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an 31. 2024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

환대는 삶을 이롭게 하리니

켄 로치(Ken Loach), <나의 올드 오크>(The Old Oak) 

- 환대는 삶을 이롭게 하리니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486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인간은 제 발자취를 돌아보고 정리하며 마무리를 준비한다. 예술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은 생의 막바지에 '은퇴작' 혹은 ‘유작’을 남긴다.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한 창작자의 '세계관'이 응축되어 있기에 진하고도 묵직한 여운을 안긴다. 동시에 예술가들은 마지막 작품에 사활을 걸고 ‘유언’을 남긴다. 이로 하여금 미래에도 자신들의 사유가 작품으로써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에서 미래로 이어질 '나무'를 심었고, 아녜스 바르다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 기존 작품들을 새롭게 '몽타주'하며 제 필모그래피가 늘 새로이 재창조되며 꺼지지 않길 기원했다. 이렇듯 한 예술가의 은퇴작에는 농축된 인생과 사활을 건 메시지가 담겨 있기에 감동적인데, 이젠 영국의 노장 켄 로치가 은퇴작 <나의 올드 오크>를 내놓는다. 여기엔 그가 미래로 이어내고 싶은 불굴의 정신이 녹아있다.    

 

1936년 뉴니튼 태생의 켄 로치는 영국 프롤레타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시네아스트다. 20세기 영국 영화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데이비드 린이나 제임스 아이보리 등 부르주아적이고 귀족적인 시네아스트들은 현실이 만족스러워서 더 아름답고 광대하며 고양된 세계를 꿈꾸었다. 그 곳에서 영웅적 삶을 지향하거나 분방한 연애를 갈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치와 낭만은 귀족에게만 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의 특권적인 계급은 현실이 지루할 정도로 삶이 충만했던 반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현실은 척박했고 결여가 가득했다. 로치는 마이크 리와 함께 심미적인 영국 영화 이면에 내재한 날 것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를 들추어냈다. 로치와 함께 묶이는 마이크 리가 불확정적이고 우발적인 노동자의 삶을 흡사 코엔 형제의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풀어냈다면, 로치는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방해하는 거대한 사회 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로치가 진단하는 사회 구조는 위선적이다. 국민, 특히 약자가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는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복지의 수혜자들은 모순적이게도 복지에 다가갈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복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복지에 도달할 수 없게끔 복잡한 계략이 가득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미안해요, 리키>처럼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한다. <레이닝 스톤>에서 등장하는 가축, 양과 다를 바가 없다. 복지에 접근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서로 연대하고 희생하며 복지를 대신한다. 로치의 비판적인 시선은 경제와 제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나 <숨겨진 계략> 등 영국-아일랜드 관계를 집약하는 '식민주의', '민족주의' 문제도 꼬집는다. <숨겨진 계략>에서는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강력한 국가 영국이 자신의 입맛대로 사실을 왜곡하는, 즉 '현실을 위한 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위한 현실'로 역전된 실태를 고발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개개인간의 우애나 신념 등은 거대한 이념에 의해서 모두 찢겨 발겨진다. 

로치는 자연을 지배하던 인간, 약한 식구를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가부장제가 '인간의 인간 지배',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 및 자본의 인간 지배로 역전되고 있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로치의 영화는 <다정한 입맞춤>처럼 '가장'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영국이 주변국들에게 미치는 여파, 영국을 넘어선 <빵과 장미>처럼 거대한 패권이 약소국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진단한다. 또 부르주아가 형성한 구조는 부르주아의 이권만을 수호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 계급 이동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시작점이 다르다. <내 이름은 조>에서처럼 부르주아의 안온한 가정과 달리, 프롤레타리아는 술과 마약으로 점철된 환경에서 삶을 시작하므로, 양 측이 똑같은 목표를 상정한다 한들 프롤레타리아는 더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로치는 전문 배우를 기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하여 실제 삶을 반영한다. 또한 <케스>나 <다정한 입맞춤>, <앤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 <달콤한 열여섯> 등의 작품들처럼 구조로부터 특정한 '교육'을 받고, 거대한 '가장'을 넘어서야하지만 그럴 수 없는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거대한 지배력이 미치는 여파를 조망한다. 노동계층인 소년들은 로치의 영화 전반에서 너무나 쉽게 '범죄'에 빠져들며, 로치는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비추며, 노동계층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만 축소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로치의 작품 속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여성'을 어머니로 전락시켜서 모성을 강요하고 희생을 짊어주며 해결한다. 

