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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라제 Jun 04. 2022

왕과 왕비, 결국 하늘의 별로. 마리 앙투아네트 (5)

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5편>
이 내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4)과 이어집니다.

당시 국민공회는 지롱드 파와 산악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지롱드 파는 왕을 죽이면 안 된다 라는 입장이었고, 산악 파는 왕을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처음에는 지롱드 파의 세력이 더 커서 루이 16세가 살 수 있는 방향으로 기우는 것 같았으나, 11월 20일 튈르리 궁을 뒤지던 중 오스트리아와 연락을 주고받은 서신들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산악 파는 루이 16세를 처형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고 결국 12월 11일 왕에 대한 재판이 열리게 되죠. (1792년 당시 왕 38살, 왕비 37살 공주 14살 왕세자 7살)

국민공회


투표에 앞서 산악파에 속해있던 로베스 피에르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루이 카페를 죽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생쥐스트는 "루이 카페가 받은 혐의 중 무죄가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혁명이 유죄가 되어선 안됩니다. 그가 무죄로 풀려나면 혁명이 죄가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과는 721명 중, 찬성표 361표, 반대표 334표, 집행유예 26표로 사형이 확정이 되죠. 집행유예의 26표가 반대표로 돌아 섰어도, 1표 차이로 처형이 결정이 되었을 겁니다.  이전에 사람들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 보면 왕족을 정말 증오해서 반대표가 훨씬 더 많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비등비등하지 않나요?


루이 16세의 재판


그 이유는,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왕에게 애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으로 재위했을 시절 아무리 낮은 신분이라도 차별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잠깐 만났더라도 얼굴을 기억하고는 다음에 보게 되면 인사를 해 주었고, 하인들의 세세한 가정사까지 신경을 써 주는 등,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렌 사건으로 인한 배신감이 컸어도 루이 16세를 완전히 미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산악 파도 인정할 정도였으나,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졌다고 무능한 군주를 계속 왕으로 세우는 것은 안된다고 하였죠. 그렇다고 왕을 살려 놓으면, 후일에 왕당파 세력들이 왕정을 복구시킬 수도 있으니 완전히 싹을 잘라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루이 카페 : 카페 란 부르봉 왕가 후손들의 성으로, 그동안은 왕의 성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지만 국민공회가 왕정을 종식시키면서 왕족들은 일반 국민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성과 이름인 '루이 카페'로 불리게 됨.)


생쥐스트


재판으로 인해 가족들과 분리되어 있었던 루이 16세는 반역 혐의로 처형이 확정된 후, 가족들과 함께 있을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고, 국민공회는 이를 수락하여 부인과 자식들과 잠시 동안 같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모습


그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 후, 마지막 인사를 하였는데, 그때 아이들에게 절대 나의 복수를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렇게 1793년 1월 21일, 한 나라의 군주였던 남자는 단두대가 있는 콩코드 광장에서 ‘내 죽음이 그대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이 잘려 죽습니다. (당시 왕 39살, 왕비 38살, 공주 15살, 왕세자 8살)


처형장에 가는 루이 16세를 보고 절규하는 가족들


루이 16세의 처형


루이 16세는 역대 프랑스 왕들 중 유일하게 처형을 당한 왕으로 기록이 되었는데요. 후에 왕정이 잠시나마 복구되어 그의 동생인 루이 18세나, 샤를 10세가 즉위하였지만 그들도 나중에 쫓겨나기만 할 뿐, 사형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곧 전 유럽에 알려졌고, 이것을 들은 각국의 왕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평민들의 주도로 시민으로 강등된 것도 모자라, 목까지 잘린 일은 역사상 전무했으니까요. 그래서 서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적대시하였습니다.


