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라면 가게
By. 김안예
제3장 – 편지 한장
“안녕, 나는 미래의 너야.
늘 혼자라고 느꼈지?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때론 세상과 멀어진 듯 외로웠지.
하지만 나도 그랬어. 울고 흔들리며 자랐고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됐어.
외로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그 외로움을 품고 살아가는 법이 바로 우리라는 걸.
괜찮아, 우리는 잘 견뎌냈어.
서로를 다독이며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어.”
“누군가에게 전하는 작은 편지 한 장이
그 사람의 마음을 구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분명 조금은 덜 외로울 거야.
그리고 한 그릇의 라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따라
마음속에 띄우는 작은 편지가 되기도 하지.”
라면 가게 문이 조용히 열리던 늦은 오후, 촉촉한 빗방울들이 천천히 간판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이곳은 언제나 유난히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온기가 은은한 불빛처럼 오래도록 머무는 듯했다. 간판 끝에 매달린 작은 종 풍경이 부드럽게 ‘달그락’ 울리며 빗소리와 섞였다. 눅눅한 공기 사이로 비에 젖은 흙냄새가 스며들었고, 저녁노을은 하늘 끝에서 서서히 붉은 빛을 퍼뜨렸다.
그날, 문턱을 조심스레 넘은 한 여인이 있었다. 가녀린 어깨 위에 걸친 회색 후드티는 무심한 듯 툭 떨어졌고, 검은 패딩은 빗물에 젖어 묵직한 무게를 드리웠다. 그녀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시선은 저 멀리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키는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 작은 몸에 짊어진 하루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젖은 검은 단발머리는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고, 그 속에 숨겨진 두 눈동자는 깊은 물웅덩이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아린.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길을 선택했다. 유치원 교사가 된 것은, 어릴 적부터 품어온 오래된 꿈이었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 함께 부르는 동요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 작은 손으로 건네는 손그림 한 장이 그녀의 하루하루를 버티게 하는 숨결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사랑조차도 조금은 지쳐버릴 만큼 하루가 깊고 길었다. 평소라면 하원길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을 그 시간, 오늘만큼은 조용히 빗속을 걷고, 무심히 이 가게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세상은 여전히 비에 젖어 있었고, 그 안에서 그녀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곳, 은하수 라면 가게는 조용히 그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유치원 교사로서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꼭 잡고 하나둘 떠난 뒤, 교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린은 깊은 한숨을 삼키며 속으로 물었다.
‘나는 진짜 잘하고 있는 걸까... 유치원 선생님으로서....’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퇴근 시간이 다가왔지만 그녀에게 정시에 딱 맞춰서 가방을 챙기고 나가는 여유는 없었다.
오늘도 내일 쓸 학습지를 출력하고, 바닥을 쓸고, 책장을 정리했다. 화이트보드에 내일 날짜를 또박또박 적으며 사라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되새겼다.
창밖으로는 노을빛이 조용히 퍼져가고 있었고, 책상 위에 구겨진 작은 색종이 한 장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걸레질을 멈춘 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매일 이렇게 버티는 걸까...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한심해.’
감기가 자주 찾아와도 제대로 쉬지 못해,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아야 겨우 나았던 몸이었다. 수업 중에도 참느라 힘들었던 화장실, 그 탓에 심해진 변비는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놓쳐버린 연애와 꿈, 과연 나도 사랑 받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정아린, 정신 차리자... 후..... 정신 차려...’
가방을 어깨에 메고 터덜터덜 유치원을 나서는 발걸음마다,
눅눅한 흙냄새가 묻어났다. 그렇게 허기진 마음과 몸을 달래려 걷다 보니 은하수 라면 가게의 작고 따스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그날도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삼키던 작은 아이. ‘괜찮아’라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지만, 그 말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부모님의 싸움소리가 집안을 뒤흔들고, 혼자 남겨진 방 구석에서 스스로를 꼭 끌어안고 견뎠던 그 시간들...
