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2편>
이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1)’ 과 이어집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스캔들과 소문이 많았던 왕비는 없었습니다. 페르센 과의 염문설도 그렇지만, 가장 유명했던 것은 왕비와 폴리냑 부인의 동성애 스캔들이었는데요. 그 소문은 왕비가 그녀에 대한 편애로부터 시작됩니다. 즉위 후, 폴리냑 부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왕비는, 그녀에게 베르사유 궁에서 같이 살자고 했죠. 하지만 당시 폴리냑 백작 가문은 많은 빚으로 망해가고 있는 상태라 베르사유에서 지낼 돈이 없었어서,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백작 가문의 모든 빚을 갚아주고 매년 많은 연금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의 세금으로…)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는, 공주와 왕자들의 가정교사로 임명해, 많은 귀족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왕족의 교육은, 후작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만 가능한데, 그보다 낮은 백작부인이 맡았기 때문이었죠. (당시 귀족 신분은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이었습니다.)
왕비는 폴리냑 백작 가문을 공작 가문으로 승격시켜, 폴리냑 백작 부인은, 폴리냑 공작부인이, 그녀의 남편인 폴리냑 백작은, 폴리냑 공작이 되었고, 기존에 주었던 연금보다 더 많이 올려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부의 가족들에게도 한 자리씩 주었어요. 공작 부부는 왕비의 빽으로 엄청난 권세를 누려서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그들을 굉장히 싫어했죠. 왕비가 조금이라도 중립적인 행동을 하였다면 상황은 괜찮았을까요? 유난히 그녀에게 관대했던 모습에, 왕비에 대한 여론과 소문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프티 트리아농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습니다. 궁보다 별장에서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곳에서 친구들을 불러 작은 파티나 무도회를 열기도 하니, 백성들은 “우리는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왕비는 그곳에서 놀고만 있냐,” “오스트리아 년은 프랑스 사정에 관심이 없다”라고 욕을 했습니다. (별장에서 열었던 파티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라 상황을 생각하면 백성들의 화를 돋울 수 있는 행동이었죠.)
많은 이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우 싫어했지만, 패션만큼은 욕을 하면서도 따라 할 정도로 그녀는 패션계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헤어스타일은 프랑스의 모든 귀족 여인들이 다 따라 했을 정도였어요. 그녀가 머리 뽕(?)을 크게 올리는 푸프 스타일을 하면, 다음날, 모두 푸프 스타일을 하였죠.
당시에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발목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나왔을 때는, 모두 까무러치게 놀라며, 왕비의 품위에 손상이 되는 옷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이 스타일도 프랑스 전체에 유행이 됩니다. 이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가 심할 거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더욱 각인되죠.
(참고로 루이 15세 때는 퐁파두르 부인이 모든 유행을 주도했던 것은 물론, 그녀의 스타일이 왕실의 공식 복식으로 지정이 돼서, 마리 앙투아네트도 왕세자비 시절에는 그녀의 스타일로 다녔지만 왕비가 된 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나빠진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뜻과는 다르게 엄청난 욕을 먹게 되는데요. 그 이유는 그림 속 그녀가 속옷 (슈미즈)를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각인된 사치스러운 모습이 아닌, 서민적인 모습으로 백성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욕을 먹게 됩니다. “왕비 답지 못하다.” “품위가 없다.” “어떻게 속옷을 입냐.” “나라 망신이다”는 기본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어떻게 적국의 식민지에서 나온 옷을 입을 수 있느냐!”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슈미즈의 면은 인도에서 수입한 것이고, 인도는 프랑스의 적국인 영국의 식민지였어요, 사람들이 격노하자 왕비는 이 초상화를 빨리 집어넣고 다른 그림을 그려 공개합니다. 그 그림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었는데요. 어머니의 따뜻한 모성이 담긴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백성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뒤, 슈미즈 패션이 크게 유행을 합니다.
왕비로서 처신을 잘 못하기도 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 아프거나 다친 백성들을 보면 왕실 마차를 내어주거나, 왕족에게 손해를 입은 농민에게는 대신 배상해주고,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궁으로 데려와, 푸짐한 요리들을 먹였고, 오스트리아의 국왕인 오빠가 프랑스 정치에 참견을 하면, 아주 단호히 막았죠. 많은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하여 프랑스 문화와 예술이 발전을 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재능이 있다면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고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왕비 전속 디자이너는 평민 출신인 로즈 베르탱이, 궁정 화가는 비제 르 브룅이 맡게 됩니다. 여성들의 지위가 낮고 신분제도가 심했던 당시에는 정말 놀라운 일이죠.
(하지만 로즈 베르탱은 항상 고가의 재료를 사용해서 옷을 만들었기 때문에 드레스로 인한 지출이 컸지만, 그녀가 디자인 한 옷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격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비는 더욱 사치의 표본이 되었죠… 그리고 왕비의 디자이너라는 이유로 엄청난 갑질을 하고 다녀서 많은 욕을 먹었는데, 그 후폭풍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받습니다.)
혁명 후에, 물가가 날로 폭등하고,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제빵 학교에 지원을 하거나, 스스로 제과점을 열어서, 많은 사람들이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했어요.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왕비의 노력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녀에 대한 편견만 더욱 심해집니다…
(*기근 :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모자라 굶주림.)
