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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9. 2024

아그네츠카 홀란드, <푸른 장벽>

서로에게 빛이 되어라

아그네츠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 <푸른 장벽>(Green Border) 

- 서로에게 빛이 되어라    

green border: 장벽이나 울타리 등의 엄격한 경계선과 달리, 초목이 우거져서 국경이 희미해진 지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인 경계가 엄격한 출입 기준을 요구하거나 자격을 따져 묻는 것과 달리, green border는 감시가 삼엄하지 않기 때문에 경계를 합법적으로 넘나들 수 없는 사람들이 몰린다. 다시 말해 green border는 ‘자유롭고 느슨한 경계’를 의미하기에, 유럽 연합에선 가입국 간의 자유로운 드나듦을 green border에 빗대기도 한다. 그러나 유럽 연합의 green border는 단지 불운해서 국적이나 비자 등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배태하기에, green border의 원 의미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동명의 신작 <푸른 장벽>에서 유럽에서 이중적으로 사용되는 green border를 탐구한다. 시리아 난민들의 급박한 삶을 비추며…     


1948년 바르사바 태생의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폴란드의 영화감독이다. 홀란드는 폴란드 작가주의 영화 계보 중 '도덕적 불안의 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인데, 해당 사조는 폴란드 공산당의 고압적인 독재에 반발하며 탄생했다. 이에 도덕적 불안의 세대에 속한 시네아스트들은 검열에 저항하고 진실을 비추며 정권을 비판하는 영화를 연출해왔는데, 홀란드 또한 리얼리즘을 지향하며 사회 참여적인 영화를 일평생 연출해왔다. 

홀란드는 폴란드를 넘어 전 세계를 누비며 2차 대전이나 소련의 홀로도모르 등 거대한 권력에 의해 은폐되는 중요한 문제라면 무엇이든 다뤄왔다. 폴란드 공산당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가득한 국가 권력의 압제를 ‘어둠’에 비유하며 말이다. 이 어둠 속에 숨은 진실을 비추고자 그녀는 카메라를 들이민다. 홀란드의 대다수 작품에서 밤, 그늘, 지하실, 하수도 등 어둠이 가득한 시공간이 반복되고, 거기엔 핍박받는 약자나 소수자, 타자들이 숨어있다.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가부장적인 전쟁에 의해 학대당하는 여성들, 국가 폭력에 의해 숨은 정치범 등이 바로 이 어둠 속에 은폐된 대상이다. 홀란드는 개개인의 사사로운 탐욕과 욕구 때문에 희생양을 보이지 않게 몰아넣고 착취하는 세태를 엄정하게 비판한다. 

이들을 어둠 속에서 발견하는 카메라, 곧 어떤 '시선' 역시 당대의 이념에 절여져있는 상태다. 그래서 홀란드는 어둠 속에 파묻힌 인물들을 절대적으로 선하다거나, 마냥 매력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인격적 결함이 그려지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적합한 이념을 반성한 이들을 빛으로, 곧 삶으로 인도한다. 그녀는 반성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것이다. 그들의 카메라가 어둠을 몰아냄으로써 드러나는 것은 출산이나 아기, 숨소리 등이요 그것이 바로 해방되어야 할 빛이다. 이렇게 홀란드는 영화의 채도나 명도를 세밀하게 조정하여 빛과 어둠으로 상황을 가시화하는데, 신작 <푸른 장벽>에서도 홀란드는 어둠 속에서 인간성이란 명도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홀란드는 분명 이 세계의 명도와 채도를 밝게 조절하고 싶어 하는 시네아스트다. 그녀는 영화로써 빛이 들지 않는 현실의 사각지대를 늘 밝혀 왔다. 그런데 일평생 횃불을 들고 영화를 찍어온 홀란드의 의지를 무색하게 만들 듯, 본 작품의 도입부에선 오히려 빛이 꺼진다. <푸른 장벽>의 시작은 분명 컬러였다. 하양과 검정에 더해 그 사이의 회색만을 허용하는, 그만큼 이분법적이고 제한적인 흑백과 달리, 컬러는 빛의 무한한 스펙트럼을 모조리 붙잡아 재현한다. 다시 말하자면, 흑백과 달리 컬러는 더 다양한 것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컬러에 '하이 앵글' 구도와 안정적인 '스테디캠'이 결합한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더 많은 것을 원활하게 굽어볼 수 있다. 또 카메라 워킹이 안정적인, 그만큼 피사체가 흔들리지 않는 스테디캠 촬영은 프레임 안에 담긴 이미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만약 카메라가 흔들리거나, 워킹에 기교를 가한다면 피사체를 향한 몰입이 다소 분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촬영된 숲 이미지가 '롱숏'에 담긴다. 광활한 숲이 내재한 무수한 가능성을 모조리 보여주겠다는 듯, 오직 하나만을 거대하게 비추는 클로즈업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롱숏 내지는 익스트림 롱숏을 택한다.