‘왜 나만 이렇게 혼자인 걸까...’
그 작고 쓸쓸한 마음속엔 깊은 두려움과 외로움이 뿌리내려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와 내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온기 하나가 있었다. 그분 덕분에 아린은 배웠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말 없이도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스스로 약속했다. 받은 그 따뜻함을 아이들에게 전하리라는 다짐.
하지만 현실은 때로 너무 버거웠다.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었다. 오늘처럼 지친 날에는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그 말들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조용한 위로가 되어주길, 그녀는 그렇게 바라며 또 한 걸음 내디뎠다.
*
터덜터덜 걷던 그녀는 어느새 은하수 라면 가게 앞에 다다랐다. 작은 불빛이 비처럼 사뿐히 내리는 저녁이었다.
“휴...”
아린은 짧게 내쉬는 한숨과 함께 무거운 마음을 문틈 사이로 밀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조용히, 말없이 창가 구석 자리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창문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주인장은 조용히 카운터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는 밤하늘처럼 어둡고 깊었고,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듯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은 오랜 시간 비밀을 간직한 듯 고요하고 단단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주인장 윤하가 인사했다.
“원하시는 라면 있으신가요? 혼자 오셨어요?”
윤하는 따뜻한 물수건을 살며시 내밀며 말했다. 아린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하지만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대신, 손가락은 컵을 꽉 감싸 쥐었고, 눈은 자주 창밖으로 향했다.
그 손엔 작고 반짝이는 네임텍이 달린 가방이 놓여 있었다.
‘정아린, 무지개 유치원 선생님.’
윤하는 눈길을 가만히 맞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그 말에 아린은 조심스레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그제야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네... 아이들이 좋아요.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오늘은 많이 지쳐 보이네요.”
아린은 고개를 숙이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조금씩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은... 유난히 힘든 하루였어요. 아이들의 웃음 뒤에 숨어 있는 작은 눈물도 많이 봤고요. 가끔은,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윤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가만히 맞장구를 쳤다.
“그 마음, 알아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만큼, 마음이 자꾸 아파지기도 하죠.”
“그래서...”
아린은 다시 한 번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며, 작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누군가가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은하수 라면 가게의 공기 속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윤하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천천히 라면 한 그릇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그 말을 듣고 아린은 놀란 듯한 눈빛으로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따뜻함이 고요히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속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은 뒤, 아무 말 없이 건네주는 작은 위로처럼. 그녀는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들었다.
기름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국물 위로,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가 흩어지고, 그 위에 얹힌 연보랏빛 꽃잎은 잊고 있던 계절의 한 장면처럼 아련했다. 아린은 첫 국물 한 숟가락을 조심스레 떠서 입에 넣었다. 혀끝에 닿자마자, 뜨겁지 않게 데운 온도가 목으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짭조름한 듯 부드럽고, 간결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뒤따랐다. 그건 단순한 맛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끓인 듯한 국물 속에는 오랜 이야기들이 녹아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지금의 그녀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시울이, 천천히 젖어들었다.
‘이게…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한 끼는, 때로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제야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한 젓가락, 또 한 젓가락 천천히 입에 넣었다.
면은 입안에서 살살 풀어졌고,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오래된 슬픔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주인장 윤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따뜻하죠?”
그 말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눈빛은 분명히 말했다.
“네, 따뜻해요. 너무 따뜻해서... 조금 울고 싶어요.”
윤하는 조용히, 웃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누군가에게 그랬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어느 날, 말없이 건네받은 따뜻한 국 한 그릇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그날을.
라면 그릇 속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 김은 마치 오래된 편지가 하늘로 천천히 흩어지는 연기처럼, 말로 전하지 못했던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흐르고 있었다. 가게 안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어디선가 아주 작고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 한가운데서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말,
“괜찮아.”
그 말은 목소리 없이도 들려왔고, 아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그릇을 감싸쥔 손끝에 남은 따뜻함을 오래도록 느꼈다. 오늘, 그녀는 비로소 조금 가벼워졌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괜찮아’라는 말을 기다리던 작은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일 수 있었다.
