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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라제 Jun 18. 2022

남겨진 아이들의 이야기, 루이 17세와 마리 테레즈

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브라제 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5편>
이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4)과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구더기와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열악한 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루이 17세는 여전히 시몽과 그의 아내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었고, 마리 테레즈는 동생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학대를 받고 있었어요. 공주는 남동생과 가까운 곳에 수감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루이 17세가 시몽에게 맞을 때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였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혁명정부에게 동생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어린 소녀의 외침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주를 하녀 부리듯이 대했죠. (그녀는 훗날,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물 시몽이라는 회고록을 썼다고 합니다.)


하녀 취급을 당하는 마리테레즈


학대받고 있는 루이 17세


마리 테레즈는 그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을 벽에 적어놓았는데, 그 글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소식을 수천번 물어보았지만 들을 수 없었고, 다시 만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제발 살아계셔 주세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를 지켜주세요. 그리고 하느님, 저희 가족을 고통으로 몰아간 이들을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학대로 인해 평생 고쳐지지 않는 발성장애(소리를 정확히 내지 못하는 증상)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17세의 고난은 날로 심해져 갔는데요, 시몽과 그의 아내는 아이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영양실조에 걸린 것은 물론, 오물이 쌓인 장소에 그대로 방치했죠.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루이 17세와 그를 지켜보는 시몽과 아내


한편, 정권을 잡은 로베스 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그는 어른, 아이, 임산부 할 것 없이 반혁명에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하였습니다. 이때 수감된 사람은 30만 명, 처형된 사람은 만 칠천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로베스 피에르


그로 인해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로베스 피에르는 신분과 종교,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 것은 물론,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잡고 난 후, 사람들을 마구잡이 식으로 잡아들이고 죽이자,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던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고 비난을 받았죠.)


테르미도르 반동


결국 1794년 7월 28일 로베스 피에르는 생쥐스트 등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왕과 왕비를 죽였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머리는 허름한 나무 상자에 담겨져 버려지게 됩니다.

(*테르미도르 반동 :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가 펼친 공포정치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동을 일으켜 산악파를 몰락시킨 사건.)


로베스 피에르의 처형


그리고 국민공회는 테르미도르파 (시민계급)가 정권을 잡게 되죠. 그 후 마리 테레즈와 루이 17세를 돌봐줄 사람이 배정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탕플 탑에서 나갈 수 없었고, 감시 또한 여전했습니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학대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루이 17세는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어요. 그러다 1795년 5월의 어느 날,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크게 앓다가 결국 회복을 하지 못하고 6월 8일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10살)

(*임파선 결핵 : 림프절에 결핵이 생긴 병증.)


학대로 인해 몸이 나빠져 누워있는 루이 17세


이후 부검의인 펠르탕 박사가 와서 그의 시신을 보고는 기겁을 합니다. 아이는 부러질 것 같이 말라 있었으며, 채찍과 구타로 인한 흉터가 온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죠. 펠르탕은 왕족의 심장을 보관하는 전통에 따라 루이 17세의 심장을 따로 꺼내 보관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그의 시신은 상트 마르에리트 섬에 있는 묘지에 아무런 표식 없이 묻혀지게 됩니다. 어린 소년은 죽어서야 탕플 탑에 나오게 되었지만, 그의 시신은 끝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탕플 탑


그 후, 루이 17세 대해 무성한 소문이 퍼집니다. 진짜 루이 17세는 이미 탕플 탑에서 도망쳐 나왔고, 그곳에서 죽은 아이는 가짜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을 몰랐죠. 그러는 사이, 작은 아버지인 프로방스 백작은 루이 17세에 이어 자신이 새로운 국왕이라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해외에 도피해 있는 상태였고, 프랑스 내에서는 왕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칭한 것에 불과했죠. 그래서 역사기록을 보면, 그의 재위 시작 기간이 1795년이 아닌,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왕정이 복고된 후인 1815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프로방스 백작, 훗날 루이 18세


(그런데 실제로 왕이 된 것도 아니고 계속 탑에 갇혀 있었던 루이 17세는 어떻게 왕으로 기록이 되어 있냐고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는데, 첫째는 프랑스 제1 공화국은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뿐이라도 국제적으로 왕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1815년 왕정복고가 되면서 그가 추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수대비의 남편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지만 덕종으로 추존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루이 17세


당시, 혁명정부는 마리 테레즈에게 아무 소식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가족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감옥에서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었죠. 루이 17세가 죽고 2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녀를 돌봐주었던 르네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를 안타깝게 여겨 공주에게 부모님과 고모, 남동생이 모두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이로 인해 르네 부인은 혁명정부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사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충격에 빠졌고, 그날 탕플 탑에서는 공주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하루 종일 들렸다고 합니다. (당시 마리테레즈 17살)

한편, 나폴리의 왕비인 마리아 카롤리나는 홀로 남은 마리 테레즈를 방치하는 프란츠 2세를 보고 닦달하였습니다. (마리아 카롤리나를 기억하시나요? 1편에서 원래 루이 16세의 아내로 내정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죠. 그녀는 형제들 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했다고 합니다.) 결국 프란츠 2세는 혁명정부와 협상을 하여, 프랑스 포로 10명과 공주를 교환하기로 하였습니다.


