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믿어." 한마디의 위력

<씨비스킷>으로 엿보는 신뢰의 경제학

by 오늘도맑음




그는 작지만 강렬하다. (Though he be but little, he is fierce.)



-영화명 : 씨비스킷 Seabiscuit (2003년 11월 개봉)

-러닝타임 : 134분

-한줄 평 : 작고 보잘것 없을 때 믿어주는 용기,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다.




때때로 사람들은 확실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헤매인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이 얼마인지를 확인하고자 자산평가와 공시지가에 목매달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얼만큼의 가치인지를 확인하고자 매달린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는 공평한 시간의 저울추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앞서말한 자산평가처럼 미래의 현재가치화 작업 뿐이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 컬링대표팀의 선전이 보여주듯이) 대단한 성과를 이뤄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성과는 어쩌면 허울뿐인 그림자에 불과한 "가능성"을 믿는 믿음- 신뢰-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으나 그 속에 있는 강렬한 재능을 이끌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발휘하여 미래를 만들어 내온 대단한 역사가 아래 영화에서 그려진다.




말이 작은 상처를 입었다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씨비스킷>은 경주마에 관한 이야기다. 동명의 소설을 영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한계를 뛰어넘는 잠재력과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루저들의 사연을 그려내고 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실패와 슬픔가운데 잠겨있던 세 인물은, “말이 작은 상처를 입었다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건 아니잖아요.”라는 조련사 스미스의 말에 하워드가 감동받은 그 날 밤부터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알아본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그리고 씨비스킷을 잘 이해하면서 경주마로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된다.



배경이 되는 대공황은 거대한 사회적인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여 좌절과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개인적 삶에 사회적 경험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곱씹게 되는 지점이다. 각자 최선을 다해서 그 수렁에서 나오고자 하나, 그들을 마주한 것은 각박한 세상과 쉬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불황이었다. 아들과 아내를 잃은 하워드와, 가족과 눈을 잃은 쟈니, 삶의 터전을 잃은 스미스 역시 숱한 그들 중에 한 명이었다. 각자의 삶조차 돌아보기 어려워, 자식조차 내버려두고 가는 비정한 시기. 이 때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내레이션이 말하듯 자신을 알아봐주고 일으켜 줄” 격려와 칭찬이었다.




이러한 세 인물, 그리고 그들이 달리게 하고자 하는 씨비스킷은, 넘어진 미국경제 자체를 상징 하는 하나의 은유였다. 명마의 혈통을 잇는 씨비스킷이 잠만 자는 게으름뱅이 말이 되어 2000달러에 불과한 가격에 거래되는 현실은, 마치 장기 호황이 지속되고 생산의 혁신이 줄 잇듯 일어났던 미국경제가 휘청거리다 결국 파산 선고를 받은 1929년의 대공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미국경제를 일으킨 것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즉, 댐이나 도로, 수천 개의 터널 공사-이 아닌 자신감이었다고 단언한다. 씨비스킷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전략은 그를 채찍질하고 더 좋은 것을 먹이는 것보다, 그가 명마로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경쟁심과 승부욕을 발현하도록 조건을 마련해주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웠던 장면은, 씨비스킷과 세 남자가 힘을 합쳐서 첫 승을 거두게 된 지점이다. 첫 번째 경기에서 씨비스킷과 쟈니(레드)는 마음에 있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반칙 페이스에 말려 작전 수행에 실패한다. 그러나 하워드는 책망하기보다 화가 가득한 쟈니의 눈을 본다. 그는 자신을 버린 가족들에게서, 그리고 혹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받아야 했던 상처들을 꾹꾹 담아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둔 책들을 버리려고 강에 갔다가 그대로 돌아온 쟈니는 하워드에게 10달러를 빌려달라고 하면서 핑계를 댄다. 그런 자신에게 흔쾌히 돈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든 쟈니의 표정에서 그가 세상을 향한 “신뢰”를 되찾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넘어졌지만 여전히 그를 믿어준다는 사실이 그를 다시 달리게 한 것이다. 그 이후 씨비스킷과 레드는 우승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앞서의 은유에서 빗대어보자면, 루즈벨트의 재정지출확대 역시 10달러를 빌려주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정부지출이 늘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미국경제가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일 것이다.



일백여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씨비스킷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감과 열광이 화면 너머로 느껴지는데, 당시 미국사회가 씨비스킷을 통해 얻은 자신감과 에너지는 대단할 것이었으리라 가히 짐작한다. 10월 24일,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더 이상 미국의 발전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다시 고스란히 경제에 영향을 미쳐 미국은 장기 침체로 가게 되는 길목에 놓여 있었다. 위기자체가 가지고 온 파급보다, 그것이 형성하는 좌절감과 낙인효과가 더 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작지만 강렬한” 씨비스킷은 실패한 각 개인이자 미국경제에 대입되었고, 그가 다시 일어서 달리는 것처럼, 자신들도 회복될 것을 꿈꾸게 한 것이다. 물론 실제 씨비스킷만이 회복의 원동력이었으리라 속단하긴 이르지만, 적어도 낙관적 기대를 형성해서 경제침체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해본다. 덧붙여 마음과 몸의 상처를 똑같이 나눠가진 쟈니(레드)와 씨비스킷의 마지막 경주에서 한계를 뛰어넘는 짜릿한 쾌감과 함께, 오늘날의 또 다른 “씨비스킷”들에게 선사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덧.

실제로 경제학의 테일러 준칙은 민간이 정부를 신뢰하는지 여부에 의해서,

정부의 재정정책의 실제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최적정책의 동태적 비일관성)

즉, 정책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해당 정책이 아무리 적정한 타겟팅과 시점에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목적으로 하는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이 눈에 보이는 실제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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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대학교 <경제사> 수업에 제출한 레포트를 바탕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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