“우리, 잘 버텼어.”
*
“선생님, 정말로 꿈이 있어요?”
작은 목소리였다. 마치 그 말이 허공에 닿기도 전에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듯. 하지만 그 아이의 눈빛은 분명했다. 작은 손에 쥐어진 연필처럼, 아직 서툴지만 단단했다. 그 질문에 순간, 나는 오래전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좁고 어두운 방.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부모님의 날 선 목소리. 담요 속에 웅크려 귀를 막고도, 온몸으로 들려오던 세상의 소음. 그 혼란 속에서도,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바람을 불렀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줬으면...’
‘한 번만이라도, 안아줬으면....’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위로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도록, 그 곁에 조용히 앉아 있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겠다고.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기 전에, 아이들의 마음을 가장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아이를 보면, 눈빛 하나로 알아채고 말하지 않아도, 그 곁에 가만히 앉아줄 수 있는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었던 어른이었다.
책상 위에, 오늘도 작은 그림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색연필로 그린 삐뚤빼뚤한 하트. 그 옆엔,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쓴 글씨.
“선생님, 사랑해요.”
나는 그 말 한 줄에, 다시 오늘을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누군가에겐 그저 장난처럼 쓰인 말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하루를 통째로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응, 나에겐 꿈이 있어.”
숨을 한 번 고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꺼낸 진심을 전했다.
“너처럼 마음이 여린 아이들이, 세상의 소란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도록 곁에 있어주는 어른이 되는 것... 그게.. 나의 꿈이란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작은 눈동자 안에, 소리 없이 피어나는 은하수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한 사람의 진심이 또 다른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오래전, 간절히 기다렸던 따뜻한 말과 손길이 지금은 내 손끝을 통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처럼 보였지만 그 속엔 어쩌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기적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
어릴 적,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고, 나는 그 무너진 틈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버텨야 했다.
부모님의 이혼은 천둥처럼 요란하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다른 세계로 밀어넣었다.
그 후부터, 나는 언제나 한 발짝씩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았다. 아이들의 웃음이 떠도는 교실, 복도 끝에 선생님이 남긴 “괜찮아”라는 말,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마치 내 슬픔은, 누구에게도 번역되지 않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 해도, 마음속에는 언제나 “괜찮지 않다”는 말이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 나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준 순간이 있었다.
학교 도서관 한구석, 낮은 책상 위로 쏟아지던 오후 햇살.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책 한 권을 건네주던 선생님. 그분은 내게 어떤 해답도 주지 않았다. 다만,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린아, 괜찮아... 그냥 여기 있어도 돼...”
그 말은 감히 내 슬픔을 고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슬픔이 있어도 괜찮다고, 그 마음 그대로 너는 너라고, 조용히 인정해주는 목소리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누군가의 ‘정답’이 아니라,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시선’이라는 것을. 나는 그 시선 하나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품지 못한 나의 어린 날을, 다른 아이들의 마음 안에서 다시 품어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고요한 밤에 작은 등불이 되어주고 싶었다.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괜찮아”는 사실, 내가 한때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평범한 말일지 몰라도 내게는 마음을 다시 세우는 기도 같은 말이었다. 아이들이 울음을 삼킬 때,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을 때, 나는 그 문 앞에 조용히 앉는다.
그 문을 억지로 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다. 그 문 너머의 상처가 나를 닮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 가끔 어떤 아이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왜 우리가 뭘 느끼는지 그렇게 잘 아세요?”
나는 그냥 웃는다. 대신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대답한다.
‘내가 너였으니까....’
그날 밤, 은하수 라면 가게의 창문 밖으로 별빛이 스며들었다. 유난히 조용하고 깊은 밤이었다.