문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모조리 품어내는 도입의 연출이 찰나에 그친다는 점이다. 그간의 작품을 생각해봤을 때 홀란드가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싶을 법한 도입부는 시간이 좀 지나자 흑백으로 바뀌어 가능성은 하양과 검정, 그 둘의 뒤섞임 정도로 제한된다. 그 흑백마저도 난민과 내지인을 차별한다. 난민들이 위치한 숲의 흑백, 반면 숲을 감시하는 국경경비대가 위치한 건물의 흑백은 '명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명암 대비가 적은 반면, 후자는 명암이 진하다. 고로 전자는 매우 새하얘서 형체가 다소 불분명한 반면, 후자는 빛과 어둠의 대비가 또렷해서 명확한 윤곽선이 생겨나 피사체는 선명해진다. 즉 흑백 중에서도 잘 안 보이는, 열악하고 낙후된 흑백만이 난민들에게 허용된다. 또 다양한 생명체들이 숲 속에 숨어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던 광활한 롱숏이 클로즈업으로 축소된다. 비행기에 탑승한 난민들이 클로즈업되어 프레임을 한 가득 채우는데, 그 얼굴은 심지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 난민을 승인하는 벨라루스인, 폴란드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고분고분한 얼굴만 연이어지는 것이다. 그것 외의 가능성은 프레임에 더는 들어찰 틈이 없다. 클로즈업이기 때문이다. 즉 클로즈업뿐만 아니라, 클로즈업한 피사체도 많은 것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나마 클로즈업은 잘 보이기라도 한다. 난민에겐 이 클로즈업, 곧 잘 보일 수 있는 권리마저 간헐적이다. 이후 벨라루스에서 폴란드로 도망치는 이들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핸드 핼드로 촬영되어 매우 흐릿해진다. 안 그래도 스테디캠과 달리 핸드 헬드는 대상을 불분명하게 훼손하는데, 클로즈업마저 인간보다는 다른 것을 더 부각하는 롱숏 수준으로 난민의 곁에서 멀어지니, 이로써 난민을 볼래야 볼 수 없게 된다.

난민들에게 빛을 쥐어주고자 하는 홀란드, 그러나 세태는 난민들을 보지 못하게, 애초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지워낸다. 흑백과 결합한 불완전한 연출, 그것이 난민의 '존재 양식'인 것이다. 운 좋게 선진국에서 태어나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고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유럽의 하얀 내지인들과 달리, 항상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야만 하는 난민들의 처절한 운명을 홀란드는 불완전한 양식으로 가시화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보일 수 없는가? 내전이 발생한 ‘시리아’,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이 극성을 떨어 사회가 흉흉해진 ‘아프가니스탄’, 외에도 경제 위기를 겪는 ‘모로코’나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 난민이 발생한다. 즉 이들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국의 괴괴한 상황 때문에 보일 수 없는 것인데, 난민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난민들이 등진 모국과 달리, 유럽은 충분히 존재를 보이게 만드는 지역이다. 자원은 풍족하고, 과거부터 오늘날까지의 오랜 역사를 시간을 거슬러 보존해놓을 힘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국경선을 넘고 소속하기 위해선 일련의 '기준'이 필요한데, 난민은 그 자격을 채우지 못했다. 여전한 유색인종 혐오와 다름에 대한 배태가 난민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홀란드는 에필로그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을 폴란드에서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반려동물까지도 관대하게 수용하는 감동적인 장면, 그러나 에필로그가 만들어내는 만족감에 감상자는 마냥 젖어있을 순 없다. 왜냐하면 하얀 피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영화 내내 경계를 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다름을 배태한다.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 인간은 다름을 이해했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벨라루스, 그 뒤에 있는 러시아, 이들과 대치하는 폴란드, 너나 할 것 없이 다름을 혐오하며 정치인들은 이득을 챙긴다. 그래서 자신과 유사한 이들만을 수용하는 유럽 각국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난민들은 푸른 장벽을 넘을 수 없다.

