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라면 가게
By. 김안예
제2장 - 진실을 삼킨 여자
“진실은 종종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어떤 진실은 한 그릇의 라면 속에서조차 말없이 울고 있다.”
늦은 오후, 그날은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오래된 기억처럼 집요하게 가게의 표면을 두드렸다. 낡은 우산 끝에서 투둑, 투둑...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고요한 파문을 남기고 있었다. 흐린 회색빛 하늘 아래로 작고 낡은 골목길이 이어졌고, 그 끝에서 문득 문 하나가 조용히 열렸다. 은하수 라면 가게는 오늘도 조용히 불을 밝혔다. 가게 한쪽 벽에 걸린 종풍경이 빗방울과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빗소리와 함께 섞여서 은근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빗소리에 녹아든 그 소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기다리던 질문 같았다. 그리고 침묵의 무게를 조금씩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골목 끝, 한 여인이 나타났다.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골목 끝 은하수 라면 가게 낡은 우산을 들고 천천히 문턱을 넘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고, 고요했지만 무거웠다. 코트 자락엔 빗물이 촘촘히 스며들어 번져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어딘가로 숨어있었다. 눈빛은 지독한 침묵으로 젖어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으며,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말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유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은 변호사였다.
법과 정의, 그 단어를 믿으며 살아왔던 사람, 오직 진실만을 좇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게 안으로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손끝으로 컵에 맺힌 빗물을 닦으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 숨결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삼키는 듯 무거웠다. 오늘 그녀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자, 주인장은 조용히 일어났다. 말없이 라면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올리고, 국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라면을 끓이는 동안에도 가게 안에는 온통 빗소리와 따뜻한 나무 향, 그리고 종 풍경 소리들로 가득했다.
따뜻하고 조용한 그 기운 속에서, 유진은 손끝으로 컵에 맺힌 물방울을 천천히 닦아냈다. 무심한 동작이었지만, 마치 마음속 어지러운 문장들을 지우고 정리하듯 조심스러웠다. 그 단순한 동작마저도 마치 뭔가를 정리하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한숨이 깊게 내려앉았다.
“오늘의 라면은... 검은깨 된장 라면입니다.”
주인의 목소리는 바람보다 부드럽고 깊었다. 말보다 기류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
그녀가 가게에 들어오기 전, 그날 아침에도 유진은 사무실에서 한없이 무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은 무수한 이름 없는 절망들을 품고 있었고, 그녀의 눈앞에 놓인 사건은 다시 한번 그녀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법은 모두를 지켜야 해... 그런데 왜 누군가는 늘 침묵 속에 숨겨져야 하지?’
그녀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현실은 차디찼고, 정의는 종종 가장 조용한 사람을 지나쳤다. 그녀는 때때로 무기력함에 눈물을 삼키고, 때때로 법정에서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 고요는, 무시였다. 그리고 그 무게는 그녀의 가슴을 천천히, 아주 깊게 짓눌렀다.
그런 날, 그녀는 어쩌다 이 가게 문을 두드렸다. 침묵과 싸워 지친 영혼이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공간으로...
*
유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말 대신, 그 라면을 받아들이겠다는 조용한 수락이었다. 따뜻한 국물이 끓는 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진한 된장 국물이 천천히 끓고 있었다. 무채색의 날씨처럼 묵직하고 깊은 향이 국물에서 피어올랐다. 진한 된장 국물 위로 얇게 채 썬 무와 초록색 들깻잎, 붉은 고추장이 조심스럽게 올려졌다. 그리고 그 위엔 실처럼 얇은 붉은 고춧가루가 마치 상처의 자국처럼 실고추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 위엔 검은깨 한 줌이 마지막 의식처럼 뿌려졌다. 그 묵직한 향이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했다.
그건 단지 한 그릇의 음식이 아니라, 오늘 그녀에게 꼭 필요했던 한 조각의 기억이었다.