루이 16세


루이 16세가 죽은 뒤, 왕당파 세력은 루이 샤를을 루이 17세로 공포합니다. 작은 아버지인 프로방스 백작(훗날 루이 18세)은 왕이 아직 어리니, 자신이 대신 섭정을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였죠. 하지만, 대부분의 왕당파와 프로방스 백작은 망명한 상태라 프랑스에 없었고, 루이 17세는 왕정이 폐지되어 일반인의 신분으로 탑에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저 허울뿐인 왕이 었어요. 그 시기에 국민공회는 산악 파인 로베스 피에르가 장악하여 지롱드 파의 대부분이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루이 16세가 죽고 남겨진 가족들


더 이상 왕족이 아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의 대우는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과부 카페 (과부 + 부르봉 왕가 성)라고 불렀고, 그들을 감시하던 경비병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모욕을 주기도 하였죠. 그때 왕비의 친정 가족들은 뭐 하고 있었냐고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위를 살피기만 할 뿐이었죠. 7월 3일, *공안위원회가 루이 17세를 강제로 빼앗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한번 절규합니다. 그들은 아이에게 남아있는 전제군주제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혁명 사상을 새겨 넣는다는 이유로, 다른 감방으로 옮긴 후, 구두 수선공인 앙투앙 시몽에게 루이 17세의 교육을 맡깁니다.

(*공안위원회 : 1793년 4월 7일 ~ 1795년 11월 4일까지 존재했던 통치기구, 국민공회에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이자, 혁명정부의 역할을 하였다.)


가족들로부터 루이 17세를 강제로 떨어뜨리는 공안위원회


그렇게 홀로 남게 된 8살 어린아이는 끔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무서운 상황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있어서 괜찮았지만, 가족들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어렸습니다.


루이 샤를, 루이 17세


시몽은 아이에게 빨간 프리기아 모자(혁명을 상징하는 모자)를 씌우고, 큰소리로 혁명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오스트리아 암컷”, “오스트리아 개년”, “매춘부”라고 말하도록 시켰어요. 루이 17세가 거북해하거나, 더듬거리면서 잘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인정사정없이 채찍질을 하거나, 구타를 하였죠. 어느 날, 루이 17세가 중요부위를 만지작 거리는 것을 보고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근친상간 죄를 적용시키려고 혁명정부와 결탁하여, 술과 마약을 먹인 후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일설 따르면, 왕비를 처형시킬 증거를 만들기 위해 음란물을 억지로 보게 하거나, 아이에게 성병을 감염시키려고 창녀들을 고용하여 강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근친상간 죄는 프랑스 법상 가장 큰 죄 중 하나였어서, 이 죄로 사형을 시키려고 어린 아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앙투앙 시몽에게 세뇌 당하고 있는 루이 17세


시몽에게 채찍질 당하는 루이 17세


학대로 인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루이 17세 (혁명을 상징하는 빨간 프리기아 모자를 쥐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보고 싶어 혁명정부에게 애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안 가 딸과 엘리자베트와도 강제로 떨어집니다.


딸과 엘이자베트와도 강제로 헤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


8월 1일 앙투아네트는 콩시에르쥬리 감옥으로 옮겨지는데, 그녀가 지내게 될 곳은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춥고 어두운 것은 물론이고, 습기가 가득해 눅눅하고 축축했죠. 그리고 과부 카페가 아닌 죄수 280으로 불리며 완전한 죄수 취급을 받게 됩니다. 10월 14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벌에 대한 재판이 열립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머리가 모두 흰 채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당시 그녀를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있었지만, 재판소는 그에게 변론을 준비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죠. 왕비는 오스트리아와 내통 (그녀가 친정 가족들에게 안부인사와 근황을 전하며 보냈던 편지들까지 내통 증거로 채택하는 억지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국고 낭비, 전쟁 유발, 근친상간 혐의를 받게 되는데, 그녀는 다른 죄들을 언급할 때는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있었으나, 근칭상간 죄에 대해서는 그곳의 어머니들에게 호소를 하였고, 이에 마음이 움직인 여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로하며 말도 안 되는 죄에 대해 비난을 하였습니다. (엘리자베트 또한 루이 17세가 학대로 인해 고모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증언하여, 근친상간 혐의를 받게 됩니다.)


