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3편>
이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2)’ 와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즉위했을 때부터 전체적인 상황은 어떠했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으시기 편하도록 되도록 어려운 단어와 설명을 간소화시키고 쉽게 보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루이 16세가 왕이 되었던 1774년, 재무총감(돈이나 재산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인 튀르고는 빚과 사치로 망가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시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무리한 과세를 줄이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세금을 인상시키지 않는 것을 목표로 두었어요. 그래서 모든 일의 원인이 된, 왕실의 재정을 하나하나 감독하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크게 반대하였고, 왕과 왕비 또한 자신들이 쓰는 돈을 일일이 확인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러다 루이 16세와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갈등을 보이다가 2년 뒤, 그만두게 됩니다. (1776년, 당시 왕 22살, 왕비 21살)
1778년, 루이 16세는 튀르고가 반대했던 미국 독립 전쟁(미국이 영국에 독립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 지원을 하기로 합니다. (당시 왕 24살, 왕비 23살 / 그 해에 장녀 태어남) 루이 15세 때 일어난 7년 전쟁으로 잃었던 식민지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적국인 영국을 한방 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 결정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위해 나라의 모든 돈을 쏟아부어서 나라 상황이 더욱 악화가 되자, 위화감을 느낀 루이 16세는, 튀르고가 행했던 것처럼 그동안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던, 귀족, 성직자, 계층에게도 세금을 내도록 했지만, 그들은 “싫은데요? 우리가 왜 내요?”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법원을 이용해 왕을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이럴수록 더욱 단호하고 강단 있게 나가야 했지만, 무력하고 연약했던 루이 16세는 “어… 어.. 알았어… 싫으면 할 수 없지…” 쭈글쭈글… 하면서 그들 눈치를 보기 바빴고, 결국 이 일은 흐지부지되죠.
다음 재무총감이 된 자크 네케르도 비슷한 개혁안을 발표했으나, 특권계층(귀족, 교회 등)들은 우리 같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품위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며 완강히 반대를 하였고, 결국 그들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혀 자리에서 쫓겨났어요. (1781년 당시 왕 27살 왕비 26살 / 그 해에 장남 루이 조제프가 태어남)
뒤를 이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천으로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이 재무총감이 되지만, (1783년) 처음에는 이전 재무총감들과 비슷한 의견을 보이나, 후에 세금을 올리려는 모습에 백성들에게 많은 분노를 샀고, 결국 로렌 지역으로 추방당합니다. (1787년)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한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1783년까지 지원, 당시 왕 29살, 왕비 28살) 결국 미국이 이기긴 했으나, 프랑스에게 실질적으로 이득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평민들의 피와 땀인 섞인 돈이 줄줄이 새어나간 것도 모자라 막대한 빚을 얻어 왕실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되죠. 2년 뒤인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일어나면서 굶어 죽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사람들은 미국의 독립전쟁 지원 결정에 영향을 미쳤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나라 말아먹은 년” 이라며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유명한 목걸이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은 바닥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말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죠. (당시 왕 31살, 왕비 30살 / 그해에 차남 루이 샤를이 태어남, 다음 해에 차녀 소피가 태어나나, 11개월 만에 사망)
루이 16세도 이전 재무총감들의 개혁안을 적극 찬성했지만 이미 특권계층에게 만만히 보였던 왕은 계속 그들에게 휘둘릴 뿐이었어요. 그 후에 재무총감 자리에 오른 에티엔 드 브리엔도 이전 총감들과 비슷한 개혁안을 낸 것을 물론, 국민이 국정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공민권 (ex 선거권)을 주장하였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훗날,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의회를 소집하려다 루이 16세의 노여움을 사,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1787년 ~ 1788년, 1년간 재직)
결국 루이 16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이지만, (1788년, 당시 왕 34살, 왕비 33살) 특권계층은 여전히 고집불통 있었고, 이미 나라의 재정과 상황이 너무 악화되었기 때문에 손을 쓰기 어려웠습니다. (왕실의 전통과 권위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허례허식은 계속되었어요.)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루이 16세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1계급 성직자, 2계급 귀족, 3계급 평민의 대표들이 만나 토론을 하는 것)를 엽니다.