유진은 숟가락으로 검은깨 된장 라면 국물 한 모금을 마셨다. 입을 대자, 묵직한 향과 함께 쓴맛이 혀를 덮는 듯했다. 묵직하고 깊은 국물 맛이었다. 삶의 쓴맛이 담긴 그런 맛이었다. 고요히 끓어오른 국물 속엔 진실의 씁쓸함, 말하지 못했던 분노, 그리고 무너진 신념이 뒤섞여 있었다. 젓가락을 들었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이 잠시 파르르 하고 떨렸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그날의 무게를 누그러뜨리듯 천천히....
“...... 내가... 변호했던 사람은, 무죄였어요..... 나는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다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떨어진 빗방울이 테이블 위에 조용히 떨어졌다. 그녀의 손이 컵 가장자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끝까지 이기지 못했죠. 누군가가...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어요. 진실은... 서류 아래에 묻혀버렸고... 나는 그걸... 막지 못했어요.”
잠시, 그녀는 말을 멈췄다.
“그날 이후, 나 자신에게 침묵을 선고했어요.”
*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작게 끓어오르던 국물의 불을 줄였다. 그녀의 앞에 라면 한 그릇이 완성되어 놓였다. 그 위엔 말없이 덮인 진실의 무게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진실은 때로... 입술보다 깊은 곳에서 무너져요,”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이 국물처럼... 천천히 우러난 것들은, 언젠가는 그 향으로 사람을 되돌려 놓아요.”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빛이 윤하를 향했다. 조용했지만 분명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면을 한 줄 떠올렸다.
‘말하지 못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릇 속 어딘가에서, 온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라면의 김 속에서, 그 진실은 아주 천천히,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
유진은 두 손으로 그릇을 감싸듯 붙잡고 있었다. 그 작은 손안에 담긴 떨림이, 마치 그릇의 김처럼 은근하게 퍼지고 있었다.
“스물여덟이었어요...”
그녀가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섬세했지만, 그 속에는 무너진 기억의 조각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변호사로서... 제 인생 첫 사건이었죠. 첫 사건을 맡게 되었답니다. 저는 로스쿨 3년, 변호사시험 2번 끝에 간신히 이 자리에 서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했죠. 간신히 합격한 시험, 겨우겨우 붙잡은 자격증이었어요. 그래서 더 간절했고, 더 진심이었어요. 그리고 제게 주어진 첫 사건은....”
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 마치 가슴 안에 고여 있던 문장을 꺼내려 애쓰는 듯했다.
“.....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이름처럼 느껴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너무나 끔찍해요.. '어린 피해자의 성폭력 사건'이었어요....”
가게 안 공기가 순간적으로 정지한 듯 느껴졌다. 가스레인지의 작은 불꽃, 국물의 잔잔한 끓음, 바깥의 빗소리... 모든 것이 유진의 침묵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 사건은, 제가 법전에서 배운 그 어떤 정의, 조항보다도 훨씬..... 더 잔인하고.... 아주 많이 복잡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그 안엔 오래 묵은 시간이 곪아서 고통으로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고통과 고민이 스며들어있었다. 주인은 말없이 국자로 국물을 한 번 휘저으며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 소리조차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저는 정의를 믿었어요.... 아니.... 믿고 싶었죠..... 피해자를 돕는 것, 그게 이 직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하지만.....”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잠시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며 덧붙였다.
“그 사건은... 어린 여자아이가 피해자였고, 그녀의 성폭행 사건이었어요. 그 아이는 겨우 열 살이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모르는 나이였죠. 전 모든 걸 걸고 그 아이의 편에 섰죠. 그리고 법정에서... 저는 그 아이를 대신해 진실을 말해야 했어요.”
잠시 말을 멈춘 유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입 안을 채우는 동안, 차가운 현실이 조금씩은 녹아내리는 듯 식은 속을 데우는 듯했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흐릿하지만 찬란하게 조용한 불빛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진실은 항상 늘... 정의와 함께하지는 않더군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칼처럼 정확하게 가게 안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은 침묵했어요... 피해자도 가해자도 그리고 사회도..... 심지어 법정조차도 그들은 모두 눈을 감았고, 귀를 닫아버렸죠.. 결국, 저는 혼자였어요....”