이렇게 처절한 현실을 기교가 전무한 카메라로 담아낸다. 유사한 작품을 선보이는 다르덴 형제에게서 눈에 띄는 롱테이크나 핸드 헬드조차도 로치에게선 불균질하고 투박하다. 즉 형식을 최소화하여 프레임 안에 담긴 것에의 집중만을 요구하는데, 그렇게 집약된 시선은 구조의 착취와 더불어 '혁명'을 바라본다. <앤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서는 부르주아가 만든 법을 지키지 않고 노동자의 몫을 쟁취하며,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음해하고 갈라놓는 현대 사회에서 <빵과 장미>처럼 '연대'를 부각한다.    

  

하지만 로치가 꿈꾸던 혁명과 연대는 과거 어느 순간에 멈춰 서서, 현재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써 약자들의 삶도 불완전하게 멈춰 섰다. 그들의 시선은 무기력하게 정지된 ‘사진’에 잠겨 이동하지 못하고 있다. 도입부, 때는 2016년이요 공간은 영국 북부로서, 시리아 난민들이 내전을 피해 유럽에 도착했다. 이윽고 하얀 내지인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힌다. 백인들은 버스에서 하차하려는 난민들을 방해한다. 그 현장은 영화와 비교했을 때 '운동'이 거세된 사진에 담긴다. 그나마 사진과 사진을 연결하는 '슬라이드 쇼'에 의해서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운동이 부여된다. 또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에 의해서 둘 사이의 이동을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 간헐적인 운동마저 허용하지 않으니 난민들의 이동, 곧 움직이는 삶은 매끄럽지 못하다. 자꾸 정지되고 끊긴다. 또한 사진은 간헐적이고 불완전한 증거다. 영화가 갓 시작했을 때, 이미지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다. 감상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혐오가 들끓는 청각뿐인데, 그것만으론 난민을 향한 혐오를 온전히 입증할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 야라(에블라 마리)는 사진을 찍는다. 운동이 거세된 불완전한 삶이자 증거, 그러나 이마저도 백인들은 박살낸다. 이로써 난민들은 생을 증언할 수도, 삶을 이어갈 수도 없는 난관에 빠진다.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난민의 삶뿐만이 아니다. TJ(데이브 터너)가 운영하는 술집, ‘올드 오크’의 뒷방에는 1970년대의 마을을 촬영한 흑백 사진이 보존되어 있다. 액자 속엔 마가렛 대처에 대항하여 탄광과 노동권을 수호하고자 했던 광부들의 열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TJ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실패했다고 쓸쓸하게 말한다. 이후 광부, 곧 노동자의 지위는 급속도로 추락했다고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 역사 또한 동일하다. 학자 아미타브 고시는 석탄에서 석유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노동자의 권리를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석유에 비해 석탄은 채굴과 운송을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에 자원이 노동자에게 분배된 반면, 석유 접근권은 극소수로도 충분하였기에 노동자들에게 자원이 분배되지 않아 민주주의가 약화되었다고 말이다. 즉 노동자들의 권리 또한 대처 집권 이후의 신자유주의에 가로막혀 그 당시에 얼어붙어 있다. 사진 자체도 멈춰있고, 굳게 닫힌 뒷방에 갇힌 사진은 감상자에게로 이동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현재 올드 오크에 방문하는 백인들한테 그 당시의 관용이나 연대를 조금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로치는 낙담하지 않고, 약자들이 빼앗긴 운동을 차츰 회복해간다. 마을의 불한당 로코(닐 레이퍼)는 야라(에블라 마리)의 카메라를 빼앗고 박살낸다. 이로써 야라와 가족이 겪었던 핍박이 외부로 이어지지 못하게, 현재의 삶 역시 기록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행히도 TJ가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주는데, 이후 영화에선 카메라 워킹이 늘어간다. 도입부의 카메라는 출발 지점에 정박해있었다. 야라를 위시한 난민들이 백인의 방해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TJ가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주고 연대하며, 그녀가 현실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게 되자 ‘트래킹 숏’이 사용된다. 야라는 능동적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한데 모아 슬라이드 쇼 형태로 마을 주민들에게 소개한다. 타인은 고사하고 야라 자신한테도 이동하지 못하던 사진이었지만, 이젠 타인들의 눈을 거쳐 광활하게 이동한다. 즉 로치는 사진과 카메라를 이용해서 삶의 동의어는 ‘이동’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대 또한 나와 타인간의 이동이다.     


