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4편>
이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3)과 이어집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에게 불행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페르센 백작이 국왕 가족을 프랑스에서 몰래 탈출을 시키기 위해, 대형 마차를 제작을 하거나, 러시아 귀족의 신분을 사 들이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로서 어느 정도 품위를 지키면서 가고 싶었는지, 자신들이 타고 갈 마차를 밝은 색으로 칠하고, 화려하게 꾸며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신분을 감추고 도망가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외부를 밝은 색으로 칠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고, 내부 인테리어만 꾸미는 것으로 합의하죠.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국왕 가족이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그 안에 요강이나 먹을거리를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페르센 백작 가문은 스웨덴의 왕 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굉장한 부자였지만, 도피자금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들자, 다른 귀족들에게 빌려 보탰다고 합니다. 그가 당시 사용한 금액은 200억, 지금으로 따지면 1200억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탈출하기로 한 날은 1791년 6월 20일, 아무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칠흑 같은 밤이었죠. 국왕 부부는 공주와 왕세자, 엘리자베트(루이 16세 여동생), 그리고 유모이자 시녀인 투르젤 후작 부인과 소수의 시종들을 데리고 벨기에로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벨기에로 선택한 이유는 그곳이 오스트리아 령 이기도 했고, 왕당파인 부아이예 후작이 있었기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함께 있었던 랑발 공비는, 왕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왕당파 사람들과 함께 논의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에 남는 것을 선택합니다.
시종들은 러시아 귀족으로, 국왕 부부와 엘리자베트는 하인과 하녀로 변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위병들의 눈을 피해 튈르리 궁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마부의 옷을 입고 있었던 페르센은, 대형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 그들을 태운 뒤, 직접 고삐를 잡고 쉴 새 없이 달려서 무사히 파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그렇게 안심을 하고 있을 때, 루이 16세가 페르센을 조용히 불러, 더 이상 자신들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국왕 부부를 끝까지 모시고 싶다고 하였으나, 왕은 단호히 거부했어요. 사실, 루이 16세는 그동안 부인과 페르센 백작 사이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밖으로 티를 내지 않고 있었는데, 공주와 왕자의 친부라고 소문이 났던 사람과 계속 도피를 해야 한다는 게 거북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페르센은 함께 가는 것을 포기하고 왕에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절대 마차에서 내리면 안 된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곳에 있던 다른 마부에게 목적지까지 잘 안내해 달라며 돈을 두둑하게 챙겨 주었습니다. (당시 마부는 마차에 왕과 왕비가 타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러시아 귀족과 하인, 하녀들이 타고 있다고 알고 있었죠.)
다음날, 왕과 왕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의회와 국민들은 난리가 났고, 급히 추격대를 만들어 그들을 쫓았습니다. 그 무렵, 국왕 부부는 생트메누 역참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이 지폐에 그려져 있던 루이 16세를 알아보고는 혁명군에게 알렸어요.
그 사실을 몰랐던 왕은 페르센이 신신당부했던 말을 무시하고 그 지역의 대표 음식인 돼지족발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왕의 행동을 말렸으나, 루이 16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았어요. 파리를 벗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변장을 하고 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지, 당시 만드는데 3 ~ 4 시간이나 걸리는 돼지족발을 주문한 것도 모자라 1시간 넘게 느긋하게 먹고 다시 출발을 합니다. 그 덕에 왕을 본 목격자들이 늘어났고, 결국 바렌 지역에서 잡히게 되었죠. 부아이예 후작의 부하들은 그곳에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과 왕비를 잡으러 온 혁명군들을 보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고 맙니다. 그들의 탈출은, 단 하루 만에 허무하게 끝난 셈이죠.
4일 뒤인 6월 25일, 국왕 가족들을 다시 튈르리 궁에 감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왕의 가족을 도운 이들에게 현상금이 붙게 되어,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부아이예 후작은 영국으로 달아났고, 페르센도 프랑스에 머물기 어려워졌죠.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어요. 국왕이란 사람이 나라를 버리고 적국인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을 공격하려 했다는 생각에 용서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립니다. (당시 왕 37살, 왕비 36살, 공주 마리 테레즈 13살, 왕세자 루이 샤를 6살)
왕과 왕비의 탈출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랑발 공비는 혁명군에게 국왕 부부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튈르리 궁에서 같이 지내게 됩니다.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부인에게 빠져 그녀를 외면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이토록 자신을 위하는 모습에 감동하고 고마워합니다.