또 다른 기준은 국경수비대, 즉 난민이 '군인'의 기호를 만족시키느냐 마느냐다. 군인들이 난민의 입국 여부를 자의적으로 허용하는데, 이들에게 뇌물을 상납해야만 물을 내어주거나, 철조망을 열어준다. 곧 군인에게 이득이 되면 난민을 허용하는 반면, 이득이 되지 않으면 불같이 내친다. 수중에 돈을 지니고 있던 레일라가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반면, 이를 군인에게 모조리 수탈당한 이후에는 강제 퇴원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듯 말이다. 군인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이 기뻐할 땐 앞서 언급한 것처럼 뇌물을 받거나, 아니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눈요기로 삼거나, 또 팔씨름을 손쉽게 이겨 신체적 우월감을 느낄 때나 그렇다. 난민들은 군인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빈곤하고, 백인 남성과 경쟁할 수 있는 무슬림 남성이기에 긴장감을 형성하기도 하며, 오랜 유랑 생활로 악취가 풍기거나, 주검으로 전락해서 귀찮은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군인들은 서로의 국경 너머로 난민을 던진다.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난민들, 군인들에게 잘 보일 수 없는 열악한 난민들은 그렇게 보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난민들은 위협적인 군인들로 바글거리는 경계선 안으로 왜 들어가고 싶어 하는가. 분명 군인들은 가해자다. 임신 7개월째인 아프리카 여성을 철조망 밖으로 강제로 내던져 하혈시키고, 또 어느 한 무슬림 남성에게는 텀블러에 든 유리를 마시게 만들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해를 입힌다. 외에도 진압봉으로 때리거나, 군견이 난민의 다리를 물게 하는 등 정당하지 않은 폭행이 다반사다. 이와 동시에 군인들은 명목 상 ‘보호자’다. 분명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겐 냉혹하고, 때론 경계 내에 있는 이들도 유린한다. 난민을 도우려는 운동가들이나 율리아를 월권으로 탄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형식적으로 보호자이기에 음식이나 물을 쥐고 있고, 또 난민들을 타인과 연결시켜주는 수단인 차량이나 핸드폰도 지닌다. 이렇게 군인 및 경찰에 의해 보호받는 경계 안에선 물과 음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사치스러운 행위라 할 수 있는 자손 번성 및 반려동물 키우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군인에게 굴종하는 모습은 '스톡홀름 증후군'과 유사하다. 인질이 가해자의 편에 서서 목숨을 부지하는 메커니즘이 동일하니 말이다. 하지만 홀란드는 굴종적인 삶을 바라진 않기에 때때로 군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이송되지 못하거나 이탈하는 존재들을 부각한다. 군인들을 거스르고도 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군인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그들 자신이 자연스럽게 내쉬는 ‘숨소리’를 홀란드는 특히나 부각한다. 

그러나 경계 바깥에 위치한 이들, 군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거니와 오히려 위협을 당한다. 홀란드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부각한 바 있는데, 본 작품에서도 그 관심은 이어진다. 울타리 안에서는 여성이 안정적으로 아이를 낳는다. 호르몬 변화로 임산부가 예민하게 굴어도, 경계 안에서 그들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고 책임을 감시당하는 군인은 형식적으로라도 친절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경계 바깥에서 임산부들은 과다 출혈 및 유산을 겪는다. 겨우 낳은 아이들이라 한들, 물과 식량이 부족하여 어머니는 젖을 짜낼 수 없고, 결국 누르가 사망하는 등 삶은 연장되지 못한다.

바로 그 경계 바깥을 홀란드는 흑백, 곧 '어둠'이라 진단한다.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색채론을 따르면, 어둠에 상응하는 검정은 모든 것이 혼탁하게 뒤섞여 '끝'으로 향하는 색채다. 즉 검정에는 미래도 삶도 없다. 그 검정이 압축된 시간은 '밤'이요, 공간은 영화 속에서 '늪'이다. 겨우 폴란드로 향한 이들은 밤에 벨라루스로 다시 추방되거니와, 끈적거리는 늪은 레일라와 누르의 발을 붙잡고 끌어당겨, 끝끝내 소년을 익사시킨다. 홀란드는 경계 바깥의 참혹하고도 절망스러운 박해를 조금의 여과도 없이, 아주 솔직하게 프레임에 담아낸다.      