유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그녀는 짧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눈물이 바닥에 닿기 직전의 마지막 떨림처럼, 안타까운 것이었다.
“법정에선 오히려 내가 피고인이 된 기분이었어요. ‘왜 그걸 증언했냐’, ‘당신이 뭘 아느냐’,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무표정했죠. 저를 노려봤어요. 그 진실을 말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었어요.. 말할수록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고, 나는 점점 지쳐갔죠.... 난 그냥 그 아이를 위해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 진실은, 너무 외로웠어요...”
그녀는 그릇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컵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공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유진은 국물 속에 담긴 뜨거움에 의지해서 몸을 조금씩 풀었다. 그녀의 진심이 국물에 스며들어 라면 그릇 안에 조용하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라면 위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이 잠시 그녀의 시야를 흐렸다.
“결국, 1심은 무죄. 증거 불충분, 증언 신빙성 결여였어요. 그 말이 내 모든 노력을 덮어버렸어요. 난 단지 진실을 지키려 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날 욕하고, 조롱했죠. 나는... 점점 말이 사라졌어요.”
그녀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면을 들지 않고, 라면 위에 뿌려진 검은깨를 천천히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그 아이가 법정에서 내 손을 꼭 잡고 말했어요. ‘저를 믿어줘서 고마워요’라고... 그런데... 나는 결국, 그 아이에게도... 지켜주지 못한 어른이 되어버린 거죠...”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라면 국물 위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눈물인지, 빗방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 오래된 죄책감의 파편이었다.
주인은 그때서야 조용히 다가와, 그녀 앞에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그 물은 아무 향도, 맛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때로는...”
주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지 못한 진실이, 누군가의 마음을 가장 오래 붙들고 있죠.”
유진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마도 그날부터였던 것 같아요. 제 안에서 뭔가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건. 나는 변호사였지만, 그날 이후... 점점 말이 사라졌어요. 마치 말하는 것 자체가, 또다시 누군가를 다치게 할까 봐.”
그녀는 조용히 라면을 한 젓가락 떠 입 안에 넣었다.
국물의 깊은 맛이 입안에 퍼지자, 아주 잠시,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라면은요... 참 다정하네요. 어떤 말보다도, 다정해요.”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종 풍경은 아주 잔잔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도, 유진의 말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
“가해자는...”
유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동네에서 존경받던 사람이었어요. 아파트 단지 주민회장이었고, 매주 어르신들께 과일을 나눠주고, 아이들에게 웃으며 사탕을 건네던 그런 사람...”
그녀는 컵을 천천히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물의 표면에는 작은 진동이 파문처럼 번졌다.
“사람들은 그를 ‘좋은 이웃’이라 불렀죠. 그를 모범 시민이라 했고, 심지어 ‘따뜻한 사람’이라고도 했어요. 그런데...”
말끝을 잇지 못한 그녀는, 한동안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억누르며, 그녀는 문득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날의 기억이 비처럼 내려오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는... 그 사람의 집에 놀러 갔다가... 장롱 안에서 발견됐어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을 땐, 이미 눈빛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옷도... 속옷도... 모두 벗겨진 채로요...”
순간, 가게 안의 공기가 정지했다. 바깥 창문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멀게 들렸다.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국자를 들고 조용히 국물을 저었다. 그 작은 물결의 소용돌이가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것이었다.
“법정은...”
유진은 다시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도 차가웠어요. 서류, 진술서, 영상, 증인... 그 아이의 삶은 하나의 ‘증거’가 되어 표로 정리되었고, 재판은 마치... 게임처럼 느껴졌죠. 변호인과 검사 사이의 승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웃음이 아니었다.