하지만… 1,2계급은 3계급의 의견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무시해 버렸고, 결국 평민들은 울분을 터트렸습니다. 기대만 주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에, 그들은 더 이상 왕실을 믿지 게 되었고, 자신들과 같은 뜻을 가진 소수의 1,2 계급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국민의회를 만듭니다.
이에 화가 난 루이 16세는, “일 똑바로 못해? 네가 책임지고 물러나!” 라며, 네케르를 해고했죠. 왕은 매우 걱정스러웠어요. 과거, 영국의 왕인 찰스 1세가 의회와 대립하다 패배하여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장에서 목이 잘려 죽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의회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파리에 군사들을 보내 *주둔시켰습니다. (1789년, 당시 왕 35살, 왕비 34살 / 6월에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가 구루병으로 사망하자, 차남인 루이 샤를이 왕세자가 됨.)
(*주둔 : 군대가 임무 수행을 위하여 일정한 곳에 집단적으로 얼마 동안 머무르는 일.)
갑자기 많은 군사들이 몰려오자, 파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어요. 그리고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자신들이 신임하는 네케르를 해고한 것은 물론, 국민을 지켜야 하는 왕이 우리를 돌봐 주긴 커녕, 군사를 보내 위협을 한다는 생각에, 그동안 담아두었던 화가 폭발하여,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은 무기를 빼앗아 오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루이 16세는 다시 네케르를 총감 자리에 앉힙니다. 처음엔 네케르도 쫓아냈다가, 돌아오라고 했다가 또 쫓아냈다가 다시 돌아오라 하는 왕의 행동에, ‘장난하나…’라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보여준 분노에 귀족들이 정신을 차렸을 거라는 자그마한 기대를 가지고, 예전에 하려고 했던 일들을 다시 진행시키려고 했으나, “국민들이 습격해서 놀라고 무섭긴 했는데, 그래도 절대 세금 못내.” 라며 반대하였고, 왕은 여전히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죠. 그는 진전 없는 상황에 매우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네케르는 왕실 재정을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도 알 권리가 있다. 라면서 왕실의 재정 상황을 공개를 해버리자, 사람들은 “우리가 피땀 흘려 벌어 들인 돈을 마구잡이로 빼앗아 가더니 그걸 모두 낭비만 한 거야? 어떻게 왕실에 빚이 그렇게 많을 수 있어?”, “우리는 지금 하루에 빵 한 조각도 먹기 힘든데, 마이너스인 상태에서도 파티에 사치를 부린 거야?” 라며 분노했죠.
바스티유 습격은 프랑스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서,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나게 됩니다. 농민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고, 세금을 무자비하게 거둬들이고, 함부로 대한 귀족들을 찾아가, 들고 온 농기구로 폭행하거나,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렸죠. 혁명은 거침없이 계속 나아가,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재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뭄에 이어 홍수가 일어나고, 역대급 추위까지 일어나게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추위로 죽어나갔고, 일부에서 식인까지 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봉건제 : 토지를 통해 주군(우두머리)과 봉신(주군을 따르는 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제도를 말한다.)
결국 1789년 8월 26일에 세계 최초의 인권 이자, 그 유명한 ‘프랑스 인권 선언’이 탄생합니다. 이 속에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바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이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입니다.
그 후, 날이 갈수록 국민의회는 세력이 커져가는 반면, 왕권은 점점 하락 하자, 루이 16세는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렸고, 이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도 직접적으로 나라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 여제인 어머니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요. 자선사업을 열어 많은 빈민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밀 가격이 폭등해 밀빵을 먹기 어렵게 된 국민들을 위해 (당시 밀빵은 그들의 주식이었습니다.) 제과학교에 지원을 한 후, 감자 빵으로 대체하여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빈민가에 왕세자와 공주를 직접 데려가 함께 봉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왕당파 (왕실에 우호적이고, 유지시키려는 세력) 사람들은 왕비가 이런 적극적인 모습을 진작에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과연 프랑스 국민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왕비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군.”
“생각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했으면 정말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노력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왕비에 대한 평판은 달라지지 않았죠.
게다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듯이, 루이 16세가 모든 일을 더 크게 만든 거라 할 수 있는데도, 많은 국민들은 왕을 여전히 사랑했기 때문에, 화가 났어도 루이 16세를 크게 욕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했던 프랑스인들에게 왕의 존재는 자신들의 역사이자, 전통이자, 얼굴이었기 때문에 왕을 욕하는 것은 자신에게 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했죠. 그래서 그 화살은 적국 출신인 왕비에게 돌아갔습니다.
