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BTI검사에서 J가 6% 나오는 P다.
(즉, 94%가 P라는 소리, 계획의 ㄱ도 관심 없다는 소리)
하지만 ISTJ그잡채씨에게 22년 동안 귀에서 피나게 잔소리를 듣고, 회사생활 10년을 넘게 하다 보니 그래도 J가 나름 36% 정도는 생겼다고 자부했다. 이제는 어딘가를 찾아갈 때 공휴일, 브레이크타임 확인은 기본이고, 진짜 영업을 하는지 전화까지 해본다. 여행 갈 때 가기 전 챙겨야 하는 것들을 메모도 하고, 여행지에서 가고 싶은 곳들을 구글에 저장하고 거리까지 계산한다는 이 말씀이올시다~~ 이 정도면 엄청난 발전 아닌가.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고 긴장을 놓고 살자 슬슬 나의 P성향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면서 어제는 정~~ 말 오랜만에 양미리다운 대환장파티를 열었다.
남동생이 취미로 부동산 공부를 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경매를 시작했나 보다.
서울에 살다 보니 지방에 있는 물건은 내려올 수가 없어서 아까운 기회를 몇 번 놓쳤다더니 백수가 되어 놀고 있는 나에게 용돈을 줄 테니 경매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새로운 지역에 여행 삼아 가볼 수도 있고, 용돈도 벌고 무조건 콜이지~ 하며 동생의 호출에 경매를 하러 가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경매를 하기 전 입찰보증금을 현금으로 내야 해서 동생이 4천만 원을 내 통장으로 보내면 그걸 수표 1장짜리로 바꿔서 경매장에서 서류들과 함께 제출해야 한다고 한다.
미리 : 어? 4천만 원? 4천만 원을 내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라는 말이야?
동생 : 경매장에 오는 사람들 다 현금으로 들고 와.
더 큰돈도 들고 다녀
미리 : 뭐라고? 그럼 그 경매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현금을 몇 천만 원씩 들고 있다면
도둑들의 표적이 되는 곳 아니야?
그중에서 내가 제일 어리벙벙하게 생겼을
텐데 내가 표적이 돼서 나를 납치해 가면
어떡해. 은행에서 그 돈을 빼서 차로 이동했
다가 법원까지 가라고? 그 사이에 나쁜
사람들이 내 차를 쫓아오면 어떡해. 나는
무서워서 못 해. 절대 못 해.
동생 : 영화 찍냐?
미리 : 안돼 돼 안돼. 그리고 내 통장에 4천만 원이
들어갈까? 한 번도 안 넣어봤는데
동생 : 통장이 종이박스냐? 누나 또라이야?
결국 해내야 한다면 4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소매치기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한 방법을 밤새 고민한 끝에 겨울 패딩 안에 후드를 입고 그 안에 복대를 차서 보관하기로 했다. ‘오케이. 똑똑했어.'
당일 아침 경매는 11시에 시작하지만 그래도 혹시 내 통장에 4천만 원이 안 들어가거나 한 번에 못 뽑을 경우를 대비해서 9시 30분에 경매법원 근처 은행에 도착했다. 이렇게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을 미리미리 대비하여 새벽부터 준비하는 나의 J스러움에 감탄하며 도착한 은행은.... ……….셔터가 굳게 닫혀 있었다.
‘엥? 9시 30분인데? 오늘 목요일 맞는데? 왜?? 오늘 영업을 안 하는 거야? ’
셔터 앞에 하얀 안내문이 있어서 읽어보니 ‘수능일로 인해 10시 오픈’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 뭔가 조짐이 심상치 않은데 싶었지만 입찰은 11시 10분까지니 시간은 아직 한참 여유가 있었다. 커피도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9시 50분쯤 어디선가 할머니들이 1명, 2명 점점 늘어나더니 7명의 할머니들이 셔터 앞에 서 계셨고, 분명히 내가 제일 먼저 왔는데 ‘내가 1번이니까 제 뒤로 줄을 서세요.’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생겼다. 내가 할머니들 사이에서 당황하고 있는 사이 셔터문이 열리자 할머니 7분이 우르르 몰려들어가셔서는 서로 번호표를 먼저 뽑겠다고 다투고 계셨고, 거기에 갑자기 나타난 아줌마들까지............. 나는 결국 10번의 번호표를 받아 들었다.
10번의 번호표를 들고 초조해하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앞에 있는 이 할머니들 쉽게 끝날 분위기가 아니다. 시계가 20분을 넘어가자 나는 창구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고, 청원경찰분에게 “제가 좀 급한데 다른 창구는 안 열릴까요. 저는 돈만 찾으면 되는데”라고 부탁했지만 순서를 기다리라는 말만 당연한 말만 들었고, 결국 10시 30분이 되어서야 나는 창구에 앉을 수가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내가 “통장에서 4천만 원을 수표 1장으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자 담당 직원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런저런 서류에 작성을 하라고 표시를 해주더니 뒤에 있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눴다. 잠시 후 3명의 직원들이 내 앞에서 “주소가 경기도신데 왜 여기에서 이렇게 큰돈을 뽑으시는 거죠?”, “혹시 무슨 전화를 받고 돈을 뽑으시는 건가요?”, “고객님, 이 돈은 어디에 쓰실 예정이세요?”라고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집 때문에 필요한 돈이에요. 보이스피싱 아니니까 얼른 주세요. 늦었어요”라고 하자 1명의 직원이 더 오더니 “고객님, 요즘 누가 집 계약 할 때 현금으로 주라고 하나요? 어디 부동산하고 거래하시는 거죠? 집주인하고 바로 거래하시는 거예요? 부동산 이름이나 집주인 이름 알려주세요. 확인해 볼게요”라며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하려는 준비자세를 취했다.