한편, 레오폴트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셋째 오빠/ 형인 요제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왕이 됨.) 동생 부부의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유럽에서 국력이 강한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의 왕과 왕비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죠. (그래서 이전 부탁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 것입니다.) 레오폴트 2세는 동생 부부를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대부분 모두 거절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가 시집간 나폴리도, 과거 동맹국이었던 샤르대냐도, 프랑스 왕족의 방계 핏줄인 스페인도 모두 남의 나랏일에 참견하기 꺼려했어요.) 다행히 유일하게 반응을 해 주었던 프로이센의 왕과 동맹을 맺고, 한 달 뒤인 8월 24일에, 필니츠 성에서 회담을 열어,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필니츠 선언’입니다. 요약하면, “왕과 왕비를 계속 함부로 대하면 무력을 행사하더라도 너희를 가만 두지 않을 거야.”라는 내용으로 프랑스를 압박했어요. 이러면 불똥이 누구에게 튈까요? 네, 맞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죠. 이 일로 왕비를 더욱 괴물 보듯 합니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정말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이렇게 협박하면 잠잠해지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 일은 프랑스 혁명군의 화를 돋우게 되어, 다음 해인 1792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 시기에 레오폴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프란츠 2세가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립니다.) 점점 세력이 커지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로 군사를 보내게 되죠. 그런데 의기양양했던 혁명군이 연달아 패배 하자, 이 모든 것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탓으로 돌려 버립니다. “왕비가 오스트리아의 스파이기 때문이다.” “그년은 적국과 내통한 반역자다!” “왕비가 군사 기밀을 적군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왕실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커진 시민들은 6월 20일 튈르리 궁에 쳐들어가, 루이 16세와 왕세자 루이 샤를에게 혁명을 상징하는 빨간 *프리기아 모자를 씌어주며 왕실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였죠. (1792년 초, 페르센이 다시 한번 국왕 가족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 *프리기아 모자 : 로마 시대에 노예들이 해방이 된 후, 이 모자를 쓰고 다닌 계기로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시민들이 혁명당시 이 모자를 쓴 것이고,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게 되었다.)
전투에서 계속 밀리는 상황이 이어지자, 위협을 느낀 *입법의회는 의용군(국가나 사회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조직된 군대)을 모집하게 됩니다. 하지만 7월 25일, 프로이센 사령관이 “프랑스 왕과 왕비를 건들면 파리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라는 말을 하자, 왕비가 친정과 내통한다는 것을 더욱 기정사실화 하여, 격노한 파리 시민들은 왕과 왕비를 처단하기 위해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가게 됩니다. (8월 10일 사건) 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들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국왕 부부는 가족들을 데리고 의회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의회를 에워싸고 왕과 왕비를 달라고 했죠.
(*입법 의회 : 국민의회가 제정한 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의회. 국민의회가 1791년 9월 3일 헌법을 만든 후 해산이 되었고, 다음 달인 10월 1일에 입법의회가 세워짐.)
결국 의회는 그들의 주장에 따라 국왕 가족을 탕플 탑에 가둔 후, 폐위시킵니다. (당시 왕 38살, 왕비 37살, 공주 14살, 왕세자 7살) 랑발 공비 또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따라 자진해서 탕플 탑에 가지만, 8월 19일 그녀를 강제로 떼어내 라호루스 감옥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여전히 나쁘게 흘러갔습니다. 8월 26일 오스트리아 군이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롱위 지역을 점령한데 이어, 9월 2일 프로이센 군이 베르됭 지역을 함락시키자, ‘오스트리아 군과 프로이센 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국왕 가족을 구출할 것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반 혁명파 들이 파리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왕당파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반 혁명파와 왕당파가 모여 끔찍한 일을 꾸미고 있다’ 등의 근본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두려움을 느낀 파리 시민들은 감옥을 급습하여 혁명을 반대하였거나, 왕실에 우호적 적이란 이유로 수감이 되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9월 학살(9월 2일 ~ 9월 7일)이 일어납니다.
(당시 파리에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희생되었던 사람 중 랑발 공비도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그녀에게 왕실의 정통성을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위한 맹세를 하라고 강압하였는데, 랑발 공비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맹세는 할 수 있으나 왕과 왕비를 비난하고 왕실을 모욕하는 말은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시민들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왕실을 부정하도록 윽박질렀으나,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일찍 죽든 늦게 죽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하였죠.
이에 격분한 사람들은 그녀를 단단한 둔기로 내려친 뒤, 겁탈을 하고는 사지를 토막 내어, 머리를 뾰족한 막대기에 꽂아 입을 맞추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축하하기 위해 머리를 들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기도 하였고, 처참히 죽은 친구의 모습을 왕비에게 보여주기 위해, 국왕 가족이 갇혀있는 탑 창문으로 머리를 들어 올려,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절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후, 랑발 공비의 시신은 길바닥에 버려졌는데 이를 가엾게 여긴 한 시민이 조각난 그녀의 시신을 모아 묻어주었습니다. (후에 그녀의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는 가족 묘지로 옮겨 주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변질되어버린 혁명을 극혐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어요.
하늘은 혁명군을 버리지 않았는지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승리를 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날, 국민공회(입법 의회에 이어 1792년부터 179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의회.)가 탄생되죠. 그들은 제일 먼저 왕정을 없애고 공화정(국민이 선출한 대표자 또는 대표 기관의 의사에 따라 주권이 행사되는 정치.)을 공포하여 새로운 프랑스를 열고자 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
참고자료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마리 앙투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