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이유를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은 없다. 다만 아빠의 장례식 때 스쳤던 아빠 쪽 가족들이 우리에게 뿜어냈던 강력한 적대감은 그대로 느껴져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아빠는 참으로 선한 사람이었는데 아빠의 가족들은 왜 그리도 차가웠는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
60대의 할머니, 장애가 있는 40대의 엄마, 19살, 16살, 11살, 9살 여자 조카들만 남아, 딱하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 그토록 차갑게 돌아선 이유는 뭘까.
그래서일까. 나도 아빠의 가족들을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갑게 잊어버렸다. 나의 친척은 이모네 가족이 전부였다. 우리 집은 가게를 했기 때문에 명절이면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방문객들로 들썩였다. 하지만 우리 집 방안엔 할머니와 네 명의 자매가 전부였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시댁을 갔는데 최소 30명이 넘는 친척들이 있었다.
세로길이 2미터 정도의 밥상 2개로도 동시에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결국 숙모님들은 두 개의 밥상을 다 치우시고 2미터 밥상에 다시 상을 차린 후 식사를 하셨고 그 마저도 자리가 부족했다. 나는 몸을 반만 꾸겨 넣은 채로 밥을 먹었다.
시댁의 친척들이 많은 까닭은 시아버지 형제들의 숫자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시아버지의 형제는 7명이다. 그들은 모두 결혼을 했고 각자 2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럼 이미 14명의 형제부부와 14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절반의 자식들은 또 결혼을 했다. 그럼 다시 7명이 플러스된다. 결혼을 한 자식들의 절반은 또 아이를 낳았다. 여기서 4명이 또 추가된다.
(지금까지 14+ 14+7+4= 39명, 기본 인원)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의 시아버지도 첫째지만 그의 아버지도 형제 중 첫째였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집 친척들이 명절 기간 동안 제사를 지내러 또는 인사를 하시러 중간중간 서너 명씩 오셨다 가셨다.
결혼 이후 3년 정도는 왕할머니(시어머니의 시어머니)도 살아계셨기 때문에 최소 50명에서 60명의 친척들이 2박 3일 시어머니집에 주무시기도, 밥을 드시기도, 차를 드시기도 하셨다.
명절 아침 차례상 앞에 절을 할 때도 모두 서 있을 공간이 없어서 절하는 순서가 별도로 있었다. 먼저 큰 집 남자 어르신, 이후 작은 집 남자 어르신, 손자들, 그리고 큰 집 며느리들, 이후 작은 집 이하 여자 어르신들, 여자 손녀들 순이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어떻게 준비되었을까.
숙모님들은 수년간 명절을 경험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업무 분업화를 통해 이 전쟁을 치르고 계셨다. 나는 처음 보자마자 '리스펙'이라는 단어만 나왔다.
먼저 명절 음식 업무분장은 다음과 같았다.
총괄관리 겸 나물은 첫째, 생선과 소고기 산적은 둘째, 전은 셋째, 튀김은 넷째, 나물과 생선보조는 다섯째, 튀김보조는 여섯째, 설거지는 일곱 번째였다. 좁은 부엌이었지만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각자의 업무공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모든 재료들은 한 개도 버려짐이 없었다. 예를 들어 넷째의 튀김에 사용된 기름은 둘째와 셋째의 생선튀김과 전을 사용하는 용도로 이어졌다. 셋째의 파전에 남은 파들은 다시 둘째의 생선튀김에 고명으로 남김없이 활용되었다. 둘째가 소고기 산적에 사용한 간장 양념은 첫째의 나물 양념의 베이스가 되었다. 대충 이런 식이었는데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손님맞이 업무 분장도 나누어져 있었다.
찾아올 인원수에 맞는 전체 음식(추어탕 또는 종류별 회, 이와 함께 형제들이 좋아하는 생선으로 만든 배추김치 등)은 첫째, 준비된 음식 먹기 좋게 예쁘게 컷팅은 둘째, 컷팅된 음식 어울리는 그릇에 올리기 셋째, 과일 손질 및 컷팅은 넷째, 옮기기는 다섯째, 총괄 관리 첫째 보조는 여섯째, 설거지는 일곱 번째였다.
차례상을 다 치운 이후엔 7형제에게 만든 음식을 '엔 분의 일'하는 행사를 치른 후 친척들은 모두 떠났다. 7형제가 다 보는 앞에서 첫째 며느리의 진두지휘 아래 떡, 각종 산적, 각종 전, 각종 생선, 각종 과일들이 7개의 비닐봉지에 담겼다. 비닐봉지 한 개씩 들고 대문을 나가시는 삼촌 숙모님들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명절은 끝이 났다.
이 모든 과정에 내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신규인 내가 들어가면서 완벽한 숙모님들의 업무 분장표를 조금 수정해야만 했는데 상당히 난감해하셨던 거 같다. 업무를 맡기기엔 나는 기술도 경험도 없었던 것이다. 그냥 서울에서 '애들 가르치고 왔다'가 전부인 신입에게 줄 수 있는 업무는 뭐였을까.
1년 후 신입에게 맡겨진 업무는 제사에 쓰이는 제기를 닦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이 모든 상황에 멀미가 났다. 심지어 엄청난 생선들을 튀기는 시점이 오면 눈에서 눈물이 나서 집안에 있을 수도 없었다. 내가 숙모님들한테 "숙모님들은 눈이 안 따가우세요?"라고 하면 모두 웃기만 하셨다.
남편을 불러 카페 가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큰 집의 큰 며느리의 큰 며느리였다.
일사불란함의 끝판왕이었던 7형제의 명절이 끝나면, 나는 우리 집과는 너무도 다른 남편의 가족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들이 몰려왔다. 그 감정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부러움'이었다.
7형제의 큰 며느리로 50년 넘게 살아온 나의 시어머니는 '화병'이 생기긴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그 결과물이 부러웠다.
세월이 흘러 코로나 시국을 거치면서 집안 기둥이 들썩이게 할 만큼의 대규모 인원은 이제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의 가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모이기를 반복한다.
일흔 살의 시어머니 또한 그들을 위한 생선 김치를 여전히 담는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명절 총괄 관리인이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단코 나는 저렇게는 못할 거 같다.
정확하게는 나도 어머니처럼 하고는 싶은데 능력 부족으로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나에겐 6명의 동서도 없지 않은가. 어미니에게도 남편에게도 나름의 양해를 구해본다.
p.s 문득 스물세 살 즈음 남편과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동서울버스터미널에 길게 늘어선 고속버스들을 보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난다.
고향 생각이 난 스물세 살 남편: "우리 집에 제사가 1년에 13번이나 있는데 괜찮겠어요? 엄마가 줄인다고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제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스물네 살 김주무관: "13번이면 한 달에 대충 한번 꼴인데, 그 정도가 많은 건가? 적은 거 같은데,
음 ~~ 그게 문제 될 거 하나도 없을 거 같아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한 달에 한번 동태 전도 먹고 산적도 먹고, 너무 좋을 거 같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