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이 도구 탓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세심하게 잘 고른 본인의 도구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장인이라면 훗날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겠죠. 본격적인 시간 관리 워크샵의 출발점으로 보다 나은 시작을 위한 도구를 안내하겠습니다. 물론 경험이 쌓인 뒤라면 일반적인 노트로도 훌륭한 시간 관리를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에 초점을 맞춰 가이드를 구성했습니다. 한발 한발 따라오다 보면 어떤 식으로 목표를 잡고 쪼개며 실질적인 시간 관리에까지 이어지는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며 찾아온 방법이니 만큼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가이드를 따라 하며 원리를 이해해 보시고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향에 맞게 튜닝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에 가깝습니다.
저의 본업은 IT업계 회사에서 모바일용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입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는 미니멀리즘에 심취해있기도 합니다. 그런 저이기에 시간 관리 도구를 디지털화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해봤습니다. 수많은 앱들을 깔아보고 수많은 온라인 서비스를 사용해봤습니다. 심지어 앱을 직접 개발해보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지금도 제 손에 종이 플래너와 펜이 들려 있습니다. 그나마 원하는 양식을 PDF 파일로 직접 만들어서 아이패드에서 작성하는 방법이 좋았지만, 어차피 아이패드를 들고 다녀야 한다면 종이와 펜이 낫다는 결론에 닿았습니다. 이제 막 시간 관리를 시작하시는 분들께도 아날로그 방식을 더 권합니다. 그 이유로는 아래 3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앱은 깔끔하게 타이핑되고 엄지손가락 두 개만 있으면 텍스트 입력이 가능했지만, 왠지 내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종이 플래너에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했고 짧은 소감과 일기를 쓰기도 하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하기도 합니다. 컨디션에 따라 필체도 달라집니다. 그야말로 그날의 흔적 자체로 고스란히 남겨집니다. 디지털 방식에는 그런 인간적인 흔적을 남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온갖 잡다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자유스럽지 못하기에 기록의 범위가 제한됩니다.
설명할 필요 없는 단순한 이유입니다. 종이 플래너를 펴면 플래너의 내용을 읽거나 쓰는 것 이외에는 달리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 언급되겠지만 플래너는 자주 펼쳐볼수록 좋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에는 그 기록에 닿기까지 달콤한 유혹이 너무나 많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4영역.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들에 우리를 빠뜨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함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창 플래너의 디지털화를 시도하는 중에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여행 중에는 평소보다 빠르게 핸드폰의 전력이 떨어집니다. 하필 그때 기록하고 싶은 이야기와 스케줄들이 떠올랐는데 펜 한 자루, 종이 한 장이 없어 기록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물론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부족해 전원이 꺼지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간 관리와 기록에 관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마음 편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종이 플래너를 찾게 되었고 스마트폰은 급히 필요할 때만 쓰는 보조적인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일단은 여러분도 종이 플래너로 시작해보셨으면 합니다. 플래너가 익숙해질 때쯤 디지털화가 가능하다 싶으면 그때 옮기셔도 늦지 않습니다. 저도 시간 관리 과정 중 일부는 앱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그 예시와 추천 애플리케이션들은 워크숍을 진행하며 소개하겠습니다.
10월 말쯤이 되면 대형 서점에는 새해 다이어리 코너가 어김없이 꾸며집니다. (다이어리와 플래너는 같습니다. 저는 본 책에서는 플래너로 통칭하겠습니다.) 동일한 포맷으로 꾸준하게 판매해오고 있는 굵직한 브랜드부터 매년 다양한 시도를 하는 브랜드들도 있습니다. 매해 이 부스들을 방문해서 플래너들을 비교하고 골라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합니다. 사실 부스가 꾸며져 있다는 것은 수요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구매에 비해 그 플래너가 연말까지 꾸준히 쓰이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 책을 펼치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시간관리에 대한 의지가 있으신 분들이니만큼 제가 좀 더 꾸준히 쓸 수 있는 방식과 그 방식들에 맞는 플래너를 추천드리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년을 52주로 쪼개서 관리하기 위해서는 플래너도 위클리 구성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클리라고 표기된 플래너가 많지만 일주일을 왼쪽 페이지에 담고 오른쪽 페이지 전체가 다음 주 혹은 노트로 구성된 것, 일주일이 4페이지에 걸쳐 구성된 것등 다양한 레이아웃이 있습니다. 그중 저는 1 스프레드(펼쳐진 양쪽 페이지) 전체에 일주일을 할애한 형식을 추천합니다. 이유는 일주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과 각 날짜의 기록 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첫 번째 이유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형식은 일주일 스케줄링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수 있고, 각 날짜의 충분한 To Do 리스트와 스케줄 기입이 가능합니다. 스케줄 관리에도 용이하고 To-Do의 이월도 명시적입니다. 아래 첨부된 이미지를 참고하여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양 페이지에 걸쳐 표기되어 있는 것을 골라 보세요.
