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에 6천만원

세관조사에서 배운 기록관리의 중요성

by 이대팔

지식을 배우려고 학원을 다니면

학원비를 내고 배워야 하는데,

회사는 일도 가르쳐주는데도

거기다 월급도 주니 얼마나 좋은가.


회사 초년생 때는 이런 생각으로

회사생활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내 몸과 시간을 갈아 월급을 받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그 시절 나는 돈을 버는 즐거움보다

사실, 일을 배우는 행복함이 더 컸다.


일욕심으로 무지 속에 덤벼들다 보니

수많은 일들이 몰려왔고,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도 더 배우고 싶어 뛰어들곤 했다.


외주가공 생산방식

당시 회사는 영업과 연구개발, 관리 기능은

국내에 있었고, 직접적인 대부분의 생산은

약 8천 명 현지인력의 인도네시아와

약 6백 명의 중국 현지공장에서 진행했다.


지금도 대략 비슷한 구조의 산업이 많은데

당시에도 대기업인 S사와 L사 현지공장의

주변에 납품회사인 한국회사의 현지공장이

자리를 잡고 협력하는 구조를 갖추었다.


국내의 원재료를 해외 공장으로 보내면,

해외공장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국내로

수입해 들어오는 구조인, 이른바

‘외주가공’ 방식이었다.


외주가공 방식은 말은 간단한데,

서류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제품 1개를 만들기 위해

자재가 여러 종류 들어간다.

어떤 자재는 1개,

어떤 자재는 10개,

어떤 자재는 0.5개처럼 구성된다.


그래서 제품별로

자재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산정하는데

이를 '자재소요량'이라 한다.


그 소요량에 생산 예정 수량을 곱하면

구매해야 할 자재의 총수량이 나온다.


이 총수량을 외주 현지공장의 요청수량에

맞게 자재업체별로 제각각인 수급 일정을

조율하고 각각 다른 주기에 맞춰 발주를

하고 제때 입고시키고 선적을 해야 한다.


당시 회사의 A제품에는 약 30여 종의 자재가

들어갔는데, 제품의 종류와 수가 많으면

이러한 필요 자재수량 또한 더욱 많아지고

복잡해지게 된다.


더구나 한번 정해진 자재소요량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객수요와 시장변화에

따라 더 좋은 자재를 발굴하고 적용하여

성분과 구성이 수시로 변경된다는 점이다.


가령, 어떤 시점에는 A라는 자재가 1.5가

쓰였는데, 고객사 요청으로 1.8로 바뀌게 되면

바뀐 시점부터 자재소요량이 변경되고

이를 기록하고 관리하여야 한다.

(BOM기록 및 변경관리)


문제는 이 일들이 A제품에 A자재 한 개만 변경

되는 게 아니고 수십 가지 제품에 수백 가지의

자재가 수시로 변경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게 번거롭고

복잡하다는 데 있는데, 소요량 변경 전 자재와

제품 재고수량, 변경 후 자재수량, 사양 변경된

자재의 제품생산Lot기록, BOM 기록변경,

ERP등록, 품질절차 양식에 기록, 내부결재를

받는, 여러 파생되는 복잡한 업무가 발생된다.


체계 있는 회사는 이러한 복잡하고 번잡한

기록, 변경관리를 ERP(전사적자원관리)라는

시스템으로 구축해서 관리하기도 하는데,

당시 회사는 아직 그런 수준의 프로세스

성숙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일 년이면 어떤 제품은 두세 번 변경되지만,

중요제품은 십여 번 변경되는 경우도 있으니

위 변경시점과 변경사유, 변경전후 소요량등

관련 기록의 유지관리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작성,

관리하는 담당직원은 그 일이 아니어도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업무를 하고 야근도 잦은

상태였고, 기록관리를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업무과부하 상황이었고 책상 한편에는 늘

산더미처럼 서류를 쌓아 놓고 손도 못 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관세환급을 배우다

자재를 국내에서 구매해 해외공장으로 보낼 때

'해외 생산용 자재를 보내는 것이고,

완제품이 되어 다시 들어올 것이다'

라는 수출신고를 한다. (수출면장코드)


완제품이 국내로 들어올 때는

'이 제품은 앞서 수출한 자재로 만든 것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재소요량' 관련

자료를 세관 신고 후 수입면장을 발급받는다.


