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라
- 어느 눈 내리던 날
"눈이다!"
"오, 진짜 오기 시작하네요."
"꽤 많이 오는데?"
"아싸, 남편한데 전 먹자고 해야지."
"하하하. 먹을 생각부터 해?"
"와 방금 번개에요?"
"그랬던 것 같네요."
···.
퇴근이 가까워지자 눈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한 마디도,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눈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첫눈인가. 눈이 오면 항상 듣던 앨범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센티멘탈 시너리의···. 사람들은 눈이 와서 좋은가 보다. 사람들은 기뻐 보인다. 카카오톡 채팅창도 눈이 오는 게 좋은 모양인지 배경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철에 타자, 눈물이 차오른다. 요즘 생긴 이상한 증상이다. 그저 지하철에 타서 음악을 들을 뿐인데, 힙합을 듣다가도, 일렉트로닉을 듣다가도, 밴드를 듣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차오른다. 얼마 전 The Police의 Every Breath You Take가 흘러나올 땐 정말 주체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앞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티슈 몇 장을 건네려던 것을 거절한 적도 있다. 참 기이하지만, 왜 그런 증상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쿠궁, 쿠궁. 노래가 쉬는 타이밍에 이따금씩 기장이 뭐라고 하는 방송 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눈이 오니 무언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가족과, 친구들과, 혹은 연인들과, 자녀들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이물감이 들었다. 나는 눈이 온다고 해서 딱히 함께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자, 그렇게 생각했다. 지하철 안에서 메뉴를 뭘로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눈이 와선지 배달이 되는 곳은 적었다. 결국 주문한 음식은 치킨이었다. 가끔씩 주말에나 한 번씩 시켜 먹던, 특별할 것도 없는, 이제는 값싸지도 않은 치킨.
생각해 보니, 나는 눈을 꽤 좋아하지만 눈이 오는 날에는 나쁜 기억만 있었다. '너는 이 내리는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문장을 쓰게 만든 두 명의 사람과 이별한 날들에 공교롭게도 눈이 왔기 때문이다. 어느 눈이 내리던 날, '상실'을 쓰게 했던 여자도 떠나갔고, 작고 똑똑한 이와 작별한 날에도 눈이 내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집을 떠난 어머니를 맨발로 쫓아 뛰어 진영역까지 달렸던 그날에도 눈이 내렸었다. '옷깃들'이라 표현했던 이들 중 한 명과도 눈이 내리는 날 시간을 함께 했었다. 눈이 내리는 날 나와 함께 있었던 이들은, 지금은 나와 함께하고 있지 않은 셈이었다. 참 신기하네. 생각해보니 그렇네.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 어느새 수유역이었다. 출구로 나가자, 밖은 그야말로 눈의 고장이었다.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어졌고, 늘 출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은 지하철 출구의 계단 안쪽까지 늘어서 있었다. 나는 때마침 꺼내 입은 롱패딩의 모자까지 굳게 쓰고 집을 향했다. 집에 가는 골목길에 퍼진 듯한 오토바이를 붙잡고 씨름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갈림길에서 고개를 들자, 앞바퀴를 맹렬히 돌리면서 제자리에 있는 차도 보였다. 지금이라도 배달을 취소할까. 한참이 지나서 주문이 취소되면 어떡하지. 그럼, 그냥 굶지 뭐.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에 다다르자, 그 노래의 이름이 생각났다. Sentimental Scenery의 November, 그리고 9 Hours였다. 나는 눈발이 날리는 주머니 밖으로 핸드폰을 꺼내 화면 위에서 녹아내리는 눈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치워가며 간신히 두 곡을 재생목록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휴먼레이스의 November도 있었다. November라는 이름을 가진 곡들은 대부분 좋은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참 발자국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말할 수 없이 작고 귀여운 발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공동현관의 월패드 앞에 섰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집에 들어가면 끝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나는 또다시 외로움과 싸워야겠지. 특별한 날 딱히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는 날 원망하겠지.
그래도 들어가야지. 집에 들어가서, 맛있는 치킨 배불리 먹고, 과제를 좀 해야지. 오늘은 일찍 퇴근했으니까, 문제를 두어 개는 풀 수 있겠지. 그리고 널어놨던 빨래를 걷어야지. 눈이 오는 바람에 늦어진 배달을 기다리면서 좀 누워있어야지. 글을 좀 써볼까. 제목은 '눈'이 좋겠다.
잘 지내라, 어느 눈 내리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