하지만 그 이동이 여의치 않다. 야라의 가족을 난민으로 전락시킨 시리아 내전은 시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리아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권, 즉 ‘지배’의 결과다. 거대한 힘은 시리아 국민들을 강제 이동시키거나, 야라의 아버지를 한 방에 100명가량이 북적거리는 교도소에 가두어 이동을 제한하고, 심지어 조금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사형'을 집행한다. 강제 이주 이후에도 자신보다 더 큰 힘과 지위를 가진 영국인에 의해 난민의 이동권은 제한된다. 물론 영국 내지인 중 '프롤레타리아'의 사정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마을에 살지도 않는 ‘부르주아’들이 빈집을 헐값에 매수하여, 실거주자인 내지인들에게 비싼 세를 매겨 이익을 챙긴다. 영국 내에서도 부르주아에 의해 프롤레타리아의 움직임이 제한 및 규제된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삶은 남성 노동자보다 열악하고, 심지어 난민들과 별 차이가 없다. 이주한 난민 학생들이 운동회에서 완주하는 반면, 미혼모의 자녀인 린다는 ‘달리기’를 마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또 집밖을 아예 나오지 못하는 ‘은둔형 여학생’들이 언급된다. 남학생들이 야외를 활보하는 것과 딴판이다. 

그렇다면 약자들은 강자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이동권을 되찾아야 할지다. 하지만 로치가 영화 후반, TJ에게 "절대 위를 안 보고 아래만 보며 원망한다."라는 대사를 직접 내뱉게 만들듯,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가 아닌 난민들이 제 몫을 빼앗아갔다는 피해의식에 매몰되어 있다. 난민들이 무상으로 얻은 숙소나 식료품, 옷가지, 자전거가 실은 자신들의 몫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은 난민과 비교해서 처지가 낫다 못해 오히려 기득권에 가깝다. 집값이 떨어지긴 했어도 최소한 집은 자가요, 번 돈을 맥주로 죄다 탕진하긴 했지만 여전히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혐오와 조롱을 배설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또 이들에게 쓸모가 없는 물건들을 기부 받아 난민들에게 건네준다. 그런데도 쓸모 있는 것을 착취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쓸모없는 것을 지닌 난민을 혐오한다.


로치는 약자끼리 연대는커녕 되레 분열하는 참담한 형국을 '맹견'이라는 상징으로 가시화한다. 영화에선 영국에서 개량한 맹견, '핏불'이 등장한다. 영국 ‘순종’이라 말할 수 있는 핏불은 백인 청년이 기르고 있으며, 길거리에서 TJ가 기르는 '잡종' 마라와 여성 린다를 위협한다. 이후 핏불이 재등장했을 땐, 기어이 마라의 목을 물어뜯어 살해한다. 맹견의 주인들은 마라를 능욕하는 이미지를 SNS에 게시하고, 야라의 남동생까지 학교에서 폭행한다. 뿐만 아니라 약자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올드 오크 뒷방의 수도와 전기를 망가뜨린 사람들 역시 맹견이 상징하는 영국인이다. 맹견이 살해한 마라라는 이름의 의미가 ‘서로 지켜주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하면, 영국 순혈 남성들에 의해서 사회의 우애가 깨지는 것이다. 그 맹견들은 주인이 목줄을 잡아당겨도 통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빅(크리스 맥글레이드)은 조카의 폭력을 정당화하려, 그들의 책임과 죗값을 난민들에게 전가한다.     

이 맹견들은 백인과 난민들을 분리시킨다. 단순 분리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난민들을 철저히 고립시켜 얻어낸 자리를 자신들이 꿰찬다. 이에 약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닫힌다. 직접적으로는 기득권이 문을 가로막기에, 간접적으로는 집밖에 나온 난민들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하차하려는 난민들을 방해하는 도입부, 린다의 어머니가 야라를 집에서 내쫓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난민들은 백인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빈집에 머물거나, 오히려 린다를 돕기 위해 방문한다. 그럼에도 백인들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있고, 자신들의 공간이 모자라다는 역차별을 운운하며 TJ에게 뒷방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다. 정작 백인들이 인종 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올드 오크는 이미 보장된 반면, 약자들이 머물 수 있는 교회홀과 같은 공공장소는 현재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즉 약자는 어디도 갈 수 없고, 백인은 어디든 갈 수 있다. 로치는 이를 연출에 반영하는데 백인/난민, 남성/여성이 철저하게 분리된 ‘프레임 구성’이다. 난민과 여성이 백인 남성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은 영화에서 엄격하게 금지된다. 정작 백인 남성은 난민과 여성의 세계에 너무나 쉽게 발을 내딛고 침입한다. 로코가 야라의 가방을 마음대로 뒤적이며 카메라를 빼앗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프레임은 통합되지만, 거기서 난민과 여성은 폭력적인 대우를 받으며 백인 남성에 의해 지배 및 재설정된다. 그것은 흡사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열강들의 영향력과도 같다. 즉 로치는 프레임 구성을 통해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침입이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장됨을 암시한다. 

