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타워브리지와 런던타워
쫄깃쫄깃한 런던타워 기념품
할머니는 전라도 분이시다. 할아버지의 까다로운 다섯 누님을 모두 만족시킨 음식 솜씨의 소유자. 나와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어느 순간부터 간이 맞지 않았다. 주방에 뭐가 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 와중에도 내가 찹쌀떡을 좋아하는 건 잊지 않으신다. 발 받침대 위에 올라 아픈 팔로 몇 시간을 저어 만든 팥앙금은 머리가 띵할 만큼 달다.
주방칼도 못 찾게 됐지만 할머니께도 쫀득쫀득 달라붙는 기억이 한 개씩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손주와 며느리 줄 선물이 그랬다. 처음 들어간 기념품 가게는 타워 브리지 앞. 손주에게 뭐가 좋을까 고민하시더니 타워브리지 모형이 달랑거리는 남색 펜과 똑딱이 손거울을 집으셨다. 계산하고 나오는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미소에 줄을 그은 건 정신없는 공항 수하물 검사. 몰아치는 줄 때문에 정신 없던 할아버지께서 기념품이 담긴 봉투를 검사대에 두고 오신 모양이다. 깜빡한 대가는 웃기고 가혹했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애들 줄 남색 펜을 잃어버려 다시 사야 한다"는 잔소리를 열흘 내내 들으셨다. 유럽이 며칠째 인지도 가물가물하시던 할머니가 손주 선물만큼은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만든 팥앙금 속에는 할아버지가 깐 밤도 들어있다. 잔소리를 멈추라는 호소를 들으니 왠지 다시는 밤 안 깐다고 하셨던 원성이 겹쳐 들린다. 손녀인 내 귀에는 잔소리도, 호소도, 원성도 찹쌀떡처럼 달콤하다. 모두 칼로 템즈강 물 베기인 걸 알기 때문이다.
템즈강물로도 소양강물로도
런던은 어딜 봐도 건물이 고풍스럽다며 감탄하시지만 강물은 영 아닌가 보다. 타워브리지 아래로 흐르는 템즈강을 보니 소양강 맑은 물이 떠오르셨다고. 영국 사회문화 수업 교수님께서 런더너는 런던 날씨에 대해 "내 새끼 까도 내가 깐다"는 태도를 보인다고 하셨다. 다행히 이 날 하늘은 소양강물처럼 맑아 남의 새끼(?) 깔 일 없이 화창한 날씨를 만끽했다.
패키지 여행에는 선택 관광이라는 개념이 있다. 로마 벤츠 투어, 파리 에펠탑 투어 등 도시별 전문 가이드님의 설명을 들으며 관광지에 얽힌 문화와 역사에 관해 한층 더 깊이 배울 수 있어 좋다. 선택하지 않으면 여유롭게 자유시간을 가지면 된다. 런던 선택 관광은 시내를 계속 걸어야 했기에 남는 쪽을 택했다.
할아버지는 런던타워가 궁금하셨나 보다. 들어가고 싶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입구 앞을 서성이신다. 둘러보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려 입장을 못하는 대신 얼른 스마트폰에 검색을 했다. 영국 왕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라는 소개글이 인상 깊다. 한 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와 왕관 같은 보물을 전시하고, 지하에서는 중세 갑옷과 방패 같은 전쟁 무기를 보관한다고한다. 눈이 멀 만큼 반짝이는 530캐럿으로도 피비린내는 숨길 수 없었겠지. 한 때 수많은 귀족의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설명을 읽으니 아름답던 타워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기다리는 사이 런던 가이드님과 동행 분들이 근처에 도착했다. 선택 관광을 한 사람들에게만 들리는 가이드님 설명 때문에 무전기가 지지직 거렸다. 끄셔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지만 설명을 들으니 도움이 된다며 계속 켜 두신다. 템즈강물로도 소양강물로도 할아버지의 불타는 학구열은 끌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