이때 시간은 10시 40분.
“경매 때문에요, 경매 입찰금은 현금으로 내야 하는 거고, 제가 지금 11시 안에 빨리 가야 하니까 제발 빨리 주시면 안 될까요”는 말에 직원들은 “아~ 그러셨구나.”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창구 직원이 수표에 도장을 찍고 있는 사이 전화가 울리더니 직원은 다시 이 수표를 왜 뽑는지, 어디에 쓰는지를 낱낱이 보고 하고 있었고, 잠시 후 지점장님에게 본사에서 수표인출 확인 전화가 왔다며 지점장님을 바꿔줬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보이스피싱에 대한 안전점검이 철저하게 되어 있는데 왜 우리나라 보이스피싱 사기는 아직도 활개를 치는 걸까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이스피싱 당하실까 걱정이 그래도 좀 덜해지네요. 근데요. 제가 이렇게 어리바리하게 생겼어도 보이스피싱 아니니까 제발 돈을 주시라고요.
울기 직전에 은행 업무가 끝났고, 결국 10시 45분이 돼서야 은행을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도 5분 거리에 있는 법원이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법원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주변을 2바퀴나 돌다가 결국 나는 검찰청, 법원 앞 ‘주차금지’가 버젓이 적혀 있는 도로에 차를 버리고 미친 듯이 경매장을 향해 달렸다.
미리 :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혹시 경매장이
어디예요?
직원 1 : (쳐다도 안 보고)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미리 : 안녕하세요? 혹시 경매장이 어디예요?
직원 2 : 무슨 경매 오셨는데요.
미리 : 집 경매요
직원 3 : 이 쪽 아니세요. 반대편으로 가세요.
미리 : 경매장이 어딜까요? 집 경매하는 곳이요.
직원 4 : 집 경매 뭐 하러 오신 건데요? 입찰하러 오셨어요? 0000하러 오셨어요?
(너무 다급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음)
미리 : 입찰이요입찰.
직원 4 : 반대 건물이세요.
.
여기서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아직 시간은 15분이나 남았다. 괜찮아괜찮아
열심히 반대 건물로 뛰어간 경매장은 TV에서나 보던 작은 법정이었고, 가운데 판사님이 앉아 계시고 왼쪽에 접수처가 있고, 사람들이 방청객처럼 앉아 있었다. 법정의 왼쪽, 오른쪽은 마치 투표소처럼 커튼이 드리워진 칸들이 나눠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입찰표에 서류들을 작성하고 제출하면 끝이었다. 나는 한 칸을 차지하고 동생이 미리 알려준 대로 서류를 작성했다. 손이 벌벌 떨려 글씨가 제대로 안 써졌지만 여러 번 심호흡을 한 후에 본인란에 내 이름, 주민번호, 긴 주소를 가득 쓰고 나니........ .본인은 내 동생. 대리인은 나...........로 작성해야 했다. 다시 서류를 받는 곳으로 가서 종이를 다시 달라고 하자 직원이 “지금 11시 5분입니다”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손이 더 벌벌 떨리고 무슨 글씬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로 서류를 가득 채운 후에 이제 그놈의 원수덩어리 같은 4천만 원을 꺼내기 위해 패딩 지퍼를 내리고, 후드를 올리고, 복대지퍼를 여는데.......... 안 열린다. 복대 지퍼가 어디에 찝혔는지 안 열린다. 복대를 찢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지퍼를 잡아 뜯고 있는데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
“11시 10분이 되었으므로 접수를 마감합니다. 땅땅땅”
그 순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헛웃음이 나와서 큰 소리로 하하하 미친년처럼 웃어버릴 뻔했다. 주섬주섬 서류들을 챙기고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 고개를 든 순간, 법정에 있던 100명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고, 판사님과 서류를 챙겨주던 직원과도 눈이 마주쳤다.
모두들 하나같이 같은 눈으로 나를 봤다.
‘쯧. 쯧. 쯧’
이런 순간이 오면 나는 늘 내가 옆머리를 배배 꼬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으며 빙글빙글 도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 곳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복도 의자에 주저앉아 있는데 띵동 “누나, 제출했어?” 하는 동생의 문자. 땀에 절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 서류 제출도 못 했어”라고 답장하자
“고생했네. 괜찮아 누나야. 땀 좀 흘리고 손 좀 떨었겠는데 ”
라는 동생의 문자를 보자마자 “으앙~”하고 43살의 나는 법원 복도에서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나는 도대체 43살까지 무얼 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내가 제대로 하는 게 있긴 한 걸까, 나를 어디에 쓰면 좋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며 남들이 쳐다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역시나 미리답게 시원하게 울고 났더니 기분이 상쾌해졌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칭찬해 주며 맑아진 얼굴로 차로 돌아왔는데
‘ 불법주차/주차위반’
노란 딱지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 좀 빙빙 돌게요~~~~ 아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