“한국 법정에선 13세 미만 아동 강간죄에 대해 최소 5년형 이상이 규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현실에선... 그 절반도 채 되지 않는 형량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집행유예, 대부분 ‘불확실한 기억’이라는 이유로..... 참.....”
그녀는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국물 위에 김이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유명한 사건들 있잖아요. n번방처럼 사람들의 분노를 샀던 것들... 그건 극단적인 경우였고, 사회가 분노해야만 그제야 법이 움직이죠. 그 외 대부분은... 조용히 덮여요... 아예 뉴스에도 나오지 않아요....”
그녀는 컵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컵 손잡이에서 미세하게 떠났다.
“가해자의 변호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린 피해자는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부모가 무의식 중 불안을 주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피해 아동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눈썹 사이가 깊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제 심장은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숨이 막히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조용한 침묵... 윤하는 국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국물 소리를 더 조심스레 다듬었다. 그 또한 그녀의 상처를 따라 걷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저는 물러설 수 없었어요.”
유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 아이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었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누군가는, 끝까지 그 아이 편에 있어야 했거든요.”
그녀는 시선을 윤하에게 옮겼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의 목소리가 되기로 했어요.”..
잠시 후, 라면 그릇 안에 다시 조용한 소리가 일었다.
윤하가 작은 그릇에 김치를 담아 내밀었다.
그 조용한 행동 하나가, 말보다 더 다정하게 그녀의 말을 감쌌다.
“목소리는...”
윤하가 조용히 말했다.
“때로는 말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거예요.”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 온기가, 허물어진 심장의 틈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
“피해 아동의 기억은 결코 왜곡된 적 없습니다. 왜곡되어 온 것은 오히려, 이 사회의 시선입니다.”
법정 안,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단정한 문장들이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심장을 찔렀다.
“아이의 증언은 사건 직후, 의료진과 상담사 앞에서 일관되게 이어졌습니다. 그녀는 그날 있었던 일을, 거짓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순간, 방청석에서 숨소리가 멎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그날의 증거는 명백합니다. 아이의 몸에 남은 상처들, DNA, 그리고 방 안에서 발견된 물품들까지... 이 아이는 단 한 번도 세상을 속인 적 없습니다. 거짓은, 그 방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 방을 외면한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눈빛은 떨렸지만, 말은 선명하게 날을 세웠다.
“이 법정은...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아이는, 세상에 진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요?”
그 순간, 법정은 정적에 잠겼다. 방청석의 눈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피고인은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마른 입술이 떨렸다.
“... 어... 억... 억울합니다. 전, 그런 적... 없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린 채,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폭력은, 진실 앞에서의 침묵이다.’
며칠 후, 2차 공판.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합니다.”
“......”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그건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다. 피곤하고, 슬프고, 깊게 절망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5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숫자가 허공에 맴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는데... 세상은 겨우 5년으로 그 값을 대신하라 하네요....”
조용히 법정을 나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 무게는 오직 그녀만이 알았다.
*
그날 이후...
그녀는 말을 잇기 전, 한동안 숟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작은 동그라미로 국물의 표면을 휘젓던 손끝에서, 말보다 먼저 떨림이 전해졌다.
“그날 이후... 난 여전히 변호사로 살아가지만, 사람들을 변호하는 게... 두려워졌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국물 위로 퍼지는 김처럼, 아릿하고 흐릿하게 번졌다.
“진실을 말하는 게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자기 확신만을 원하죠.”
순간, 수증기가 그녀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 그리고 다시금 낮고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침묵을 선택했어요. 말하는 건 늘 나만을 상처 입히니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국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뜨거운 온기가 목을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마치 오랫동안 차갑게 굳어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이 한 그릇 안에서 사르르 풀어지는 것처럼..
그녀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말없이 두 눈을 감은 그녀의 속눈썹 위로, 어느새 맺힌 물방울 하나가 조용히 흘러내렸다.