창밖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 안에 아직 지워지지 않는 오래된 상처들, 그 상처들이 지금은 누군가의 밤하늘이 되어 조용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아린은 그 별 아래서, 조용히 다시 라면 국물을 한 입 떴다. 따뜻했고, 짭조름했고, 어딘가 아릿했다. 입안에서 퍼지는 그 맛은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마음의 언어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슬픔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오래전부터 흘러오던 기다림의 끝에서 비로소 나를 다독이는 위로의 눈물이었다.
*
여자는 조심스레 라면을 들었다. 국물의 따뜻한 숨결이 김이 되어 올라오고, 그 온기가 혀끝을 감싸는 그 순간 소녀의 눈앞이 천천히 흐려졌다. 그리고 마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바람도 빗소리도, 세상의 소란도 사라졌다.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고, 시간이 한 호흡 멈춘 뒤, 어느새, 아린은 드넓은 우주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곳은 현실의 법칙이 닿지 않는 세계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는 사라지고, 아무런 벽도 없는 공간 안에서 은하수가 회오리처럼 부드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바닥이 없었다. 하지만 걷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고, 또는 무중력 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공기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지만, 숨은 가볍고 부드럽게 쉬어졌다.
이곳은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바뀌는 세계. 누군가는 어린 시절의 놀이터를 만나고, 누군가는 잊었던 누군가와 재회하는 장소. 그리고 지금, 아린의 마음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작은 문 하나가 있었다. 고요하고 단단한 빛을 품은 문이었다.
그 앞에 한 존재가 서 있었다. 문지기였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별빛이 만든 형상 같았다. 얼굴은 점과 선이 반짝이며 이어진 별자리처럼 빛났고, 그의 눈동자는 두 개의 깊고 조용한 블랙홀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파괴가 아닌 따뜻한 끌림이 있었다. 문지기의 목소리는 하나의 음이 아니라,
여러 겹의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디 먼 은하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여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 속 진짜 열쇠를 보여주세요. 노크 세 번. 하지만... 세 번째 문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열리지 않아요. 다만, 준비는 당신의 몫입니다.”
문지기의 말은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아린은 그 말을 곱씹으며 문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일까? 진짜 열쇠라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지?
그녀가 망설이려는 찰나, 문지기는 조용히 한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작고 가벼운 종이 한 장. 그 위에 단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오십시오...’
손끝에 닿은 종이는 금세 빛처럼 사라졌지만, 그 말은 마음속 어딘가를 톡, 하고 건드렸다. 무엇을 잃었을까? 나는 무엇을 두고 왔을까? 아린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우주는 다시 부드럽게 회전했고, 빛과 어둠이 섞인 터널이 그녀 앞에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은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과거의 기억, 잊힌 마음, 그리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어린 자아의 세계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행세계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 여정은 멀고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될 단 하나의 문이었다.
*
바닥은 마치 부드러운 구름처럼 출렁였고, 그 위를 걷는 그녀의 발끝에서 잊고 있던 감정들이 물결처럼 번졌다. 하늘에는 끝없이 흘러가는 편지들이 떠다녔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머물다 미처 날아가지 못한 말들이 종이비행기가 되어 유영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엽서들은 바람에 휘날리며, 오래된 기억의 향기를 흩뿌렸다.
나무들은 모두 연한 종이 질감의 엽서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가지마다 누군가의 오래전 사연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작고 가느다란 발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기척이었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 그리고 분홍색 머리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 왜 이제 온 거야?”
그 짧은 한 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쿡 찔렀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소녀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았던 그 어린 날의 자신. 늘 외롭고, 늘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 시절의 ‘아린’.
“너... 어떻게.........”
목소리가 떨렸고,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언니, 너무 오랜만이야.. 나........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작은 아린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고, 외면했던 시간 속에서 늘 같은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작고 여린 그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숨죽인 오랜 시간들이 그녀의 품에서 터져 나왔다. 가슴속 어딘가에 단단히 잠겨 있던 문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너무 오래 혼자 두었어...”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단지 오늘 하루의 것이 아니었다. 지나간 수많은 밤들, 감추었던 외로움들, 말하지 못했던 상처들이 이제야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난 여전히 여기 있어. 너를 기다리면서도, 너를 잊은 적은 없었어.”