즉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인간, 그 누구도 볼 수 없거나 보기를 원치 않는 인간은 지금도 죽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홀란드는 그들을 보고자 한다. 인간이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충분하고도 마땅히 보여야 하기에. 그렇게 하얀 빛이 닿는다면 문제를 밝혀 대처할 수 있으므로, 일단 본 이상 동정과 연민이 발동하여 그들을 구조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 칸딘스키를 다시 인용하자면, 검정이나 하양은 무(無)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검정은 모든 유채색들이 뒤섞인 최후의 무라면, 하양은 무언가가 새롭게 시작하는 빙하기 이후의 무다. 홀란드는 율리아의 '손전등'을 빌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서로에게 하얀 빛을 쏘아 보내야 한다고 논한다. 날카로운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율리아는 레일라를 늪에서 구출하고, 이후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난민들 또한 구제해낸다. 그렇게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반면 똑같이 전등을 몸에 지니고 있지만, 비춰낸 것을 외면하고 괄시하는 군인들은 무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못한다.

이렇게 빛을 쏘는 사람들은 군인과 달리 타인을 인식하는 기준이 까다롭지 않다. 바쉬르는 가족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레일라를 기꺼이 품는다. 바쉬르 가족이 시리아 출신인 반면 레일라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이고, 또 각자의 목적지도 다르며, 가족도 아니기에 공통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엔 기준이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레일라에게 친절을 베푸니, 바쉬르 가족만 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여러 문제를 그녀가 해결해준다. 그녀는 군인에게 뇌물을 대신 내주고, 육아를 도우며 배터리를 빌려준다. 이후에는 율리아가 난민들을 관용한다. 제 집에 최소한의 기준만 남겨두고, 이외의 규칙은 모조리 제거한 채로 활동가들과 난민들을 품는다. 율리아는 기꺼이 불법을 선택한다. 부조리한 합법이 삶을 제한한다면, 정의로운 불법으로써 더 다양한 삶을 수용한다. 그런 율리아에 의해 보그단의 집으로 향한 난민들은 여러 장르가 뒤섞이고, 다양한 언어가 조화로운 새로운 노래를 작곡한다. 즉 고집을 거두고 개방하여 관용하면 더 새롭고 다양한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꽃핀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날 수 있는 이유는 빽빽한 기준에 맞춘 삶은 제한적이고 단조롭기 때문이다. 앞서 클로즈업을 논할 때, 어른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유럽 백인들의 기준에 맞춰 굳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 기준을 따르지 않는 존재가 있나니, 바로 아이들이다. 무표정하고 진지한 어른들과 달리, 예측 불허한 아이들은 레일라와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오줌을 누거나 젖을 물기도 한다. 유럽 백인들의 기준에 맞춘 어른들의 행동이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지 못하다면, 이로써 유럽 백인들이 바라듯 죽음으로 서서히 향하는 행색이라면, 아이들은 제 욕구에 솔직하여 삶을 연장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한 언어는 유사성을 공유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언어가 가리키지 못한 현상들을 지칭하며 사고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그래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난민들과 모국어를 사용하는 내지인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공산당의 압제로부터 태동한 도덕적 불안의 세대, 그 사조의 출발을 함께하고 평생에 거쳐 빛으로 부도덕함을 몰아내던 홀란드의 작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물론 노장의 작업은 영화적으로 마냥 매력적이진 않다. 연출에서의 강점이 크게 도드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국의 켄 로치처럼, 기교를 거두고 현실에서 건져온 참혹한 이미지에의 집중만 요구한다. 이로써 감상자들은 영화가 아니라, 그 영화가 대신 매개하고자 하는 현실에 집중한다. 그렇게 홀란드와 감상자가 영화에 빛을 투사할 때, 어둠이라는 늪에 잠겨 헤매고 있는 사람들은 비로소 해방될 터이다. 영화 내내 다쳐있던 난민들의 발과 다리, 망가진 차량 등은 어떻게든 무언가를 창조하고 채워내고자 열심히 이동하게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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