*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 그릇 가장자리가 마치 먼바다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종 풍경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공간은 갑자기 숨을 들이쉰 듯 고요해졌고, 그녀의 눈꺼풀은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스르륵 감겼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라면 가게 안에 있지 않았다.
눈앞엔 푸르고도 낯선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찔하도록 푸르면서 낯선, 정지된 푸름이었다. 아래에는 거꾸로 뒤집힌 도시가 매달린 채 하늘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검은 거울 속에 비친 듯 일그러진 풍경의 세상처럼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고, 공기조차 무거웠다. 도시는 사람의 소리가 울부짖음처럼 공기 중에 흩어지고, 땅은 어둠의 심연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낡은 법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법전의 표지는 이미 너덜너덜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 사건의 가해자. 법정에 섰던, 끝끝내 죄를 부정하며 비웃던 그 남자였다.
하지만 이곳의 그는 달랐다. 낡은 쇠사슬이 그의 몸을 감아 온몸을 조이고 있었고,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있었다. 어깨에는 ‘거짓’이라는 이름의 돌덩이가, 발목에는 ‘침묵’이라는 족쇄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말을 잃은 채, 끝없이 이어진 끝이없는 사막을 계속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 그곳을 맴돌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조용하고 고요한 사막 한가운데에 ‘끽끼기긱’ 사슬이 끌리는 쇳소리가 낮게 흘렀다. 그의 입술은 터지고 갈라졌으며,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는 중얼거렸다.
".... 난... 잘못한 게 없어... 난... 나.. 그런 거 안 했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퍼져나가기만 했다. 아무 데도 닿지 않는 소리였다. 이곳의 시간은 지구와 달랐다. 하루는 천 년 같았고, 고백 없는 침묵은 더 큰 형벌이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는 가해자에게 묻듯 말했다.
“여기서도, 여전히 부정해?”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입술은 달싹이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의 입은 투명한 봉인으로 막혀 있었고, 대신 그의 이마 위엔 '진실을 말하지 않은 자'라는 문장이 빛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가장 큰 폭력은 진실 앞에서의 침묵이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돌아보니, 은하수 라면 가게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게 보였다. 이곳에서 주인장의 모습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끝없는 별들이 담겨 있었고, 손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끝없이 회전하는 작은 은하계가 담겨 있었고, 그 중심엔 아주 작은 종이학 하나가 떠 있었다.
“이 병은 당신의 기억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선택이기도 하죠.”
주인은 그녀에게 병을 건네며 말했다. 그녀는 묵묵히 받아 들었다.
“여기선 물을 수 있어요. 그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거죠.. 아니면... 그냥 두고 갈 수도 있고요.”
그녀는 한참을 그 병을 바라보았다. 유리병 속 우주가 빛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구에서 정의를 믿었어요. 하지만 그건 늘 침묵 속에서 부서졌죠.”
병 속 은하는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어릴 적 피해자였던 그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여전히 어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이곳에서 웃고 있었다.
그 어둠 너머, 별빛이 비치는 숲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평화롭게 그 소녀는 또 다른 행성의 별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여기선... 괜찮은 거구나... 정말 다행이야.. 행복하게 웃으면서 잘 살아가고 있어서... 정말.. 정말 너무나 다행이야...”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곳은... 세상의 질서가 조금 다르죠. 누구에게는 벌이 되고, 누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는... 선택이죠.”
그녀는 다시 가해자를 바라봤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두렵지도, 증오스럽지도 않았다. 단지, 참담하고 공허한 존재일 뿐이었으며, 그는 단지, 자신의 거짓과 침묵에 스스로 갇힌 불쌍한 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내 시간을 주지 않기로 했어....”
그 순간, 그녀의 손에 쥐고 있던 병이 서서히 따뜻하게 빛으로 물들어졌다. 그 빛은 조용히 그녀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가 서있는 또 다른 세상이 천천히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다시, 종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맑고도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눈을 떴다. 라면 가게였다. 여전히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라면이 있었고, 주인은 말없이 조용히 가게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오고 있었다. 주인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유리병 하나였다. 주인장은 그녀에게 유리병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작은 은빛 종이학이 천천히 회전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딘가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건.... 무엇인가요?”