탕플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콩시에르쥬리 감옥에 수감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를 감시하는 경비들


재판장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받는 마리 앙투아네트


결국 근친상간 죄는 제외되었으나, 적에게 유리한 정보를 준 죄, 국고를 고갈시킨 죄, 국가 내/외부 안보에 대한 음모 죄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변호사는 무기징역을 예상했으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피해 가지 못했죠. 그녀는 차분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처형 하루 전,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이 될 편지를 썼어요. ‘불쌍한 내 아이들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이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살길 바래요. 훗날 당신과 아이들이 만나면 제 마음을 전해주세요. 전 곧 죽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말대로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들(루이 17세)을 용서해 주세요. 작고 어린아이를 휘두르는 것은 쉬운 일 이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과 다르게 이 편지는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루이 샤를, 루이 17세


1793 10 16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 그녀는 루이 16세처럼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하고 오로지 사형인으로만 대해집니다. 남편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입었던 검은색 옷을 그대로 입고 가고 싶었으나 거절을 당해 슈미즈를 입게 되는데, 혁명파들 앞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수치를 겪었고, 목이 잘리는데 거슬리지 않도록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억척스럽게 자른 , 손을  뒤로 아프게 묶는 ,  왕비로서의 대우는 일절 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름을 싣는 수레에 태워져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처형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처형장으로 가기 위해 끌려나온 마리 앙투아네트


의연한 모습으로 수레에 실려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그런 순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의연했습니다. 수레에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사제가 함께 타고 있었으나, 왕비는 그가 공화정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기에 거절하였죠. 처형장에 도착한 뒤, 단두대 오르다 실수로 사형집행인의 발을 밟자, “미안합니다. 일부로 그런 건 아니에요”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여인은 남편과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왕비 38살, 공주 15살, 루이 17세 8살) 그 후, 왕비가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페르센은 낙망했습니다.


단두대 앞에 서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여담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자 오스트리아 왕인 프란츠 2세는 고모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훗날 나폴레옹 1세와 결혼을 한 자신의 딸이 감금당하였을 때는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딸과 외손자를 구출해 오스트리아로 데려옵니다. 역시 자식 일과 고모 일은 다른가 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을 위험까지 처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프란츠 2세


한편, 엘리자베트와 마리 테레즈는 왕비의 처형 소식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옆에서 무서움에 떨고 있는 마리 테레즈를 위로해 주었죠. 그리고 떨어져 있는 루이 17세를 걱정하여 조카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실, 로베스 피에르는 그녀가 왕위를 잇지 않는 여자이기도 하고 위험인물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추방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으려 하였으나, 곧 마음을 바꿔 처형을 하도록 결정합니다. 1794년 5월 9일 그녀는 콩시에르쥬리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 자신의 조카딸을 꼭 안아주며 나는 꼭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혁명정부가 엘리자베트를 데려자려하자, 고모를 붙잡는 마리 테레즈


엘리자베트는 국왕 부부의 도주를 도운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다른 사형수들과 지내게 되었는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으나, 무시당합니다. 그때, 함께 수감되어 있었던 다른 사형수가 “왕비는 이미 처형당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충격을 받았죠. 그 후, 엘리자베트는 왕과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감옥 안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곧 죽을 운명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5월 10일, 23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트 나이 30살, 공주 16살, 루이 17세 9살)


엘리자베트 공주


남겨진 두 아이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는데요,  험상궂은 남자들이 처음에는 아버지 그다음은 동생, 그다음은 어머니, 마지막으로는 고모까지 끌고 가버려 결국 혼자 남게 된 마리 테레즈는 두려움에 날이 갈수록 불안증세가 심해졌고, 루이 17세는 계속되는 폭력으로 인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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