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 아래 사진관'
내겐 고유 명사 같은 이 일곱 글자. 시간 순서로는 미아가 됐던 4살 기억이 먼저지만, ‘최초의 기억’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곳. 오래된 추억 상자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사진처럼 잊고 싶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육교가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 옆 자그마한 사진관.
기억은 흑백 사진처럼 오래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해. 빼곡히 자리 잡은 고만고만하고 낮은 주택들 사이로 모세혈관처럼 길이 흐르고, 길들이 수렴되는 곳에 제법 큰 차도가 있어. 마을 위를 한 바퀴 휘 돌고 난 시선이 육교에 다다르면 서서히 풍경에 색이 입혀지지.
뜨문뜨문 사람이 지나던 육교를 면한 그 인도가 실제로 내가 본 길인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한 것인지, 꿈에서 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기억이 거듭될수록 선명하게 떠올라. 그 길 위를 달리던 나도 선명하게 떠올라.
다섯 살의 내 가쁜 숨이 떠올라.
그날은 엄마가 5일장에서 산 한복을 드디어 꺼내 입었던 날이었어. 엄마는 아침부터 솜씨를 한껏 뽐냈지. 고데기로 내 머리를 올리고, 자줏빛 진주알 모양 귀걸이도 달아줬어. 뛰는 내 발박자에 맞춰 도르르 말아 올린 귀밑머리가 양볼을 간지럽히고, 귀걸이가 달랑거렸어.
멀리서 보던 육교는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공룡 같았어. 공룡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서 아기가 웃고 있었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리를 향해 웃고 있었을 그 아기. 빛이 바래가는 액자 속 아기를 힐끔 바라보고는 온몸에 힘을 주고는 문을 밀었어.
찰캉.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자, 문이 열리고, 문이 닫혔어.
문이 닫히자마자 문 너머 세상이 순식간에 사라진 듯 고요해졌어. 나는 성스럽고 비밀스러운 장소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져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실내를 두리번거렸어. 쇼윈도 창을 통해 들어온 오후 햇볕이 곧은 선을 그리며 가게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빛줄기 속에선 먼지들이 수다쟁이 요정들처럼 분주히 날아다녔어.
낯선 나를 향해 가게 벽에 걸린 액자 속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지. 무표정의 사람, 웃고 있는 사람. 표정들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들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어. 그들과 하나하나 눈 맞춤을 하던 그때,
혼자 왔니?
가게 구석에서 사진사 아저씨가 걸어 나오며 물었어.
아뇨. 아빠가 오고 있어요.
그래, 너도 이상했을 거야. 다섯 살 아이가 혼자서 사진관에 갈 리가 없잖아. 실은 아빠랑 같이 집을 나섰던 거야. 날 꾸민다고 애쓴 엄마는 정작 가게 때문에 같이 따라나서지도 못하고 아빠에게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어. 아빠는 언제나처럼 발걸음이 느긋했기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내가 제멋대로 달렸던 거야.
아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은 뛰고 반은 걸으면서 따라왔었어. 난 달리는 내내 아빠가 뒤따라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앞만 보고 갈 수 있었지. 차가 쌩쌩 달리는 차도 옆을 달리면서도 무섭지 않았어.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그 시선. 특별히 애써 뭔가를 잘하지 않았는데도, 이뤄내지 않았는데도 내 존재 자체를 바라봐주고 지켜주려 하던 그 시선이 지금 너무나 그리워.
찰캉.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아빠가 연 문이 일으킨 바람에 잠잠해진 먼지들이 다시 포르르 날아올랐어.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아빠는 나를 보곤 안심한 듯 숨을 후 내쉬었지.
읏챠.
아저씨가 사진관 구석에서 벤치처럼 생긴 의자를 끌고 나왔어. 빨간 벨벳천이 씌워진 의자는 테두리에 금색칠까지 되어 있어서 진짜 왕족이 앉는 의자 같았어.
가운데로 올라가 볼래?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의자 한가운데에 올라섰어.
오른쪽으로 몸을 조금 돌리고, 얼굴은 카메라 쪽을 보렴. 언젠가 만화영화에서 봤던 금발의 공주님처럼 보이려나. 치맛단까지 손끝으로 올려 잡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생각했어. 어서 예쁘게 찍어주세요.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아저씨가 셔터 누르기만을 기다리던 그때, 그러니까 렌즈와 나를 번갈아보던 아저씨가 하나 둘 셋을 외치고 드디어 셔터를 누르려던 그때.
너, 귀걸이 한 짝이 없구나?
아저씨가 우아한 공기를 깨고 말했어.
얼른 양손을 귓불을 갖다 댔는데 어라, 분명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오른쪽 귀의 귀걸이가 진짜 만져지지 않는 거야. 귓불을 앙 물고 있던 귀걸이가 내 격한 달음질을 못 이기고 떨어져 나가 버린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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