1번 조건을 충족시키는 플래너는 꽤 많습니다. 하지만 주간 To-Do를 작성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체크해야 합니다. 주간 할 일은 장기 목표와 데일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주간 계획 없이는 내가 원하는 목표와 오늘 할 일이 따로따로 놀게 됩니다. 중요/시급 그래프의 A 영역으로 내 시간을 채우고자 한다면 주간 To-Do가 일일 To-Do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죠. 페이지 여백이나 빈 공란을 활용해도 되지만 에누리 없이 두 페이지 면적을 7일로만 나눠버린 플래너는 아쉽지만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플래너를 자주 펼칠수록 시간 관리의 완성도가 올라갑니다. 늘 휴대하고 있어야 하며 가능한 자주 펼쳐야 합니다. 지하철에 서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필요하다면 빠르게 펼쳐야 하고 펼칠 때 이번 주를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페이지를 뒤적거리다면 무의식중에 플래너를 보는 행동 자체가 귀찮아집니다. 오늘, 이번 주의 일정을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름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혹시나 플래너 구성은 마음에 드는데 가름끈이 없어서 고민이라면 얇은 리본을 책등이나 커버에 붙이셔도 좋고, 포스트잇 플래그 같은 접착식 책갈피를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할 일 목록은 시간 관리의 핵심 요소입니다. 데일리 To-Do 즉, 체크 리스트는 장기 목표를 위클리로 쪼개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더욱 잘게 쪼갠 결과물을 담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면적을 할애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 경험상 일반적으로 10개 정도면 충분합니다. To-Do 리스트 기록 부분과 체크 박스까지 마련해 둔 플래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뭐든 상관없지만 몇 건밖에 적을 수 없도록 지나치게 좁은 영역을 할애한 플래너는 좋지 않습니다. 하루 최대 10개 정도의 할 일을 작성할 수 있는 공간 인지, 기록한 할 일이 잘 보일 수 있는 적절한 줄 간격을 갖고 있는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간혹 플래너를 꾸준히 쓰지 못할 것을 우려하며 날짜와 월 표기가 공란으로 인쇄된 만년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숫자를 직접 기입하며 필요한 월에만 필요한 주에만 페이지를 소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플래너를 작성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있지 않은 초보 라면 이 날짜를 쓰는 일 자체가 플래너 작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나 일요일 그 주의 날짜를 달력을 보며 써두어야 하는데 이것이 귀찮아서 플래너 작성 자체를 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플래너는 작성을 하지 않으면 안 한 만큼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리의 공백을 체감할 수 있고 더 잦은 기록을 위한 동기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장기 목표의 근간이 되는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노트가 별도로 필요합니다. 이 노트는 매일 갖고 다닐 필요가 없으므로 크기와 재질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에 드는 노트를 준비합니다. 단 1년만 쓰는 플래너와 달리 길게는 수 십 년을 사용할 수 있는 노트니 만큼 튼튼한 노트를 추천합니다. 꽂혀 있는 모습만 봐도 두근거리는 노트가 될 수 있게끔 약간의 사치를 부리셔도 괜찮습니다. 1년에 고작 2페이지를 사용하니 페이지 수가 많지 않은 노트도 괜찮습니다. 노트를 골라보는 재미를 만끽하며 마음에 쏙 드는 노트를 선택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