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인 죽음으로 뜨겁게 걸어가기.
집에서 잉여 생활을 즐기던 시절, ‘The Necessary Death of Charlie Countryman’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한국 개봉명은 ‘찰리 컨트리맨’. 제목부터 대놓고 ‘필연적인 죽음’을 전면으로 내세운 영화의 패기에 적지 않은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는 주인공 찰리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부카레스트’로 가라는 유언대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싣는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갑자기 사망하는 걸 보면, 찰리의 여정이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부카레스트에 도착한 찰리는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루마니아의 풍경을 비추는 영상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 부카레스트를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스호스텔에서 유쾌한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클럽에서 놀기도 하고… 그러던 중 악기를 연주하는 한 여인을 발견한다. 그 여인의 강력한 끌림에 매료된 찰리.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안타깝게도 그 여인은 갱단 두목의 여인이었다. 한마디로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을 건드린 것. 그러나 찰리는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변의 흐름을 거부한다. 그리고 오직 자신의 사랑만을 쫓으며 ‘필연적인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자연의 섭리이니 그냥 지켜 보아라’,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이런 ‘Let it be’ 정신은 어딘가 근엄하고 이치를 깨달은 선인의 정신과도 같다. 어떻게 보면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지혜로운 삶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지,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흔한 직장인의 생활을 생각해 본다. 밥 먹고, 출근하고, 똥 싸고, 주말엔 친구 만나고. 그러다 이런 ‘일상의 흐름’에 무료함을 느끼는 날이 온다. 그래서 새로운 취미나 공동체를 찾고, 시도해보지 않았던 게임과 운동을 배우기도 한다. 사랑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당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은 돌아보지 못하고, 원하는 사랑만을 갈망한다. 필연을 거부하고 우연을 쫓는다. 그러다 사랑을 놓치면 신세를 한탄하며 분노하거나 우울의 늪에 입수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지 잠시 돌아본다. 흐름에 그대로 몸을 맡기는 사람인가? 흐름을 거부하며, 보다 깊은 ‘생동성’을 찾아가는 사람인가. 후자에 가까운 중간인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을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일, 시도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된다. 이 현상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 더 심해지는 듯하다.
영화에서 찰리가 갱단의 추격을 피해 있는 힘껏 시내를 달리는 모습이 나온다. 허름한 행상에 일은 계속 꼬여가며, 가진 거라곤 1도 없는 남자가 오직 사랑만을 위해 도망가는 모습. 위협으로부터의 도주가 곧 사랑으로의 직진이며 현실에 대한 거부이다. 찰리의 열정과 거부가 진실되며 멋지게 묘사된 장면이었다.
흐름에 몸을 맡기다가도, 적절한 거부로 꾸밀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