관세청(세관)은 수출된 자재 수량과 수입된

완제품 수량이 당초 신고한 자재소요량과

수량이 맞는지, 신고 이상여부를 확인한다.


이렇게 수입된 완제품과 국내 생산한 제품을

결합한 수출용 제품을 완성한 후 해외수출을

하게 되며, 수출 시에는 앞서 수입 시에 부과된

관세를 수출정책의 일환으로 환급해 준다.


이를 '관세환급'이라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제대로'만 하면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돈이 돌아오는 구조다.


문제는 ‘제대로’라는 단어가

늘 그렇듯, 사람이 빠지면

바로 무너진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프로세스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프로세스가 사람을 움직이게 회사의

업무절차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관세환급 업무를 담당하던

물류팀 직원이 6개월 전 퇴사했다.

회사는 후임을 뽑지 않았다.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한 것도 있었고

매출이 늘지도 않았는데 왜 인력을

충원하느냐는 본사 임원들의 질책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업무는

조용히 내게 넘어왔다.

“네가 일 잘하잖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라는 말들로 쉽게 처리됐다.


사실, 회계팀 직원이 물류팀의 업무를

떠 맞는 게 직무배치에 맞지 않고

나도 일이 많아 못한다고 해야 하는데

나는 일을 더 배우려는 욕심에

겁 없이 관세환급업무를 추가로 맡았다.


그때는 대부분 생산이 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보니 외주가공을 위한 수출·수입의

(과세표준) 금액도 상당했다.


지금처럼 세관 전산으로 기록이 남는 게

아니어서 수출된 자재의 수량과 수입된

제품의 수량의 변동을 수기로 면장뒤에

기록하던 시절이었다.


보낸 자재가 소요량 기준으로 ‘0’이 될 때까지

면장 뒷면에 줄줄이 적어 내려갔다.


그 수기 기록을 세관에서 수입 시 검토하고

이상이 없다는 도장을 찍어줬다.


그 원본 수입면장과 수출면장을

원본으로 철해놓고 관련서류와 함께

제출해야 관세환급이 이뤄졌다.

(관세환급은 직환급과 간접환급이 있다.)


내 주변 캐비닛에는 몇 년 치 면장원본이

한가득 쌓여갔고 나도 덩달아 일이 폭주했다.


관세청(세관)의 특별조사

세무조사를 받아보며, 관공서중에 세무서

조사가 가장 무서운 줄 알았다.


그런데 관세청(세관)도 조사를 한다.

나는 아주 현실적인 방식으로 배웠다.


어느 날,

관세청(세관)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정기조사를 나온다고 했다.


그 순간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세무조사도 무서운데

세관조사는 더 무섭다는 말만 들었지,

회사는 이에 대해 준비된 건 없었다.


실상, 세관은 마약, 밀수등을 다루다 보니

특별사법경찰관(특사경)의 권한도

있어 직접 체포도 할 수 있는,

일반인에게는 무서운 조직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웃긴 건 그거였다.

평소엔 별 관심도 없던 임원들이

'세관조사'라는 단어가 찍힌 종이를 보자

갑자기 위기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물류팀에서 하던 일을 후임도 안 뽑고

회계팀 직원인 나에게 넘길 정도였으니,

막상 조사 통보가 오자

겁이 날 만도 했다.


회사차원에서 세관조사에 대응하고

준비를 위한 TFT를 급하게 꾸리고

물류팀장에게 TFT장을 맡겼다.


물류의 베테랑이었던 10년 차 물류팀장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나도 세관조사는 처음이야'

라며 당황해했다.


세관조사 준비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은

세관은 관세환급만 보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건

국내 생산과 해외 생산의 수량구분,

일자별 제품의 생산기록,

생산계획과 생산실적의 연결점등

내부관리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정말 그 자재가 나갔는지.”

“정말 그 제품이 들어왔는지.”

“정말 그날 생산이 있었는지.”

“그걸 누가 승인했고, 누가 확인했는지.”


