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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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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유 Metaphor Feb 28. 2024

5. 삶의 의미, 삶의 이름

별에 이름을 붙이면 의미가 생기는 걸까?
아니면,
의미가 있는 별이라 이름이 생기는 걸까?



생면부지의 젊은이들이 쭈뼛하게 둘러앉아 멋쩍은 인사를 나눈다. 어색한 문장들을 주고받던 시간은 게 눈 감추듯 빠르게 짙어지고, 자리는 곧 다 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시끌벅적한 어느 옥탑, 울렁거리는 노랫소리. 사람들은 그렇게 내일은 오지 않을 것처럼 두 눈을 맞대고 한데 섞이다, 그러나 해가 뜨면 알았던 적 없는 사람이 되어 각자의 일상을 향한다. 술잔에 깃든 짧은 시간은 마치 쓴 한 모금처럼 농밀히도 속을 데우지만, 그 밤의 의미들은 쏟아버린 한 잔처럼 공기 중으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리는 필경 삶의 의미를 찾는다. 숨 쉬듯 자연스러우면서도 간혹 무용하기 짝이 없기도 한 이 행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지독하게 쫓다가는 매몰되고, 또 그렇다고 영 소원했다간 방황한다.


서른 즈음이 되어 주변을 돌아보면, 같은 나이 또래임에도 마치 어른의 풍채를 풍기는 이가 서 있게 마련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으며, 모든 행위에 당연한 이유가 수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과 행동에서는 이성과 합리의 짙은 향이 난다. 그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들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이미 진작에 정립되고 난 후라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들은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는다.


삶의 의미란 어떤 면에서 진리라기보다는 작위적인 다짐에 가깝다. 마치 이름 짓기와 비슷하달까. 아이가 이런저런 삶을 살기를 바라며 이름을 지어주는 것처럼, 우리는 삶의 매 순간에 어떤 이름을 적는다. 사랑, 부모, 친구, 성공, 혹은 돈, 차, 집···. 이름이 붙은 순간들은 힘을 얻는다. 그 힘들이 쌓여 어떤 형태를 갖기 시작하면 이후는 그것들의 힘에 의해 이끌려가게 된다. 자신이 정한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일관성을 갖기 시작한 사람은 어른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한 편, 순간들에 이름을 붙이는 게 늦어져버린 이들이 있다. 그들의 어릴 적, 누군가가 마음대로 대신 적어버린 이름들. 극복, 생존, 부양, 혹은 병마, 가난, 폭력···. 눈을 떠 보니 이미 주어져있는 그것들을 거역할 방법은 없다. 속절없이 그것들에 이끌려다니다 어느덧 어른의 문턱까지 도달한 이들. 타인에 의해 정의된 삶의 의미, 타인에 의해 지어진 매 순간의 이름들. 어쩔 수 없이 그것들도 이름이기에, 그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그것들을 부둥켜안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사람이 지나쳐갈 때마다 소름이 돋고, 누군가 말을 걸면 식은땀이 흐른다. 타인에 의해 정해진 내 의미의 덩어리들은 그들에게도 사랑받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인정받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우리는 곧 연기를 시작하고, 무대 위에서 가져왔던 의미들이 세상 밖의 거대한 가치관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것들을 모두 게워내고 그 속이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 그리고 그것들이 남김없이 증발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한 걸음을 뗀다. 이제 별에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란 모르겠으니, 의미 있는 별이 되리라는 비할 데 없이 애달픈 길로.




그러거나 말거나, 어른들의 놀이터는 밤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누군가 애써 가리려 한 슬픔들을 싣고, 누군가 차마 전하지 못한 애틋한 것을 매연 삼아 흩뿌리며, 알았던 적 없던 각자의 일상으로 다시 그들을 돌려보내 놓기 위해. 손뼉을 치고 살을 맞대며 천진한 웃음으로 점철된 그 밤의 이름은 술잔이 대신 가져간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사람, 무엇을 한다 했더라. 그 사람, 내게 뭐라 말했더라.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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