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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라제 Jun 25. 2022

마리 앙투아네트 에필로그

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안녕하세요

오브라제 입니다.


벌써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준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이렇게 끝나니 너무 아쉽네요. 그럼 마지막까지 즐겁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에필로그, 루이 17세의 심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펠르탕 박사가 루이 17세의 심장을 가져다 몰래 보관을 하다가, 20년 뒤인 1815년에 왕정이 복고가 되면서 루이 18세에게 가져다주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터라, 왕은 조카의 심장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루이 18세



그래서 결국 대주교에게 심장을 바쳤죠. 하지만 대주교가 머무는 곳이 약탈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펠르탕의 아들이 루이 17세의 심장을 다시 가져다 수정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습니다. (이 수정 항아리는 지금까지 루이 17세의 심장이 담긴 채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루이 17세 심장


그가 사망한 후, 에드와르 뒤몽이란 사람에게 넘어갔고, 그다음은 뒤몽의 사촌이자 프랑스 역사학자였던 폴 코탱에게, 그다음은 스페인 왕위 계승자인 돈 카를로스에게 넘어갑니다. 그의 사후, 자식들이 물려받지만 돈 카를로스의 손녀가 파리 생 드니 대성당에 기증하여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루이 17세의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도 하였고, 그가 살아 있다는 소문을 믿는 사람이 더 많아서 사람들은 이 심장이 진짜 루이 17세의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어요.


루이 17세


그러는 사이,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들 중, 루이 샤를일 것이라고 확실시되었던 샤를 기욤 나운도르프는 사망 후, 묘비에 ‘루이 17세 이곳에 잠들다.’라고 적혀지기도 했죠.(그는 혁명 당시 베르사유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비밀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루이 17세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루이 17세를 사칭한 사람 중 가장 유명했던 샤를 기욤 나운도르프



시간이 흘러, 루이 17세의 심장과 샤를 기욤 나운도르프의 유골을 오스트리아 궁에 보관되어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과 DNA 검사를 해보았는데, 심장은 일치하였고, 유골은 당연히 아니라고 나왔기 때문에, 그동안 말이 많았던 루이 샤를의 생존설은 거짓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루이 17세 (루이샤를)


2004년 6월 8일, 한 세기가 지나서야 루이 17세의 심장은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버지인 루이 16세 무덤 옆에 놓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이 샤를이 묻혀졌다는 상트 마르에리트 섬 묘지를 파서 그의 유골을 가져오려고 했었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펠르탕 박사가 루이 17세의 심장을 보관했던 덕분에 그의 일부라도 부모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왕자로 태어나 다음 군주가 될 운명이었으나, 그의 나이 5살에 혁명이 터지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루이 17세, 그래서 혁명 직전에 사망을 한 왕세자 루이 조제프와 소피 공주가 험한 꼴을 보지 않고 먼저 죽은 것이 다행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루이 17세가 당한 일들은 혁명의 이면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혁명 직전의 루이 샤를 (5살)과 마리 테레즈 (12살)


두 번째 에필로그, 오스트리아로 간 마리 테레즈는 가짜다?

탕플 탑에서 나와 오스트리아로 간 사람은 공주가 아니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양한 딸인 에르네스틴 이라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9살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마담 루아이얄)


소문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는 탕플 탑에 있을 시절,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였고, 이것을 수치스러워한 그녀는 비밀리에 에르네스틴을 불러 자신을 대신해 오스트리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마리 테레즈가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면 대중의 비난을 받는 것은 물론, 외교적 문제가 일어날까 두려웠던 혁명정부는 공주와 닮았다던 에르네스틴을 찾아 대신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에르네스틴은 마리 테레즈보다 연상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공주와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베르사유 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루이 16세가 에르네스틴을 무척 예뻐해서 왕과 하녀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이 났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 또한 그녀를 많이 아꼈기 때문에, 왕비가 혼외자를 저리 예뻐하겠냐, 그저 공주와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냐며 반박되기도 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의 행복했던 시절


