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 Sep 22. 2022

정리정돈의 대가

미니멀리스트 남편

남편은 정리정돈의 신이라고 하기까지는 뭣하지만 대가 반열에는 넉넉하게 든다고 본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살림을 합치자 각자의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둘 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기 수집한 카세트테이프가 한 짐이었는데, 둘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수의 음반이 몇 개 보여 신기했다. 책도 마찬가지. 서로 이고 지고 신혼집까지 가지고 온 책이 한가득이었는데, 역시 같은 제목의 책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취향의 차이는 있지만, 동시대 문화인으로서 마땅히 보유해야 할 일종의 ‘톱텐 리스트’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드는 한편, 굳이 그걸 여태껏 소장하고 있었던 두 사람의 집착 아닌 집착이 엿보이기도 하는 양가적 감정이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각각의 애정 어린 소장품이 합쳐진 상태에서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살림은 점차 늘어났다. 두 식구 살기에 족히 넉넉했던 공간은 이런저런 물건에 치여 얼핏 좁아진 느낌이 드는 터였다. 아, 물론, 내 물건이 그의 것에 비해 곱절로 많다는 것은 뼈아픈 사실이었다.


남편은 집사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집안 곳곳 섹션을 나누어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하루는 창고, 하루는 신발장, 하루는 부엌, 하루는 옷장 등.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뭔가 새로웠다. 집안 곳곳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생경했지만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여유 공간이 생겨나서 좋았다. 자고로 정리를 잘하려면 물건을 적재적소에 수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즉, 쓰지 않는 물건은 제때 버려야 하는데, 그는 그 부분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버리는 데 있어 어떤 미련도 없어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소비 습관도 꽤나 모범적이다. 10년 전에 아웃렛 매장에서 산 미국 유명 브랜드 남방이 여러 장 있고 여전히 즐겨 입지만 옷깃이 조금 헤진 것 외에 하도 곱게 입어 새것과 같이 깨끗하고, 예나 지금이나 어떤 물건이든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절대 사지 않는다.  


정돈은 더 잘한다. 본인이 외출할 때 꼭 챙겨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반지, 지갑, 차키는 항상 놓는 곳에 오와 열을 맞춰 둔다. 시행착오를 거쳐 어렵사리 들인 습관이고 이렇게 두면 외출할 때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반면에, 나는 항상 두는 곳에 둔다고 하는데, 매번 내 반지, 내 지갑을 찾는 게 일이다. 버스 지갑 안에 카드는 도대체 뭐하느라 집에 빼놓고 왔는지, 텅 빈 버스 지갑을 보고 황당해하며 비상금으로 넣어둔 현금으로 버스비를 낸 적이 몇 번 있다.   


이쯤 되니, 실토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집사 남편의 이번 정리 작업의 성과는 주로 내 물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신발장 정리를 하던 날이었다. 퇴근하고 와 보니, 남편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이 단출한 본인 신발들 가운데 앞으로 도무지 신을 것 같지 않다며 두어 켤레를 추가로 처분하면서 신발장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내 신발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이 없었던 것이다. 물건을 비워내야 공간이 생기는 법인데, 잘 버리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본인 물건만 처분하고 마는 고운 마음이 와닿았다. 나는 묵묵히 내 신발 전부를 끄집어 내놓고 아가씨 시절 멋 부린다고 사 두었던 뾰족구두며 신을 일이 전혀 없는 털 장화를 비롯해서 대 여섯 켤레를 미련 없이 재활용함에 넣었다.


순식간에 여유로워진 신발장을 보며, 내가 "뭐든 집안에 물건을 들일 때는 말이야, 꼭 필요한지 생각을 먼저 해야 해~!"라고 떵떵거리자, 남편은, "여보, 그건 당신을 위한 다짐이야, 아니면, 나에 대한 외침이야?"라고 했다.


'애이… 알면서 뭘 그래. 내가 민망해서 그런 거지!'       

이전 01화 와이프 출근시키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