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불면증의 나날들 속에서 어쩌다 깊이 잠들면 그야말로 네잎클로버 찾은 날이다.
향정신성 수면제를 처방받아먹다가 어느 날 내성이 생긴 나를 발견하고 더 이상 먹지 않았다. 대신 집에 쌓이는 것은 수면유도제.
내일 일정이 있는데도 정말 못 견디게 잠이 안 오는 날은 새벽 3-4시경 포기하는 심정으로 수면유도제를 먹는데 비염 약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이어질 다음의 하루를 내내 몽롱함과 싸우며 버텨야 하는 최악 컨디션을 불러일으킴을 예상하면서도 들이마시는 죽음의 성배 같은 느낌.
그저께의 밤.
밤공기가 선선했다.
약간의 서늘함을 좋아하는 내게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온도라 오늘은 잠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누웠건만 새벽 4시가 되도록 잠들기 어려웠다.
잠든 것인지, 잠들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로 이불과 혼연일체 된 상태였다가 아침 8시 정도가 되었을 때 누워있던 침대 속으로 내가 스며들어가는 느낌의 수면상태에 진입했다.
그래, 오늘은 오후에 일정이 있으니까 맘 놓고 슬리핑 모닝을 해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어렵게 찾아온 수면의 상태에 집중을 하였는데, 어느 순간 나는 침대가 아닌 난개발 된 80년대 후반의 서울 같은 곳에 있었다.
하늘은 붉음과 검음이 뒤섞인, 그렇다고 하나의 색은 결코 아닌 그런 색이었다.
붉은색 비중이 더 많았던 것 같으나 밝음의 붉음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산을 깎아 만든 듯한 오르막길을 올랐고 오른편에는 나름대로 고층 아파트인데 많이 낡은 상태로 60년대에 지어 아직까지 서울 시내 곳곳에 위치한 아주 오래된 아파트의 모습 그것이었다.
한참 그 산등성이 같은 길을 올라가는데 그 시절 늘 아파트 동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아주머니들의 무리 정도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여기에 ***이 살아요.'라는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고요?'
그 이름은 나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지금은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친구인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래전 같은 반 급우의 이름을 들으니 황당하여 "걔가 왜 여기 살죠? 여기 연고도 없는데요?"라고 되물었다.
'글쎄, 어쨌든 여기 살고 있네?'라고 그 아주머니가 답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상황과 대화. 이게 뭐지 싶은 상황에서 파악을 해보니 나는 집을 가야 했다. 길을 잃은듯했다.
대체 우리집은 여기서 어찌 가야 하나 싶어 두리번하는데 그 언덕길에서 시선을 돌리니 멀리 전철역이 보였다.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방학동'이라는 지명이 선명하게 들렸다.
아, 그럼 저기 있는 전철역은 방학역이겠구나. 일단 거기서 1호선을 타고 집으로 갈 수 있도록 갈아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올라갔다. 방학역이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거의 산꼭대기였던 것 같다.
전철역에 도착하니 1호선답게 지상철.
그런데 아주 낡은, 시대극에서나 봤을 것 같은 아주 낡은 기차가 들어왔다가 황급히 떠난다.
아니 여긴 전철역이 아닌가? 뭐지? 하며 당황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왔다.
'저 기차 부산에서 온 거야.'
방학역에 웬 부산?
뒤돌아보니 내가 사는 동네로 가는 방향 표시가 있다. 다행이다. 일단 여기서 전철을 타고 가면 되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전철을 기다린다. '아, 기차인가?'
하여튼 난 우리집으로 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평정을 찾고 기다리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마치 하늘에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처럼 들려온다.
'나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화를 내거나 짜증 내는 것이 아닌 지친 목소리들이다.
대체 이게 뭘까?
생각해 보니 난 한참 동안 언덕을 걸어 올라와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늘색은 변함이 없다. 해가 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냥 그대로다.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기다리면 오는 전철이 아니란 말인가? 계속 혼란스럽다.
분명 전철을 기다리는 승강장 벽면에 내가 사는 곳의 이름이 적혀있고 방향도 표시되어 있는데, 왜 전철은 오지 않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지친 사람들의 목소리만 있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전철이 곧 온다는 것 같다. 나도 이제 전철을 타면 갈 수 있나 보다. 그런데 명단 확인을 한다.
'나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이 말만 계속 들려온다. 대체 뭐길래 전철을 그리 오래 기다렸다는 것이며 전철 타는데 명단까지 확인하나 싶지만 일단 기다려보았다.
내 앞에 마치 만화에서 보던 해적의 비밀 지도처럼 말려있던 명단이 펼쳐졌다. 그 안에 이름이 빼곡하다.
나도 이제 명단에 있을 테니 전철 타고 집에 가면 되겠지 하는 순간 귀에 들려온 말.
'이름이 없는데?'
그러고는 마치 TV에 공급되던 전파가 순식간 꺼진 듯 암흑. 소음은 없다.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생생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분명히 경험했는데 시간이 지나 점차 흐려지는 기억의 편린처럼, 천천히 그려나가는 수채화처럼 그 장면들이 그려진다.
순간순간 놓친 것도 있고, 잘 들리지 않던 것도 있으나 그 붉음과 검음이 공존하는 하늘의 색과 산등성이 길, 오래된 아파트가 도시미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대충 서있던 곳.
그 속에서 분명히 들었던 지명인 방학동.
손을 뻗어 폰을 집어 올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방학동 묘지'를 검색해 보았다.
그곳에는 천주교 서울 대교구의 추모공원, 묘지가 있었다.
별 이상한 꿈도 다 있구나라고 입력된 대사처럼 읊으려고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왜 그곳을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환각이라기에는 선명했고 꿈이라기엔 경험처럼 분명했다.
그곳은 어디로 가는 곳이었을까?
나는 저승으로 가는 기차를 탈 뻔한 것이었을까?
내가 만나고 본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며 그 쓰러질 것처럼 낡은 아파트의 사람들은 왜 거기 살고 있었을까?
이제 연락조차 안 하는, 친구라 하기도 애매한 걔는 왜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는 거기서 깨어나 자연스레 묘지를 검색한 것일까?
PS: 여기서 깨어난 직후 다시 성당에 가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세례식이 있던 초여름의 이른 저녁 같은, 덥지만 신선한 공기를 맡고 싶어졌다. 그리고 연이어 생각한 것은, 신이 나의 냉담을 녹이는 방법치고는 조금..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늘 내 생각보다 한 수 높게 크리에이티브한 신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