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만 발병되는 망상장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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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은 꿈에도 나타났다.” -아니 에르노-
1848년, 모스크바에서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태어났다. 명망 있는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안토니나, 정작 그녀는 일생 내내 계급의 특권을 누리진 못했다. 명성은 있었지만 가난했고, 남편을 극도로 미워한 어머니는 그를 닮은 자녀에게 사랑을 나눠주지 않았다. 그래서 안토니나는 유년기의 결핍을 결혼으로 보상받길 꿈꿨고, 이후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표토르 차이콥스키’와 혼인에 이른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 그녀와의 결혼은 성지향성을 은폐하기 위한 술수일 뿐이었기에, 안토니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녔다. 끝끝내 차이콥스키는 이혼을 기도했고, 반면 안토니나는 생의 마지막 동아줄로 여긴 그를 광적으로 집착했다. 그들의 진절머리 나는 결혼 생활은 차이콥스키가 사망하면서야 겨우 막을 내린다. 비밀을 숨기기 위한 결합, 유년기의 애정결핍을 보상받기 위한 혼인, 결혼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였던 두 남녀의 관계를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신작 <차이콥스키의 아내>에서 영상화한다.
1969년 로스토프 온-돈 출생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와 함께 동시대 러시아 영화를 선도하는 시네아스트다. 동세대 감독, 즈비아긴체프의 냉정하고 차가운 리얼리즘과 달리 세레브렌니코프의 연출은 기교적이고 현란하다. <비트레이얼>을 제외하면 세레브렌니코프는 예술만이 선보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형식을 구사하며, 감상자에게 극도로 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레토>, <페트로프의 감기>에서 푸티지 인서트, 화면비 변화, 일러스트 등의 다채로운 연출은 러시아 체제 너머의 자유라는 비가시적인 열망을 가시화한다. <스튜던트>의 리드미컬한 미장센은 주체 못할 광기로 악순환되는 동시대 러시아의 종교·정치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그는 늘 감각적이고 탐미적인 대중문화와 일련 타협하지만, 욕망과 폭력마저 무절제하게 풀어놓는 대중매체를 마냥 긍정하진 않는다. <플레잉 더 빅팀>과 <페트로프의 독감>에선 대중매체에서 무한 복제되고 송출되는 범죄, 피가학적인 욕망, 개인주의로 오해된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실제를 그럴듯하게 닮은 대중문화가 현실을 교란하는 세태를 세레브렌니코프는 경고한다. <플레잉 더 빅팀>의 마초주의와 세대갈등의 재생산도 그렇다. <페트로프의 감기> 결말은 다시 도입부로 되돌아가 '환각의 여정'이 반복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의 관점으론 현실에 대응된다고 믿는 허구가 실제에 쉽게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튜던트>와 <레토>에서 모방은 중단된다. <스튜던트>에선 꼼꼼하고도 세밀한 성경 연구, <레토>에서는 저항정신과 자유를 희망하는 노래가 체제의 대중문화 선동에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데 진정 자유로운 예술 역시 현실에 쉽게 적용될 수 없다. <플레잉 더 빅팀>에서의 모방 범죄, <스튜던트> 속 독재 정권과 결탁한 종교가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는 아주 매끄러운 롱테이크로 현실과 일치하는 반면, <레토>에서 KGB의 검열을 의식하는 빅토르 최의 일대기는 파편적이다. 예술은 진실을 비추지만, 동시에 위태롭게 ‘위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위반은 ‘금기시된 욕망’에도 적용된다. <비트레이얼>에서 배우자가 불륜을 하고, 이후 불륜 대상의 배우자끼리 만난다. 정보를 공유 받던 관계는 욕망 관계로 이탈하는데, 위반의 ‘본능’을 현실적인 연출, 즉흥적으로 엄습하는 자연적인 특성으로 보여준다. 외에도 <스튜던트>에서의 아슬아슬한 동성애, <레토> 전체를 관통하는 예술혼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위반은 세레브렌니코프 자신의 삶에도 반영된다. 그는 당국의 요청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예술가로서 푸틴 체제에서 적지 않은 탄압을 당해 현재는 러시아를 망명한 상태로, 그 실제 삶 역시 영화에 반영한다. <레토> 후반부 작업 중 체포당해 구금된 그의 상황이 패배주의에 빠져 무력하고 침울한 후반부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럼에도 <스튜던트>에서 거짓과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못질’처럼 일반적 거짓 속에서 늘 진실로 향한다. 이러한 그의 신작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레토>에서처럼 ‘예술가의 일생’에 주목하고 여기에 <비트레이얼>의 ‘치정극’을 뒤섞는다.
