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없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
회사에는 여러 부서와 팀,
그리고 수많은 경영활동이 있고
그만큼 비용도 끝없이 발생한다.
임원·직원 급여, 국민연금과 4대 보험,
판매관리 복리후생비, 접대비, 지급수수료,
생산을 위한 재료비와 소모품비, 운반비까지
이 비용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기 위해
회계는 ‘계정과목’이라는 수십 개의 칸막이를
만들어 분류하고 관리한다.
계정과목은 ‘재무제표’라는 정해진 양식에
회사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서 넣기 위한
일종의 물품정리함과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PC로 예를 들면,
파일은 끝도 없이 생기지만 종류별로 폴더로
넣어두면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고,
새 파일이 생겨도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가
흔들리지 않는다.
회사의 활동을 정리하는 회계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총무팀이 직원 근무복을 구입하면,
복지 목적이면 복리후생비가 맞는 것 같고,
닳아 없어지니 소모품비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금액이 적으면 ‘잡비’로 밀어 넣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때그때 편한 칸에 넣기 시작하면
회사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돈이 어디로 새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회계에는
기본원칙으로 ‘계속성’이라는 원칙이 있다.
기준을 정하고 매번 같은 칸막이에
제대로 담아 분류해야 찾기가 쉽고,
그래야 월별·연도별 숫자의 변화를
‘균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입사했을 때,
회사에는 그 ‘기준’이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매번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 팀장님은 본사 팀장과 자회사 팀장을
겸직했고, 관계사 업무까지 떠안고 있던
능력 있는 분이어서, 임원 보고나 임원지시가
떨어지면 팀장님은 늘 불려 다녔고,
사무실에서 얼굴을 뵙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사실 능력도 있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는
팀장님과 자주 뵙고 일도 배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팀장님이 바쁘시니 대부분의 일을
사수였던 김과장 지시로 처리했다.
그런데 김과장은 업무에 대한 집중력이나
열정이 없었고 일에 관심이 낮은 편이었다.
부사수인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기보다
일을 “떠넘기는 쪽”에 더 익숙해 보였다.
결국 전표 입력부터 처리까지
김과장의 일까지 떠안는 일이 많아졌다.
마감은 매달 돌아오고,
입력해야 할 전표는 쌓여가고,
손은 빨라졌지만 기준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류들이 반복됐다.
이번 달에는 복리후생비로 잡힌 비용이
다음 달엔 소모품비로 들어가 있고,
어떤 달엔 잡비로 흩어져 있기도 했다.
서무 직원과 나, 김과장이
같이 전표를 입력하다 보니 더 오류가 많았다.
같은 사람이 입력해도
시간이 지나면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팀장님이 가끔 오셔서 자료를 보다가
계정이 오락가락한다고 지적하면,
김과장은 나에게 화풀이를 하곤 했다.
사수로서 기준을 세우려 하진 않으면서,
부하에게 “틀렸다”라고 혼내는 방식.
나는 그냥 속으로만 분을 삭였다.
그런데 동시에 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입력은 내가 주로 한다.
그럼 내가 기준을 만들면 되지.”
나는 작년 치와 올해 치의
전체 회계계정과목 자료를 다운받아
반복적으로 처리되는 비용을
엑셀에 쭉 나열했다.
같은 성격의 비용인데 서로 다른 계정으로
처리된 건 없는지 정렬해서 비교해 보았다.
그렇게 2개년 치를 펼쳐놓고 보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름의 원칙을 세웠다.
“근무복은 복리후생비로 고정.”
“정기 구입 소모품은 소모품비로 고정.”
“애매하면 ‘잡비’로 보내지 말고
다음 달에도 반복될 지부터 확인.”
완벽하진 않아도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혹시 몰라 김과장에게 보고했다.
김과장은 대충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알아서 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동시에 세명에게
공지해서 기준을 통보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기준대로
전표를 입력해 나가기 시작했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였다.
한참 마감을 하고 있는데,
기획팀장님이 우리 쪽으로 오시더니
“요즘 계정이 되게 균일해졌네.”
그 말이 나는 솔직히 기뻤다.
내가 만든 기준이
숫자의 흔들림을 줄였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그때 김과장이 불쑥 나서더니
“제가 계정기준 정립해서 잡아놨어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계정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도 안했고 만들어도 무관심했고
기껏 기준을 잡고도 매번 기준에
틀리게 입력하는 주 범인이 김과장이었다.
틀린 걸 부사수인 내가 지적하고
사수인 김과장이 수정하는 뒤바뀐 모습이
두어달 동안 이어져왔는데,
되려 본인이 기준을 만들어 성과를
낸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철면피같아
보였고 할 말은 많이 있었지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당시 김과장만 그랬던 것 아니었다.
직원들 사이에 자주 돌던 말이 하나 있었다.
“칭찬받으면 내 탓,
핀잔받으면 직원 탓.”
그 말을 그땐 이해하지 못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겪으니 조금 이해가 되었다.
해외영업팀장님은 연구소장을 겸직했었는데
해외에서 수주를 받으면 얼른 임원실로
들고 가 본인이 보고하고 칭찬을 받았고,
해외로 수출한 제품이 불량 나면 직원들을
시켜 보고하도록 하곤 했다.
그렇게 어이없는 회사라는 조직의
검은 속내를 지켜보면서
왜 임원들은 저런 모습을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어린 마음에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시키지도 않은
회계기준을 만들고 비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나에게는 아무런 칭찬이나
격려가 없었고, 김과장은 눈치 보며
정치질을 하는데 왜 윗분들은 그런 것을
모를까 하는 어린 마음에 서운함도 있었다.
나는 그날 또 하나를 배웠다.
‘기준이 흔들릴 때,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계정기준을 세우고 관리는 누가하고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잘하나 못하나를
회사에서 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하는데
일은 내가 하고 공은 김과장이 가져갔다.
이처럼 회사의 모든 일에는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정확하게 정해야 하고
(R&R, Roles and Responsibilities)
이를 기준으로 업무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KPI, Key Performance Indicator)
지금에야 익숙한 단어이지만,
당시의 나는 그 단어가 없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 혼자 서 있곤 했다.
비용에 계정과목 기준을 세우는 것처럼
회사도 책임과 권한의 기준을 세워
조직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