유진은 조심스럽게 주인장에게 물어보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떨림은 ‘두려움’보다는 ‘깨어남’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인장은 조용하고 잔잔하게 대답했다.
“기억의 서약입니다.”
주인의 음성은 무겁게 들렸다. 그 말은 마치 유리병 속 은빛처럼 무겁고 반짝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열 수 있어요.”
“언제든지 다시 열 수 있다고요...?”
유진은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천천히 받아 들며 다시 물었다. 병 안에는 은빛 종이학이 바람도 없는데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반짝이는 빛들도 함께 맴돌고 있었다.
“그건... 말하지 못했던 진실, 말하고도 지워졌던 진심, 혹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에요..”
주인장은 조금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여기 다녀간 사람들은 말하지 못한 진실을 이 안에 담아두고 갑니다. 시간이 흘러 지나가도, 이 안에 있는 진심은 사라지지 않아요. 묻혀 있어도 결국... 언젠가는 길을 찾아 나오게 되니까요.. ”
“.... 길을... 찾아요?”
“네.. 잊히지 않는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피어납니다.”
유진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병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은빛은 마치 그녀의 심장 안에 어딘가를 부드럽게 흔들고 있었다.
잠시뒤, 그녀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번에는 급하지 않았다. 한 올, 한 올, 면을 집어 올리고, 국물을 살며시 떠올렸다. 천천히, 그리고 더 깊게 음미했다. 라면 국물을 천천히 떠먹기도 했다. 라면의 맛은 묘하게 ‘위로’ 같았다. 검은깨 된장라면.. 짭짤한 된장의 구수함이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은근한 불맛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두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섞여서 더욱더 짠맛이 느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쓴 것도, 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짠맛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도록 마음을 조이고 있던 무언가가 어떤 무게들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녹아내리는 맛이었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이번엔 씁쓸한 웃음이 아니었다. 조금은 비워낸 사람의 미소였다.
그 순간, 가게 안 공기는 전보다 따뜻해져 있었다. 주인은 조용히 말했다.
“이제, 당신은... 돌아갈 수 있어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병은 품에 꼭 안은 채였다.
*
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 어깨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주인장은 그녀가 일어서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목소리는 따뜻하면서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낮게 울렸다.
“진실은 당신 편입니다. 그리고 침묵의 무게를 견뎌낸 이에게... 세상은 반드시 언젠가, 위로로 응답할 거예요..”
유진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직전,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고마워요....... 오늘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내 마음 깊은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주 조금.... 진짜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바깥 어딘가에서 아주 작고 희미한 속삭임이, 마치 바람처럼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오늘.. 드디어 한 모금의 말이 국물 속에서 피어났어요..”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말없이 따뜻한 공기와 식어가던 라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주인은 카운터 뒤로 돌아가 조용히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노트 한 귀퉁이에 천천히 펜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진실을 삼킨 여자 – 침묵의 무게를 견디고, 한 모금의 진심을 꺼내다.]
수첩을 덮자, 은하수 라면 가게의 창가에 걸린 작은 종 풍경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길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듯했으며, 은은하게 오랫동안 울렸다. 마치 또 다른 고통과 사연이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처럼...
은하수 라면 가게의 문 너머에서...
그리고 먼 은하 어딘가, 그 어둠의 사막에서 쇠사슬을 끄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그녀의 자리는 비었지만, 그곳엔 아직 뜨거운 진심 한 그릇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진실이 항상 정의롭진 않더라고요.
때로는 그 진실 하나가 사람을 무너뜨리죠.
그래서 전 선택했어요.
차라리 침묵을 차라리 잊힘을..
그런데... 이 라면 국물 속에서
자꾸 과거가 살아나요.
따뜻해서 괴롭고 익숙해서 잊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