본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차이콥스키(오딘 룬드 바이런) 생전에 안토니나알리오나 미하일로바)는 이혼을 한사코 거부하며 관계가 개선될 수 있으리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모든 조건이 안토니나에게 불리했지만, 일단 그가 살아있고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니 ‘차이콥스키의 아내’로 불릴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망자가 된 차이콥스키가 벌떡 일어나 “저 여자는 왜 왔어? 난 당신이 싫어”라며 그녀를 힐난한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으로 안토니나가 아내로 불릴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말소된 것이다. 그의 목숨은 ‘신’이 앗아갔고, 그 절대자만이 이혼을 선고할 수 있다고 안토니나는 내내 주장해왔다. 그런데 안토니나는 그 전능자가 갈라놓은 관계마저 부정하는 듯, 이후 영화는 '플래시 포워드', 곧 과거로 되돌아간다. 끝끝내 본 작품은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이후엔 도입부의 장례식으로 되돌아가 다시 플래시 포워드되며 ‘뫼비우스의 띠’를 이룰지어다. 근작 <페트로프의 감기>에서도 결말에서 도입부로 되돌아가는 구성을 취했듯, 안토니나도 영영 과거와 망상 속에 잠길 것이다.
그 이유는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내여야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까맣게 지워지기에, 그녀는 상상과 회고의 루프에 갇힌다. 안토니나는 장례식 참석에 앞서 ‘미망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계획을 세웠고, 숏에 독립적으로 위치했었다. 그런데 정작 장례식에서 무수한 인파의 시각과 발화로 가득 찬 롱테이크-롱숏에서 돌출되지 못한다. 야외에서는 안개, 실내에서는 어둠에 잠식된 안토니나는 상복을 입은 수많은 조문객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부군의 장례식에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본격적인 플래시 포워드가 시작된 이후에도 안토니나는 대체로 어둔 곳에 위치한다. 어두컴컴한 것을 넘어서 '비'까지 내린다. 차이콥스키가 공연을 마치고도 그녀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사샤(바르바라 슈미코바)가 안토니나에게 차이콥스키는 네가 생각하는 남편이 아니라고 충고할 때, 결말에서 차이콥스키가 콜레라로 사망했을 때,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안토니나가 원하는 모습을 씻겨내고 그녀를 흐리게 만든다.
어둠 속에 파묻힌 그녀는 늘 주체성이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녀는 “시집이나 가는 게 남는 장사”인 당대 성 역할 및 관행을 거부한다. 자신이 경제적 손해를 입더라도 욕망에 충실한 결혼을 선택하며, 남자보다 높은 자리에 선 후견인, 여교장으로 우뚝 서고 싶었다. 자아를 따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더더욱 흐려지는 것이다. 이런 그녀가 연회에서 차이콥스키를 만난다. 안토니나가 거주하는 누추하고 열악한 환경과 달리, 당대 유럽 문화의 메카 ‘파리’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차이콥스키의 연주회는 아주 환해서 모든 것이 잘 드러난다. 거기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동양에서 수입된 부채를 펄럭이고, 아주 아름답게 개량된 '품종견'들이 눈을 밝힌다. 또한 연회에선 음악이나 춤 등 각자 원하는 것들이 자기만의 숏을 점유한다. 시대 속에서 안토니나는 여성이 음악가로 성공하기 참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안토니나는 연회를 밝히는 자, 차이콥스키를 발굴하고 후원하며 음악가로서 욕망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고 싶었던 것일 지다. 더욱이 그녀는 난생 처음 제 '육체'의 지시를 솔직하게 따르며 차이콥스키에게 적극 구혼한다. 연애편지를 쓰고 보호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쪽이 안토니나다. 이렇게 욕망을 따르는 안토니나는 자욱하던 어둠을 몰아내며 뚜렷하게 우뚝 선다. 안토니나가 음악원에서 차이콥스키를 몰래 흠모하며 쳐다볼 때, 날카롭고 환한 빛이 감상자의 동공을 찌를 기세로 흠뻑 쏟아지며 그녀는 명료해진다. 차이콥스키가 사샤에게 쓴 편지를 아직 읽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안토니나의 곁으로 돌아올 거란 '희망'이 잔존할 때 불이 켜진다. 망상 속 식당에서 차이콥스키와 재회할 때도 촛불과 횃불이 자욱하다.