마리아 카롤리나


1796년 1월 9일, 마리 테레즈는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그곳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공주의 엄마는 나라의 국익을 위해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시집을 갔지만, 정작 그녀와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외면했기 때문에 죄의식이 느껴져서 그녀를 보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스트리아에서도 방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공주가 무사히 프랑스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페르센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숨겨두었던 일부의 재산을 마리 테레즈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796년 오스트리아에서 마리 테레즈, 당시 18살


프란츠 2세와 외가 사람들은 마리 테레즈가 불편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서 누구와 결혼을 시켜야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었죠. 공주는 그런 모습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때, 프로방스 백작은 조카를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오스트리아 왕실에 요청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리 테레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작은 아버지가 망명해 있는 러시아 제국의 미타우 (현재의 라트비아)로 갔죠. 사실,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은 자신들이 왕이 되기 위해서 귀족들과 함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함을 했었는데,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카를 매우 아끼고 잘 대해 주었으며, 그녀의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마리 테레즈


프로방스 백작은 이런 상황일수록 부르봉 왕가가 결속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리 테레즈에게 자식이 없는 자신을 대신해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인 루이 앙투앙과 결혼하는 것을 제안했죠. 루이 앙투앙은 말 더듬이에 수줍음이 많은 남자였는데, 공주는 그를 보고 루이 16세를 떠올렸고, 아버지가 그리웠던 소녀는 결혼을 수락하게 됩니다.


루이 앙투앙


1799년 6월 10일 그들은 러시아 왕의 호의로 엘가바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는데요, 러시아에 이어 바르샤바, 영국으로 계속된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나폴레옹 1세가 물러나고 왕정이 복고가 되면서 마리 테레즈는 애증이 담긴 자신의 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1세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로 데려간 상태이기도 하고, 당시 나이가 4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습니다.)


나폴레옹 1세


그리고 루이 18세와 함께, 처형 후 버려졌던 어머니와 아버지, 고모의 시신을 찾아내 왕족의 묘로 사용되었던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합니다. (엘리자베트의 시신은 신원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생인 루이 17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합니다.


1816년 마리 테리즈, 앙굴렘 공작부인 시절


굴곡이 많던 그녀의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2월 26일 나폴레옹 1세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자,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6월 18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영국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감금이 되면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복위된 루이 18세가 9년 뒤, 후계자 없이 사망을 하자,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이 왕위에 올라 샤를 10세가 됩니다. 그러면서, 아들인 루이 앙투앙은 왕세자가, 부인인 마리 테레즈는 왕세자비가 되었죠. 프랑스 국민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던 공주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어서, 그녀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도,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도 많은 환호를 해주었습니다.


샤를 10세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그런 국민들의 반응에 괘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끔찍하게 죽여 놓고선, 이제 와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반겨 주는 것이 어이가 없었죠. 그래서 왕세자 비는 부모님의 유언과 자신이 탑에 감금되었을 적 하느님께 그들을 용서를 해달라고 했을 때와는 다르게, 국민들에 대한 분노로 전제 군주제를 지지하며, 민중을 배척하고 소외시키다 결국 국민의 신임을 잃고 맙니다.


왕세자비 시절의 마레 테레즈



그리고 1830년에 일어난 *7 혁명으로 인해 샤를 10세가 6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물러나자, 그녀의 남편은 형식상 왕이 되어 서류만 작성을  , 20 만에 조카인 앙리 다르투아에게 넘겨주었어요. 하지만 그가 왕에 오른  일주일 만에 오를레앙 가문(부르봉 왕조 방계 가문) 루이 필리프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바람에, 부르봉 왕가 사람들은 프랑스를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했습니다.


(*7월 혁명 : 샤를 10세가 예전의 절대왕정을 되찾고자 의회를 폐지 시키고 국민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자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일으킨 혁명.)


앙리 다르투아

그 후, 마리 테레즈는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1851년 10월 19일, 어머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폐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72세) 마리 테레즈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직계 후손이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서로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서 짧았던 행복을 다시 누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마리 테레즈와 루이 17세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시절


참고로 혁명 때 프랑스를 떠났던 폴리냑 공작부인의 자손은 현재 모나코 대공으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이야기인 마리 앙투아네트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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