작은 아린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마치 오래된 창고 속에 숨겨져 있던 희미하지만 지워지지 않은 따스한 기억 같았다.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손끝이 저릿했고, 마음은 조용히 떨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엔 반쯤 찢어진 편지들 보내지 못한 말들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편지들은 사랑이라 말하지 못했던 마음,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치지 못했던 밤, 미안하다는 말을 끝내 삼켜야 했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녀가 조용히 손을 뻗어 하늘을 떠다니던 한 장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네가 열 살 되던 생일에 썼던 거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그냥 마음속에 묻어뒀던 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편지 속에는 한 줄이 쓰여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고 싶어...’
그녀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래, 네가 여기 있었구나. 이제는... 나도 너를 놓지 않을게...”
"안녕.. 나는 미래의 너야..너는 늘 혼자라고 느꼈지?
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기도 했고 모든 것이 너만 힘든 것 같아서, 조용히 울던 밤들이 있었지...
그런데 있지..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됐어..
사랑은 늘 눈에 보이지 않았고,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말이야, 그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도 결국 '너'였어... 그렇게 너는 조금씩 단단해졌고,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 괜찮아... 우리, 잘 컸어..."
편지 한 장이 누군가의 마음을 구할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덜 외로웠을까. 한 그릇의 라면이 그 마음 위에 띄우는 조용한 편지 한 장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건, 아주 따뜻한 기적일지도 모른다. 하늘 어딘가에서 작은 종소리 하나가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
그 순간,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도 익숙했다. 낡은 벽지의 갈라진 자국, 오래된 회색 카펫 위로 내려앉은 먼지, 차가운 공기가 숨을 막히게 할 만큼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그녀의 어린 시절이 머물던 작은방이었다. 어릴 적 아린이 매일 밤 숨어들던 그곳.
방 한가운데, 무릎을 꼭 끌어안은 작은 소녀 하나.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아홉 살의 아린이었다. 말 한 마디 없는 그 아이는, 작고 가녀린 어깨를 들썩이며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는 부모님의 고성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쉴 새 없이 오갔다.
“...너만 없었으면 이런 지옥도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야! 그냥 나가버려, 제발!!”
“웃기지 마! 내가 왜 이런 집구석에서, 이런 인생을... 아인이만 없었으면...”
깨어지는 그릇 소리. 던져지는 책. 벽에 부딪히는 말들... 그 모든 소리가, 아린의 가슴에 하나씩 박혔다.
어린 아린은 그저 입술을 꽉 깨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해줘요... 제발... 엄마... 아빠...”
말하고 싶었다.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안에 가득 찬 공포는 어떤 단어도 허락하지 않았다.
눈물은 이미 멈췄고, 귀 속은 먹먹했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대신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만이 귓속에서 커졌다. 그건 외부의 소음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밀려오는 무언의 폭풍이었다.
‘그냥... 내가 사라지면 되는 걸까?’
‘내가 태어나지만 않았더라면...’
그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던 질문.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던 물음표.
그날 이후, 아린은 천천히 투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말을 아끼고, 발자국을 작게 내딛고, 눈치로 어른들의 감정을 읽으며, 자신을 그저 ‘배경’처럼 조용히 숨겼다. 어른들의 전쟁터에서, 아이는 언제나 방관자였다. 상처받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확신은 아린이라는 존재 전체를 옥죄는 그늘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시간 위에 서 있는 아린은 작은 자신을 마주한 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무릎 꿇은 채 천천히 다가가, 웅크린 소녀를 조심스레 안았다. 말없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아이에게, 이제야 처음으로 속삭일 수 있었다.
“미안해... 네가 겪은 그 모든 것, 내가 다 보고 있어... 지금은 늦었지만, 너를 외면해서 정말 미안해... 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어... 단 하나도...”