“왕비가 사치를 너무 부려서 왕실이 파산을 한 거야.”
“오스트리아 년이 프랑스를 위험에 빠뜨렸어!”
“그 여자가 왕을 홀린 거야.”
“모든 일은 그년 때문이야.”라고 말이죠.
그런데 또다시 분노할 일이 생깁니다. 계속 치솟는 물가 때문에 여전히 한 끼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일이 다분한데, 베르사유에서 큰 파티를 벌였다는 소식이 들리자, 화가 난 파리의 평민 여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베르사유로 가, 궁을 둘러싸고 시위를 벌이면서, 왕과 왕비가 파리로 오길 요구를 했어요. (1789년 10월 5일)
그 수가 7천 명에 달했기 때문에 국왕 가족은 무서움을 느꼈지만, 루이 16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경비가 부실한 틈을 타서 궁에 쳐들어가, 왕과 왕비를 쥐 잡듯이 찾았고, 국왕 가족들은 결국 파리로 끌려가 튈르리 궁에 감금당했죠. (1789년 10월 6일 / 당시 공주 마리 테레즈 12살, 왕세자 루이 샤를 5살)
루이 16세는 점점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왕은 프랑스의 얼굴이니, 왕실을 계속 유지시키자’라는 세력과, ‘왕실을 아예 폐지시키고 새로운 프랑스를 만들자!’라는 세력으로 나눠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은 어느 쪽도 속할 수 없었어요. 왜냐구요?
당연히 왕실을 폐지시키자, 쪽은 자신을 폐위시킬 생각이니 속 할 수 없고, 왕실을 유지시키자, 쪽은 왕이 모든 힘을 가지고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닌, 권력을 법에 제한하고, 상징성만 가지고 있게 하는 입헌군주제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전제군주제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 또 다른 말로는 ‘절대왕정’)을 고집했지만, 어느 세력이든 전제군주제를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선대 왕도 그렇고, 선선대 왕도 그렇고 나라를 빚더미로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현 왕은 우유부단해서 네케르 총감 때처럼 왔다 갔다 하는 하는데, 전제군주제 다시 맡기면 큰일 날거라 믿었죠. 더군다나 파리의 대다수 시민들도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며 “왕 이란 존재는 있어야 해. 하지만 정치는 하지 마.”라는 입장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는 한 가지 선택 밖에 없었습니다. 입헌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루이 16세가 이것을 받아들였다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 대를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왕은 끝까지 전제군주제를 주장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의회에 속하지만 왕실에 우호적인 미라보 백작을 회유하였습니다. 그는 국왕 부부에게 정말 중요한 인물이었는데요, 국왕 부부와 국민의회의 사이를 연결시켜주고, 중재해주는 징검다리 같은 사람이었죠. 그리고 왕과 왕비를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미라보 백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은 나쁘게 흘러갑니다. (1791년 4월 3일, 당시 왕 37살, 왕비 36살) 왕실의 편을 든 이들이 알 수 없는 죽음이나, 폭력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국민의회가 총리 체제를 밀어붙이면서 왕의 권력을 강제로 빼앗고 국왕 부부를 매우 함부로 대하기 시작하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견디기 힘들어졌습니다.
당시 이 일에 원인 제공을 한 귀족들, 그리고 왕의 형제들과 친족들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고는 진작에 재산을 챙겨 프랑스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렇게 아끼던 폴리냑 부인도 왕비를 뒤로한 채 가 버렸죠. 국왕 부부는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래도 자신들을 위해 남아 있어 준 엘리자베트(루이 16세의 여동생)와 랑발 공비가 옆에서 함께 있어준 덕분에 견딜 수 있었어요.
앙투아네트는 궁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동안 루이 16세가 국민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계속 반대를 했기 때문에 계속 궁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왕은 마음을 바꿔, 부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다시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기를 되찾고자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가지고 있는 돈을 빼앗겨 국민의회에게 생활비를 타 쓰는 것은 물론,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쉽지 않았죠.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셋째 오빠인 레오폴트 2세에게 몰래 연락을 하여, 오스트리아로 가는 경비를 빌려달라고 하였지만, 대답은 “싫어.”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음 생활비를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들에게 완전한 불행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참고자료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마리 앙투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