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잉글랜드의 올드 타운을 찾아서
미국에도 역사 유적지가 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좀 신기했다. 미국은 역사가 짧은 나라이니까. 여기에 역사 유적지가 있다고? 최초로 유럽에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온 것이 1620년이다. 조선시대로 치면 광해군이 다스리고 있을 때다. 생각보다 꽤나 오래되었다. 마냥 짧다고만 생각했던 미국의 역사가 새삼 다시 보인다.
가을이 조금씩 깊어지는 계절, 석사과정을 마쳤지만 아직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선배K의 제안으로 같이 살던 후배L과 함께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놀러 가기로 했다. 미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보스턴 바로 아래에 마치 알통을 자랑하는 사람의 팔처럼 반 시계방향으로 뻗어 나온 땅이 있다. 이 곳이 바로 케이프 코드로, 유명인들의 고급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땅을 곶이라고 하는데, 케이프 코드에서 코드가 곶이라는 뜻이다. 끄트머리까지 가자면 보스턴에서 3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지만, 케이프 코드의 시작 부분 까지는 한 시간 정도면 간다. 길이 막히지 않는 다는 전제하에. 여름에는 케이프 코드까지의 길이 많이 막히는 편이라고 한다. 다행히 가을에는 그다지 막하지 않아서 가볍게 바람 쐬기에 적절했다.
미국 북동부는 랍스터의 산지로도 유명한데, 보스턴 시내에서 먹기에는 다소 비용이 비싸다. 그래서 랍스터를 좀 저렴하게 먹기 위해 이 지역으로 드라이브 겸 나들이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보스턴에서 알고 지낸 현지인들의 경우 케이프 코드는 너무 상업적인 느낌이 강한 휴양지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케이프 코드의 시작 부분에 플리머스(Plymouth)가 있다. 동일한 지명이 영국에도 있는데,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자신이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인지 영국과 동일한 지명이 꽤 많다. 당장 플리머스 옆에서 Sandwich도 있고, 북쪽으로 가면 London도 있고 Berlin도 있다.
이 플리머스는 Mayflower2 가 처음 내렸던 곳으로, 우리로 치면 경주나 민속촌 같은 느낌이다. Mayflower2 모형도 있고 플리머스 락도 있는 미국의 유적지이다. Mayflower2는 그 당시의 선박은 아니고, 영국에서 그 당시의 선박을 복원해서 기부했다고 한다. 제주 산방산 앞에 가면 볼 수 있는 하멜의 배가 떠오른다.
우리가 방문했던 때가 10월 중순이었는데, 딱 소풍 가기 좋은 날씨라 그런지 근교 지역에서 소풍 겸 견학 겸 방문한 어린 학생들을 하루 종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방문했던 계절에는 갈대도 있고, 낙엽도 날리고, 수령이 오래된 굵은 나무들이 그곳의 고풍스러움을 한층 더해 가을 느낌과 참 잘 어울렸었다. 다른 계절에는 어떤 곳일지 궁금했었는데, 그때의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최초에 정착한 지역의 역사적인 배경이 작용을 해서인지 보스턴을 포함한 뉴잉글랜드의 건축물들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좀 올드한 스타일이다. 19세기에 유행했던 콜로니얼 양식과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들이다. 빅토리아 양식은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이 있는 스타일의 건물들이 많으며 간혹 집 옆에 탑이 붙어있기도 하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 중에 로이스 로우리 (Lois Lowry)의 아나스타샤(Anastacia)란 책이 있다. 보스턴에 사는 평범한 소녀 아나스타샤의 이야기인데, 보스턴 시내에서 케임브리지로 이사 가는 내용이 있다. 아나스타샤는 이사하기가 싫어서 탑이 있는 집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정말로 탑이 달린 집을 구해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략 중학생 때쯤 그 소설을 읽으면서 아무리 교외에 있는 집이라지만 집에 무슨 탑이 달려있지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빅토리아 양식의 집을 구했던 것 같다. 청소년용 소설이지만 보스턴과 그 근교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스턴에 거주 후에 읽어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보스턴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에 잘 들어올 것이다.*
케이프 코드로 오면 좀 더 단순한 형태의 집들이 나타난다. 장식도 적고 직사각형에 좌우대칭으로 생겼으며 천장이 높고 뾰족한 이른바 케이프 코드 스타일이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오고 바닷가라 바람도 많이 불어서 생긴 실용적인 스타일이라고 한다.
플리머스 근처에는 1620년의 물레방아를 복원한 The Plimoth Grist Mill이 있다. 물에 비친 단풍 사이로 예스러운 건물들이 드문 드문 보이는 고즈넉한 곳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제외하더라도 한가로운 가을 산책을 즐기기에 제격인 추천 방문지이다.
http://www.plimoth.org/what-see-do/plimoth-grist-mill
케이프 코드는 보스턴에서는 가깝게 만나기 힘든 백사장이 펼쳐져있는 곳이다. 내내 덥다가 해가 넘어갈 때가 다가오자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온 지역주민 말고는 거의 찾지 않는 바닷가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반. 그럭저럭 유학생활에 적응한 거 같았다. 그렇게 적응했다 싶자 긴장으로 빳빳했던 어깨의 힘이 풀어지면서 괜히 가족 생각도 나고 친구 생각도 나고 싱숭생숭한 마음이 드는 딱 그때 즈음이었다. 여기가 태평양이라면 저 건너편이 한국이겠지 하고 봤을 텐데,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바다 건너(?)에 있는 한국이 괜스레 떠올랐다.
아마도 1600년대에 건너온 청교도들은 그런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이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각주)
여담으로 Lois Lowry는 아동문학상을 많이 받은 아동문학 작가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성인이 읽어도 유치하지 않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위에 소개한 아나스타샤는 9권 정도의 시리즈물로 읽다보면 아나스타샤의 성장을 함께 한 기분이 든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The giver(기억전달자)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기억전달자는 일종의 sf소설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각을 잃고 살아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