사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세대들에 비해, 왕실에서 사용한 돈은 적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린 사치가 이전 왕들의 여인들만큼 막장은 아니었고, 나중에는 트리아농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해서 돈이 많이 절약되었죠. (이곳에서 나온, 달걀, 우유, 채소 등으로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루이 16세 또한, 정부에게 들이는 돈도 없었고, 열쇠나, 자물쇠를 만드는 소소한 취미를 가졌기 때문에 나가는 돈은 크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즉위 후, 연이은 재해와 감당할 수 없는 세금으로 인해 백성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상태라 왕과 왕비의 절약과 봉사보다는 그들의 소비가 눈에 더 들어온 것이죠.
백성들은 그녀가 하는 행동이 정부 같다고 욕을 했습니다. 그동안 유행을 주도한 것도 사치를 부리는 것도 대부분 정부가 했던 일이 었으니까요. 그녀의 사교적인 성격은, 독실한 신앙을 가져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며 보냈던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사와, 공식적인 일 외에는 방에서 조용히 독서를 하거나, 자수를 놓았던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와 비교가 되었습니다.
그녀들도 유흥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들에게 가려져, 추문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루이 16세에게도 정부가 있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도 가려졌을까요? 하지만 루이 16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를 두지 않았어요. 그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 탓으로 돌려졌습니다. 왕비가 왕의 기를 꺾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녀의 어머니와 언니들이 남편을 모두 휘어잡고 산 걸로 유명해서 그들의 가족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있고,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탁은 거의 모두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왜곡해서 보았겠죠.) 그런데, 페르센 백작은 물론, 몇몇의 젊은 귀족 남자들이 트리아농에 드나들기도 하니, “우리 왕은 정부도 못 두게 하면서 니는 여러 애인을 두냐?” 라며 욕을 했어요.
여담으로 마리 테레사의 경우, 모든 관심이 정부들에게 집중이 되었다 보니, 프랑스의 왕비가 돼서도 프랑스어가 아닌, 모국어인 스페인어만 사용을 하였는데도, 이로 인한 비난을 받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어를 실수할 때마다 놀림거리가 되었죠;;) 하지만 순진한 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과, 왕의 사랑을 못 받는다는 이유로, 귀족들과 정부들에게 비웃음을 당해, 힘든 궁 생활을 했지만, 루이 14세가 왕비의 권위를 세워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해요.
정부가 있던 없던 왕비의 삶은 순탄치 않지만, 모든 계층에게 관심을 받아 온갖 추문에 시달린, 앙투아네트를 보면, 정부가 있는 것이 어찌 보면 그녀의 인생에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백성들도 처음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세자비로 처음 왔을 때, 대체적으로 “이제 오스트라아와 전쟁을 하지 않아도 돼”, “그들로 인해 인해 더 이상 가족을 잃는 일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녀를 환호하며 반겨주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쌓였던 나라 간의 악감정이 너무 크다 보니, 그녀의 좋은 점보다 잘못된 점이 더 도드라지게 보여서 같은 프랑스인 인 선대 정부가 더 많은 잘못을 하였는데도, 적국 출신의 왕비가 잘못한 것이 더 크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꼴 보기 싫은 것을 넘어서 왕비를 증오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는 것마다 아니꼽게 보아서, 돈을 쓰면 썼다고 욕하고, 돈을 절약하면 왕비가 품위 없이 절약을 한다고 욕을 하였죠. 소문 또한 점점 부풀려져서, 왕비는 남자 없이 못 사는 매춘부다, 남자도 모자라 여자까지 탐하는 암컷, 오스트리아 개년, 이라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프랑스 전체에 왕비를 풍자하는 팸플릿까지 뿌려지는 등, 나라의 욕받이 신세가 됩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이 어느 정도로 힘들었냐면, 프랑스 사회는 1계급 성직자 2계급 귀족 3계급 평민으로 나뉘었는데, 그중 3계급인 평민만 세금을 냈습니다.
이전 왕들이 남긴 빚으로 인해 나날이 세금이 인상이 되었던 상태에서, 교회 유지비 &부양비 명목으로 자신의 수입의 10% 를 여전히 교회에 내야 했고, 어마어마한 담뱃세와 소금세로 인해, 그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 갔습니다. (특히 소금 세는 금값이라고 할 정도로 높았어요.) 평민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가 고픈데도 사냥이나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1계급과 2계급만의 특권이었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독립전쟁까지 지원을 하니, 백성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미국 독립 전쟁 지원을 적극적으로 지지를 했기 때문에 원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왕정시대에서 돈을 사용을 했던 방식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귀족들에게 돈을 빌리고, 그들에게 조세(국가 또는 지방단체에서 필요한 경비를 사용하기 위해, 국민으로 부터 강제로 거둬들이는 돈)를 받는 권리를 넘겨주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그들은 왕에게 합법적으로 받은 권리라 생각해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인다는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돈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둬들인 세금이 모두 왕실에 갔나? 당연히 아닙니다. 귀족들이 거둬들인 금액에 반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은 여전히 쪼들렸고, 백성들은 더욱 궁핍해졌죠. 다만, 그 권리를 부여받은 귀족들만이 부자가 되었어요. 거기에 가뭄과 홍수, 우박 등의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고, 물가까지 폭등을 하자, 백성들의 주식이었던 빵조차도 먹기 힘들어져서, (하루에 빵 한조각도 먹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결국 식인까지 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리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족과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은 백성들의 분노를 더욱 사게 된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다음 장에서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전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마리 앙투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