작은 아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따뜻한 품 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오래된 고요 속에 첫 바람이 스치는 순간처럼, 어둠 속에서도 틔워지는 한 줄기 생명의 기척이었다. 그리고 문득, 하늘에서 천천히 편지 한 장이 떨어졌다. 빛바랜 종이 위에 조용히 쓰인 글자가 적혀있었다.
“잊지 마세요. 그 아이는 지금도 당신 안에 살고 있습니다.”
아린은 편지를 조심스레 가슴에 안았다. 그 안에,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상처가 고요히 머물렀다.
*
그 장면은 마치 뭉개진 구름처럼 천천히 흩어졌다. 눈앞의 풍경이 다시 부드럽게 번지며 바뀌었다. 종이비행기들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 따뜻하고 몽환적인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구름으로 만든 바닥은 햇살에 스며들 듯 부드럽게 빛났고, 하늘은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듯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아홉 살의 아린. 그녀의 가장 깊고도 외로웠던 시간.
“... 너는... 그렇게까지 혼자였던 거구나...”
어른이 된 아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은 작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긴 시간을 돌아나온 문장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 망설이듯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 손은 작고, 따뜻하고, 떨림이 느껴질 만큼 여렸다. 그러나 그 안엔 살아남은 아이만이 지닌 단단함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넌 여기까지 잘 왔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들이 그제야 조용히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어린 아린은 해맑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맑은 유리병.. 그 안에는 은은한 보랏빛의 구슬이 담겨 있었다. 마치 어린 날의 꿈이 고요히 굴절되어 반짝이는 것처럼, 그 작은 빛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 같았다.
“이건 어릴 때 내가 몰래 숨겨뒀던 거야.. 행복해지고 싶어서... 근데, 이제 너한테 줄게...”
그녀는 숨을 멈춘 듯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건 누구도 몰랐던, 어린 내가 간직했던 아주 작고 투명한 희망이었다. 한때는 너무 작아 보여 잊어버렸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소중한 생의 일부였다.
그녀는 유리병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 안에 담긴 건 단순한 구슬이 아니라, 마침내 자신이 마주한 잊고 살았던 사랑, 잃어버린 감정,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삶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때, 어린 소녀 아린은 마지막으로 웃었다. 그 미소엔 어떤 말보다 깊은 용서와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나 이제 괜찮아... 그리고... 너도 괜찮을 거야...”
소녀는 살며시 종이비행기 하나에 올라탔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를 감싸듯 들어올렸고, 그녀는 하늘 위로 천천히, 가볍게 떠올랐다. 아른아른 날아가는 작은 몸짓.
흩날리는 종이비행기들과 함께 소녀는 파란 하늘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아린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엔 처음으로, 작은 평화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
은하수 라면 가게의 한편, 조리대 앞.
주인장은 가만히 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들여다본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병. 그 안엔 아린이 어린 자아에게서 건네받은 구슬과 꼭 닮은 것이 들어 있다. 하지만 색은 달랐다. 저번의 보랏빛과는 다른, 더 깊고 무거운 색. 마치 빛이 스미기 전의 우주처럼, 짙고 고요한 검은빛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마음이었고, 잊힌 편지였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
잠시,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어둠이 흐른다. 밤하늘도 감히 담지 못할 깊고 먼 기억의 어둠. 그러나 이내 그 안에서 반짝이는 미세한 빛들이 피어난다. 마치 은하수가 잊힌 어둠을 가르며 다시 흐르듯.
'나는 잊힌 아이였고, 버려진 존재였고… 그래서 지금, 나는 이곳에서 누군가의 편지를 대신 띄우는 일을 한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난다. 마치 오래된 별의 숨결처럼, 사르르 흘러나오는 은빛 가루. 그것이 조용히 공기 속에 섞여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마룻바닥 위로 별가루가 살포시 흩날리고, 이내 바람이 일 듯 사라져간다. 말없이 스쳐가는 별의 언어처럼.