이 빛은 차이콥스키의 유/무로 결정된다. 안토니나는 자신을 따르면서도 타인을 필요로 하는 이중적인 욕망에 손을 뻗기에 불꽃은 늘 불안정하다. 차이콥스키 본인도 아닌, 그가 보낸 하잘 것 없는 편지 한 장에 빛과 어둠이 결정될 정도다. 그런데 차이콥스키 없이도 한 차례, 빛이 아주 충만했던 씬이 있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음악원에서 배운 피아노 연주를 사샤의 자녀들에게 뽐낼 때다. 즉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여성은 제 잠재력으로 충분히 빛날 수 있지만, 당대의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광명을 자기 내부가 아니라 남성에게서 찾도록 강제한 시대였다. 그 시대가 안토니나에게 지독한 집착을 발현시킨다.
하지만 그들한테도 여성이 찾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원에서 입으로는 ‘해돋이’를 말하면서도, 정작 문을 쾅 닫으며 안토니나의 동공에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해버리는 자가 차이콥스키다.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남성들에게 여성은 도구이지 결코 태양이 못된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의 '재력'에 눈독을 들이고, 또 게이로서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도구로 삼아 결혼했다. 이후 안토니나의 집착과 기대 이하의 재력에 실망하며 신경쇠약에 걸리자 그녀와 상의도 없이, 이혼을 툭 통보한다. 소송을 할 때, 변호사 실리코프(블라디미르 미슈코프)는 안토니나가 원치 않는데도 합의를 강요하거나, 그녀 곁에 매달리며 동거한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에게 매달리며 이혼을 부정할 땐 그녀의 따귀를 때리고, 결국 안토니나는 실리코프의 아이를 세 번이나 출산한다. 요절한 남편의 자리를 대체하여 '가장'이 된 어머니(나탈리아 파브렌코바) 역시 딸들을 멍청하게 여기며 자신의 자존감을 드높이는 도구로 착취한다. 리자(예카테리나 에르미시나)가 안토니나에게 말을 붙이려고 해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듯 말꼬리를 툭 자르며, 대신 자신이 말을 덧붙인다. 공격적으로 날이 서 있는 그녀 앞에서, 기가 센 안토니나를 제외한 딸들은 소극적으로 주눅이 들어있다.
안토니나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부당한 가부장제를 극복해보려고 몸부림쳤다. 실질적인 가장인 어머니가 동의는커녕 신랄하게 무시하더라도 꿋꿋하게 차이콥스키와의 혼인을 주도한다. 그가 내던진 이혼서류에 서명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보려 했지만, 여권이 낮았던 당시에 그녀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세레브렌니코프는 안토니나가 맞닥뜨린 현실을 '스토커'가 따라다니고, '화마'가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묘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낙담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내면, 곧 꿈과 망상으로 도피한다. 즉 여성이 주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출구가 가부장적인 현실에 전무하니, 지독한 망상 장애가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남성은 내면이 아니라 외부를 바라볼 수 있다.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와 사진 촬영을 할 때, 그 현장이 갑갑하다는 듯이 자꾸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가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들, 곧 ‘현실’을 응시한다. 그는 ‘제 4의 벽’을 뛰어넘어서 현실을 개척할 수 있다. 실제로도 차이콥스키는 별거 이후 음악가로서 순풍을 탄다. 반면 안토니나는 실리코프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들을 모조리 고아원에 보내는 등 현실을 부정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빈자리’에 차이콥스키와의 만남이란 허상을 채워 넣는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와 밀회를 갖는 가상의 롱테이크는 현실의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영화의 1초는 현실에서도 1초다. 그런데 영화 내 현실을 반영한 롱테이크는 되레 가상적인데, 길고 긴 시간을 한순간으로 축약하기 때문이다. 안토니나가 차이콥스키를 기다리는 기차역, 그로부터 진실을 전해들은 사샤의 집, 떠맡고 싶지 않은 실리코프의 장례식 등 안토니나가 원치 않는 순간에 사용된다. 그녀는 ‘디졸브’까지 동원하여 몇 시간, 며칠씩 걸리는 방대한 시간을 한 순간으로 압축한다. 끔찍한 현실의 시간을 가상화하여 단번에 몰아낸 이후, 현실과 유사한 시간성을 갖춘 망상적 롱테이크를 대신 채워 넣는다. 차이콥스키와의 재회와 키스, 가족사진 촬영 등은 사실과 정 반대지만 시간의 흐름만큼은 정상적이기에 감상자가 혼동하기 쉽다. 이 상상은 현실의 재료에서 비롯됐기에 사실처럼 호도된다. 차이콥스키의 콘서트, 그와 함께 찍은 사진과 결혼반지, 그의 생존 여부 등이 소재다. 그런데 안토니나는 화재로 반지를 유실했고, 차이콥스키도 사망한다. 망상의 재료조차 모조리 빼앗긴 그녀가 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무한한 플래시 포워드의 굴레인 것이다. 그녀는 ‘있을 미래’가 아니라 ‘있었던 과거’에 갇힌다. 망상 장애에 빠진 그녀들은 시간을 개척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상상 속에서도 안토니나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간절함에서 피어난 현실 도피적인 상상은 끔찍한 진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가 아주 위대한 음악가인지도 몰랐다. 또 니콜라이(미론 페도로프)와 사샤가 차이콥스키의 성 지향성을 직간접적으로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고개를 휘젓는다. 심지어 안토니나의 얼굴과 쏙 빼닮은 성당 앞의 광인은 "죽은 그의 아내가 바로 나다"라며 그녀의 미래를 예언한다. 실제로 안토니나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지만,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상상 속의 남자'의 마음이 자신과 같을 거라 속단하며 파멸의 길을 걸었다.