결국 조사원들이 묻는 건

관세나 면장의 숫자보다,

흐름이었다.

기록이었다.

관리였다.


회사에서 제품생산을 했으니 당연히 이러한

기록들이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실상은 내부 기록관리와 이에 대한 업데이트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 보니 체계적 생산계획과

생산실적 관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세관조사가 세무조사처럼

몇 년 치를 본다고 하니,

생산팀, 외주생산관리, 물류팀,

해외 공장장까지 모두 정신을 못 차렸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맡은 시점 이후부터의

환급에 대한 자료만 정리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시는 달랐다.


“전임자 자료까지 다 정리해서 확인해.”

나는 회계 마감도 해야 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관세환급 업무에다가

갑자기 세관조사 TFT까지 들어가게 됐다.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나는 정말 일복이 터지는 운명이구나.


준비 일정은 빠듯했다.

관계부서는 자주 밤을 새웠다.

나도 본업업무 외에 TFT까지 하게 되며

같이 밤을 새우며 준비에 참여했다.


우리 팀은 세관조사와 무관하다 보니

내가 세관조사를 준비하며 야근을 하고

밤을 새우는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동료애로 같이 도와줄 법도 하건만,

본인 할 일과 다른 팀이 할 일을 구분하는,

나와달리, 현명한 팀원들이었다.


물류팀과 함께 TFT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뭉치에서 관련 자료를 찾고, 없으면

새로 만들고, 뒤지고, 맞추고, 다시 뒤졌다.


TFT에서 준비를 하며 접해보니

요청서류의 명칭이나 내용은

달랐지만, 세무조사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자재 수출실적과 제품 입고실적의 대조.

생산계획서.

작업지시서.

출고지시서.

현업에서 쓰는 정형화된 서식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제대로 보관됐는지,

결재와 내부통제가 있었는지.


그 단순한 질문에

TFT는 자꾸 멈칫했다.

“그거… 어디 있지?”

“그때는… 그렇게 안 했는데.”

“담당자가 바뀌어서…”

“이 숫자가…왜 안 맞지?”


회사의 ‘변명’이

문서 한 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문제는 결국

숫자로 돌아왔다.

세관조사 결과

몇 억 원의 과태료와 벌금이 부과됐다.


며칠을 급하게 조사에 대한 준비를 하며

늦게까지 자료를 만들고 밤도 새우며 일한

TFT구성원뿐만 아니라 나도 너무 힘든

나날이었는데, 아무런 보람도 없었다.


그중 하나는

너무 허망해서 아직도 기억한다.


수입면장 1장.

서고를 뒤지고,

담당자 책장을 전부 뒤지고,

보관철을 다 풀어봤는데도

끝내 찾지 못했다.


최근 자료도 아니고,

아무도 관심을 안 두던

몇 년 전 자료이다 보니

더더욱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 종이 한 장 때문에

담당자 벌금 3천만 원,

회사 벌금 3천만 원이 추가로 떨어졌다.


PDCA의 교훈

역사적 가정이지만,

물류팀 직원이 퇴사한다고 했을 때

회계팀 신입에게 떠넘기듯 하지 않고,

직무경험이 있는 경력직을 채용했으면.


BOM변경 기록관리 담당자의 산더미처럼

쌓인 미처리 서류의 병목현상 해소를 위해

별도 담당자를 추가 채용했으면.


결과적으로, 당시 인건비 몇 푼을 아끼려다

몇 억원의 벌금과 과태료라는 더 큰

회사적 리스크로 돌아온 것이었다.


현업부서의 일이었지만,

역시 맥락은 관리였다.


평소에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업무절차의 오류를 없애는

리스크 관리가 중요했던 것이다.


(소요량)기준을 세우고,

(생산)계획을 만들고,

(생산실적)기록을 남기고,

(기록관리)제대로 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오류가 나면 개선하는 것.


결국, 돌고 돌아
Plan – Do – Check – Action.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프로세스관리와 기록관리가

회사 돈을 지키는 방식이고

회사의 리스크를 방지하는 것이다.


CFO 실전노트 – 한 줄 정리

기록은 귀찮고 불필요한 일이 아니라,
‘회사를 살리는 보험’이고 '제대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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