그 순간, 가게 안에는 짧은 침묵이 머문다. 마치 모두가 잊고 있었던 시간을 잠시 멈춘 듯, 천천히 되감을 듯... 그녀는 다시 유리병을 조심스레 닫으며, 마음속으로 그 작은 구슬에게 말을 건넨다.
'너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나처럼, 이렇게 떠도는 편지로 남을까?'
그러고는 미소 짓는다. 아주 옅은, 그러나 어딘가 아린 미소였다. 바깥 창 너머, 하늘에는 벌써 별이 하나 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잊힌 이들의 마음이 작은 불빛이 되어, 또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시간. 은하수 라면 가게는 그 별빛 속에서 오늘도 조용히 존재하고 있었다.
*
아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가슴 한켠에 아직도 잔잔히 남아 있는 무언가를 느끼며. 두 손은 자신도 모르게 국그릇을 감싸고 있었다. 따뜻한 라면 국물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을 데우고 있었다. 마치 현실이지만, 아직 꿈의 경계선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국물 안엔, 자그맣게 풀어져 흩어진 종이 조각 하나가 떠 있었다. 희미하게 번진 글씨.
“너는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아린은 조용히 그 글자를 따라 읽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을 울렸다.
오래도록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위로였다.
그 문장은 마치 그녀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방에, 아주 작지만 따뜻한 불빛 하나를 켜준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은 가볍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에 놓여 있던 오래된 짐이 조금 내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뒤돌아서, 천천히 작은 종이 조각을 꺼내어 조리대 옆에 남겼다.그것은 짧지만 진심 어린 편지 한 장.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 이제 괜찮아요... 덕분에...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은하수 라면 가게 주인장님께...’
그녀가 문을 열고 나서자, 조용히 종풍경이 울렸다. 맑고 투명한 소리.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한마디가 바람에 실려 퍼지는 듯한 소리였다.
가게 안, 주인장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글자를 하나씩 더듬으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낮게 속삭였다.
“그렇지... 다들 그렇게... 자기만의 편지를 찾아가는 거지..”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 조리대 옆 작은 나무 상자 안에 편지를 넣었다. 그 상자 안엔 이미 수많은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지나간 계절, 흘러간 눈물, 말하지 못한 고백들이 모여 하나의 시간처럼 숨 쉬고 있었다.
‘보내지 못한 편지들...’
그녀는 그 편지들의 조용한 수호자였다.
그날 밤 가게 밖 하늘엔 별이 조금 더 반짝이고 있었다. 아린의 마음속에도, 아주 작지만 단단한 편지 한 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편지는 다 읽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구에게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것은 이제 그녀 안에서, 스스로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그날 밤, 가게 안은 조용했다. 문지기는 윤하의 어깨에 살며시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은... 참 단단했네요. 부서진 조각을 모아 다시 꽃을 피운 사람 같아요.”
윤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라면 그릇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응, 그릇이 깨져도, 따뜻한 마음이 담기면 다시 그릇이 되는 법이지.”
문지기는 미소를 띠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별빛이 남긴 사람이지요.”
그 말에 윤하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은하수가 떠오르기 전, 마치 새로운 빛을 품기 위해 모든 걸 품어 안는 듯한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오늘의 이야기가 또 하나 별처럼 반짝이며 은은히 빛났다.
서로 다른 상처와 고통을 안고도, 끝내 다시 일어나 따스함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잔잔히 품어주는, 이 작은 라면 가게의 밤은 그렇게 또 한걸음 더 깊어갔다.
때로는 가장 깊은 상처가
가장 따스한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춥니다.
그 빛을 품고 천천히 다시 걸어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요.
부서진 마음도 조심스레 다시 맞출 수 있습니다.
그 조각들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함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하니까요.
어둠 속에서도 잊지 말아요.
진짜 빛은 이미 우리 안에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오늘의 한 그릇, 그리고 한마디의 위로가
누군가의 마음에 별처럼 오래도록 빛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