물론 안토니나가 구원으로 여긴 결혼이 무언가를 내어주기는 한다. 결혼 직후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행 열차에 올라탄다. 기차 안의 ‘복도’는 좁고, 부부가 머물 ‘객실’은 넓다. 후자가 결혼의 대가다. 그런데 객실은 쾌적하고 편하긴 하지만 부부의 마음을 조금도 달래지 못한다. 차이콥스키에게 진정 좋은 곳은 좁아서 남성들 간에 스킨십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복도다. 이로써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차이콥스키는 안토니나를 객실에서 외롭게 한다. 널따란 공간엔 공허만이 가득하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걸을 때도, 부부가 나란히 걷는 장면은 '렌즈 플레어'가 번쩍이기에 신비롭고 아름다우나, 정작 차이콥스키는 함께 있고 싶은 음악원 남성 동료들과 멀어지게 된다. 그들의 결혼식은 분명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일까? ‘동전’, 결혼식의 ‘꽃가루’ 등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엔 역부족인 쓸모없는 것만 잔뜩 이다. 결혼반지는 반짝이지만 차이콥스키의 손가락에 도무지 껴지질 않는다. 고통스러운 그들을 바라보는 하이앵글, 곧 안토니나가 누누이 외치는 절대자의 시선에서나 아름답다. 그 절대자는 안토니나의 기도에 응답하여 차이콥스키를 불러왔다. 동시에 그 현장에서 ‘소나기’로 답하였다. 절대자는 안토니나의 욕망을 씻겨내는 것이다. 신께선 그들이 희생을 자처하며 바란 보상을 내어줄 마음이 전무하다.
그래서 세레브렌니코프는 기대한 구원을 보여주지 않거나, 그저 '가상'으로 처리한다. 차이콥스키와의 성관계를 시도하지만 그는 되레 안토니나의 목을 죈다. 기차역에서 차이콥스키가 도착하길 바랐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구원은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안토니나는 유산으로 상속받은 숲을 팔면 차이콥스키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녀가 아는 것은 그림 속 숲이다. 그림은 현실과 대응하지 않아서 안토니나는 생활비를 조달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와중 파리가 윙윙거린다. '부부'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속내는 부패했다는 듯이. 차이콥스키 역시 그가 기대한 안토니나는 없다. 빈곤한 안토니나는 넉넉하게 후원해줄 수 없고, 하녀를 모함하고 음해하여 자신에게 비싼 피아노를 선물한다. 하녀를 해고한 직후 연주할 때, 그리고 사진 촬영 직전에 연출은 핸드 헬드로 급변하여 덜덜 떨린다. 핸드 헬드를 발생시키는 불안정한 경제력, 거짓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다만 우아하고 안정적인 트래블링 숏으로 위장할 뿐이다.
이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꿈으로 도피하게 되는 안토니나의 의식을 세레브렌니코프는 특유의 혼란한 연출로 가시화한다. 망상이 현실을 기어코 잡아먹는 후반부의 휘몰아치는 연출이 발군이다. 외에도 색감이나 음악 등 모든 형식이 풍부하게 흘러넘치며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그녀의 의식을 가시화한다. 다만 영화에서 ‘정교회’ 역시 망상의 기원으로 계속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해악을 상세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이로써 140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을 빼먹은 듯한 찝찝함을 남긴다. 덧붙여 파리가 왱왱거리는 상징은 저차원적이고 또한 안토니나의 절망을 승화한 클라이막스는 그저 오페라를 그저 안일하게 촬영해놓은 영상에 그친다. 곧 안토니나라는 여성의 출구를 굳이 영화로 가시화해야 할 명분을 잃었다는 말이다. 즉 세레브렌니코프 이전 작품들에 비해 내적으로 다소 빈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