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과거를 더듬어 본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날은 언제인가? 아마도 네 살의 어느 평일 오후가 맞지 않나 싶다.
그리 덥거나 춥지 않았으니, 계절은 봄 아니면 가을이었다. 창을 통해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은 가을의 빛과 가까운 색이었다. 이불 위에서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어릴 때 자동차를 참 좋아했다. 엄마는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계셨다. 정확히 책이 아닐 수 있지만, 정적인 모습의 엄마가 떠오른다. 커피도 드셨을까? 예나 지금이나 커피를 즐기시기에 그때도 옆에 커피잔이 있었으리라. 평화로운 오후였다. 특별한 사건 없이 날씨는 맑았고, 몸은 건강했으며 슬프거나 짜증 나는 일도 없었다. 네 살짜리 애기가 짊어지고 있을 걱정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런 단어를 들으면 이 날 오후의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경험과 인상을 머리에 축적한다. 그러다 특정한 상황에서 그 무의식으로 축적했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내가 순간순간 머릿속에 이 날의 오후를 떠올리는 것도 이러한 작용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무의식의 축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평일 오후를 좋아한다. 평일 오후는 주말 오후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주말 오후의 같은 시간에 같은 카페에 앉아 같은 커피를 마신다 해도, 시간과 공간의 질감이 평일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주말은 대부분 '원래' 휴식을 취하는 날이다. 평화로운 땅에서는 군대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처럼 자유가 주어질 땐 자유의 행복을 체감하지 못한다. 원래 주어지는 휴일에 그리 큰 감동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 평일의 시간은 바쁘고 치열하다. 쏟아지는 업무를 잠시 외면하며, 회사 앞 카페에 앉아 있는 순간은 주말에 여유와는 또 다른 행복의 형태이다. 업무 시간을 쪼개 얻은 10분 정도의 휴식에 조금 더 과한 '쉼'을 부여한다. 그래서 평일 오후의 여유가 주말보다 더욱 꿀 같은 시간으로 인식하게 되는 게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커피가 떨어졌다. 한 잔 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