지만, 그때의 기억은 단편적이긴 해도 의외로 선명한 구석이 있다. 오히려 나는 어린 시절보다 가까운 과거인 2015년의 한때, 한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11학번으로 휴학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이윽고 졸업식도 참석하기 전에 작은 외주제작사에 취업했고, '막내' 소리가 붙은 작가가 됐다. 그곳에서 함께 일한 분들은 참 좋았으나 크게 배울 것이 없었다. 나는 제자리걸음인 그 회사를 금세 그만뒀고, 너무나 쉽게 좀 더 크고 유명한 프로그램을 하는 제작사로 자리를 옮겼다.
옮긴 제작사에서는 고작 3개월짜리인 나도 경력이 있는 작가랍시고 '막내' 글자를 뗀 '취재작가'로 명명해줬다, 월급도 20만 원이나 올려 1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 짧은 경력도 경력이라 쳐줄 만큼, 사람이 급한 곳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돈을 좀 더 받을 수 있는데 막내 소리가 아닌, 정당한 작가로 인정한단 기분에 들떠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난 그곳을 딱 1달 다니고 도망치듯 그만뒀다. 이유는 '모독'이었다. 태어난 지는 24년, 방송계에 발 디딘 지는 3개월 차. 그 핏덩어리 취재작가에게 PD와 출연진은 성희롱을 일삼았고, 유일하게 기댈 메인 작가 '언니'는 네가 참아 보라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맡겼다.
사회생활 5년 차인 지금도 쉽게 맞설 수 없을 법한 모욕감이 치솟았다.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에 정신과 육체는 모두 피곤에 절었다, 그렇게 내가 한 잘못도 없이 10년 넘게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고, 백수가 되면서 그해의 시간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극한의 스트레스는 간혹 기억을 앗아간다고 한다. 그런데도 용케 살아남은 몇몇 기억들이 있다. 하나는 용돈에 섞여 있던 아빠의 서툰 진심. 아빠는 "사람이 집에만 있으면 부정에 빠져들기 쉬워"라면서 집에서 썩어들어가는 딸을 걱정했다. 바깥바람이라도 쐬라고 서툴게 건넨 용돈은 돈 한 푼 없던 내 지갑에 새로운 용기를 보탰다.
집순이는 먹기 힘든 고급 버전 탕수육. 역시나 최근 회식에서 먹었다. ⓒ 이현희
또 하나의 기억은 황도 통조림이 들어간 엄마의 탕수육이다. 중국 요리는 집순이가 먹기 힘든 음식이다. 한때 짜장면이 파란 츄리닝을 입은 백수의 상징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사실 진짜 백수는 짜장면 한 그릇도 사 먹기 힘들다. 짜장면도 사 먹기 힘든데 하물며 탕수육은 더 먹을 기회가 없었겠지.
탕수육 먹을 일도 없는 백수 딸의 엄마는 황송하게도 유치원 조리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도 한식 외의 음식은 거의 할 줄 모른다. 그런데도 유치원에서 일하며 배운 영향으로 탕수육 소스를 알맞게 만들 줄 안다.
냉동된 채로 파는 마트 탕수육을 사 와서 엄마의 유치원 소스만 있으면 훌륭한 탕수육이 만들어진다. 보통 급식 탕수육 소스에는 새콤달콤 하라고 파인애플이나 프루츠 칵테일 통조림을 넣는다. 이 와중에 입이 고급이었던 나는 프루츠 칵테일의 체리가 싫어서 늘 "이건 어때?"하며 황도 통조림을 고르곤 했다.
황도 통조림을 넣고 탕수육 소스를 끓이면 프루츠 칵테일보다 새콤함은 덜해도 아주 달콤하다. 또 뜨거운 복숭아를 하나씩 쏙쏙 빼 먹는 맛이 있다. 탕수육보다 더 별미인 복숭아를 하나씩 골라 먹으면서 나는 조금씩 우울과 태만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랩으로 꽁꽁 포장해 추억으로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그때의 모멸감은 가끔씩 떠올라 내 정신의 일부를 피폐하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다른 것보다 탕수육 속 뜨거운 통조림 황도를 호호 불어먹는 나의 모습과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엄마와 아빠만이 맴돌았다.
더 자세한 엄마의 탕수육 소스 레시피
- 케찹/간장 2가지 버전
01 베이스가 될 물을 팔팔 끓인다.
02 당근, 목이버섯, 파프리카를 먹기 좋게 썰어 끓는 물에 익힌다.
03 케찹(또는 간장)과 설탕, 식초를 넣는다.
04 불을 끄기 직전 전분 가루를 넣고 농도를 걸쭉하게 맞춰준다.
05 취향에 따라 프루츠 통조림, 황도 통조림 등을 첨가한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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