그래서 로치는 닫힘과 침입이 아닌, 열림과 방문을 긍정한다. TJ는 백인만을 위해서는 뒷방을 개방하지 않는다.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무상 공간으로서 뒷방을 연다. 이후 그곳을 리모델링하는 장면에서 백인 남성과 난민 및 여성들이 놓인 프레임은 처음엔 분리되어 있었지만, 이윽고 서로를 환대하며 조화롭게 뒤섞인다. 낯선 서로를 긍정하며 통과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된다. 존재하던 것을 존재할 수 없게, 새로운 것을 더할 수 없게 막아서는 침입이나 봉쇄와는 딴판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뒤섞이며 과거에 머물러있던 뒷방은 다시 활기를 띠고, 각자의 재능과 음식을 나누며 약자들의 삶은 서서히 위로 상승한다. 


즉 로치는 '타자간의 교류'가 무언가를 '더한다'라고 치열하게 말한다. TJ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졌을 때 해변에서 마라를 만났고, 그 덕분에 자살하려는 마음을 단념했다. 이후 마라를 잃었을 때 야라와 그녀의 어머니가 위로 차 음식을 들고 방문하며, 야라 가족이 아버지를 잃었을 땐 무수한 마을 주민들이 조문하러온다. 내게 소중한 것은 유한한 세계에서 항상 유실되고, 이에 삶의 목적을 잃곤 한다. 그런 와중에 방문을 열어두고 타자를 환대하거나 초대에 응할 때 다시금 소중한 것이 채워져 삶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 로치의 지론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 무슬림의 집에, 동시에 무슬림이 대성당에 상호 방문해야 한다. 또 야라는 영어와 아랍어를 ‘통역’하며 엄마와 TJ를 연결해주듯, 서로는 상대가 통과할 수 있는 ‘통로’여야 한다.     

그러나 아흔 살을 바라보는 노인 로치는 동시에 시름하고 절망한다. 영화 속 TJ는 로치 자신과 쏙 빼닮았다. 올드 오크의 뒷방을 개방하여 약자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모습이, 일생 내내 약자가 머물 수 있는 숏과 스크린을 구성하던 로치와 별 차이가 없다. 분명 로치는 자신의 작업에서 희망을 본다. 여성과 노인, 아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장소를 마련하고, 이로써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장소가 자기연민에 빠진 특권층 백인에 의해 파괴되고, 영화의 결말에서도 수리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한국어 제목에는 '올드 오크'를 '나의'가 수식하고 있는데, 여전히 백인만 '나의'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TJ는 절망하는데, 그 심정은 일평생 약자를 위한 영화를 찍었어도, 여전히 혐오가 들끓는 영국과 전 세계를 응시하는 노장의 한탄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예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올드 오크를 백인들이 되찾았다며 떵떵거리고, SNS에 혐오 표현을 배설하는 인파보다 훨씬 많은 주민들이 야라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서 모여든다. 이후 더 많은 군중이 난민이 리뉴얼해준 올드 오크 엠블럼을 들고 힘차게 행진한다. 이로써 백인만의 '나의'가 아니라, 약자와 타자를 포함한 모두가 '나의'에 자신을 투영한다. 즉 로치의 유언, 곧 그가 죽은 이후에도 사회가 기억하길 바라는 정신은 바로 '이방인 간의 화해'다. 배척하며 밀어낼 때, 특히 약자들이 밑을 내려다보며 서로 다툴 때, 삶은 끈적거리는 진탕에 빠진다. 그러나 초대하고 방문하며 화합할 때, 누군가는 사회에 이바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굶주린 배를 채운다. 이 유언을 묵묵하게 낭송하는 로치는 마지막 작품에서도 영화적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죽고 나선 제 작품을 오독한 사람들에게 항변할 수도 없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더 직설적으로 화합의 힘을 역설한다. 세련된 형식, 실험적인 연출, 감상자의 흡입력을 자극하는 사건도 없는 투박한 작품, 그러나 노장이 사활을 걸고 필사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고 날카롭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파르 파나히, <노 베어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