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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Sep 21. 2022

와이프 출근시키기

'집사'라는 극한직업

올해 따라 역대급 폭우다, 역대급 태풍이다, 기상 이변이 심상치 않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도보와 버스를 합쳐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출퇴근러에게 이 정도면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폭우 속에서는 버스 타러 15분 정도 걸어가는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거실 창가에 서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고 집사 남편을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쏘려던 차, 옷 방에서 양말을 신으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그가 보인다. 편안한 출근길이 될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면서 집사 남편을 둔 덕을 이렇게 보는구나 싶어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폭우가 지나니, 이번엔 역대급 태풍이란다. 세찬 비바람에 나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이번에도 남편은 차키를 집어 든다. “뭐, 나야 고맙지…”라며 쭐레쭐레 따라나선다.


근래에 나는 치과 신경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병원 사정상 토요일 예약이 어려워서 주중에 가야 하는데, 신경 치료라는 것이 한두 번만에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매번 반차를 낼 수 없어서 회사 출근 시간을 조정한 후 출근 전에 병원을 들리기로 했다. 다만, 지각을 면하려면 버스를 타서는 안 될 일이었다.


회사까지 차로 데려다주는 일이야 노상 해 왔지만 이제는 치과를 들렀다 가는 일정까지 수행 중이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그렇게 몇 주 째, 남편은 아침마다 나의 출근길에 함께하고 있다.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여보, 미안해.”라는 나의 말에, “자고로, 집사는 뭐든지 다 하는 거야!”라고 응수했지만, 나는 안다. 그 '뭐든지' 다 하느라 하루 종일 일터에서 보낸 나보다 온종일 집에서 '집안일'로 통칭되는 모든 일을 해 낸 당신이 더 피곤하다는 걸 말이다.


천성이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그는 회사에 매여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진작부터 피로감을 호소했지만, 내심 다른 사람들처럼 회사와 집을 오가는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길 바랬던 나는 그의 ‘일탈’ 제의에 쉽게 동조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남들이 보기에 평범할 필요가 있나, 우리가 특별해지면 되잖아? 어른이 되면서 뭘 해도 재미없고, 뭘 먹어도 그게 그거인데, 하기 싫은 게 있다면 그걸 안 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누려도 되잖아!'라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지루했던 일상에 활기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찬성하면서 (스스로 생각할 때) 멋지게 말했다.

“일단,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 먼저 은퇴해.”


그만둔 이후 뭘 할지 전혀 궁금하지 않아서 묻지 않았는데, 그는, “나는 집사 할 거야!”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제 알겠다.


“근데, 여보, 몰랐지? 집사도 극한직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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