프랑스혁명이 터진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시녀 중 한 명에게 에르네스틴은 나의 친딸이나 마찬가지니, 반드시 이곳에서 탈출시키라 하였고, 시녀와 떠나는 그녀를 보며 꼭 살아야 한다며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에르네스틴은 왕의 핏줄이 아니기도 하고, 입양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혈통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왕족(공주 신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감시는 허술해, 비교적 무난히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왕족인 마리 테레즈와 루이 17세는 왕과 왕비와 함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빼돌리기 어려웠죠. 그렇게 빠져나왔던 그녀가 마리 테레즈 공주의 신분으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앙굴렘 공작부인 시절의 마리 테레즈, 페르센이 찾아준 마리 앙투아네트의 보석을 하고 있다.


훗날, 검은 백작부인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나타나는데, 외출할 때마다 항상 검은 베일로 가리고 다녀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되도록 숨어 다녔기 때문에 그녀가 진짜 공주가 아니냐는 말이 은연중에 나돌았습니다. 검은 백작 부인이 사망한 후, 그녀의 유품에서 부르봉 왕가의 물건들이 나와, 진짜 공주라는 말이 확정시되었지만, 나중에 검은 백작 부인의 묘를 파헤쳐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마리 앙투아네트와 일치하지 않았고, 에르네스틴 또한 공주가 시아버지(작은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망명 중일 당시, 그녀는 장 샤를 브라팡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파리에서 살았다는 문서와, 후에 파리 외각지역에서 사망했다는 증서가 나오면서 오스트리아로 간 소녀는 진짜 마리 테레즈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검은 백작부인이 어떻게 부르봉 왕가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랍니다.)


맨 왼쪽의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마리 테레즈, 그 옆은 남편인 루이 앙투앙과 시가족들


세 번째 에필로그, 드디어 밝혀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의 마음,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국왕 가족이 바렌에서 붙잡혀 파리의 튈르리 궁에 감금되었을 무렵, 페르센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약 1년 동안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페르센이 죽은 후에는 조카들이 이어 보관하였고, 훗날 후손들이 편지들을 공개하였습니다.

그런데, 편지에는 잉크로 시커멓게 지워진 부분이 있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돼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이 주고 받았던 편지


결국 프랑스에서 그 편지들을 구입해 소르본 대학 연구원들에게 해독을 하도록 하였고 2021년, 결국 그 비밀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바쳐 왕비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페르센 백작)


‘당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이고, 내 마음은 항상 당신을 향해 있어요. 당신을 평생 사랑할 거예요.’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센 백작


그리고 처형당하기 전, 남편의 동생인 엘리자베트 공주 말고도 페르센 백작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내 마음의 모든 것이었던 페르센 잘 있어요.’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죠. 이로 인해 소문만 무성하던 이들의 사랑은 진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두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센은 처음에 이 편지들을 폐기시키려고 했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망적인 상황과 억울함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남겨놓기로 결심하였고, 혹시라도 사랑을 속삭인 부분으로 인해 왕비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지운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 외에도 왕비가 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 페르센은, 고통스런 마음을 담아 자신의 여동생에게,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어. 목숨을 다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한 여인이었는데, 더 이상 세상에 없구나. 나는 이제 어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를 따라가면 이 고통스러운 마음이 잠잠해 질까…”라고 편지를 보냈다는 것과, 프랑스혁명이 터졌을 당시 불안해하는 앙투아네트를 위해 베르사유 궁 근처에 살 곳을 구해 왕비를 자주 찾아갔다는 것,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을 당한 후에도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그녀만 그리워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말 깊은 사이 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페르센 백작


하지만 이들이 정신적인 사랑만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육체적인 사랑도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라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특히 루이 17세는 페르센의 자식이 맞을 거라는 의견이 많아, 해외에서는 이것에 대한 책이 출판이 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왼쪽 마리 테레즈, 가운데 루이 17세, 오른쪽 루이 조제프 왕세자)



아직도 페르센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랑에 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루이 17세가 페르센 백작의 자식이라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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