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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라제 May 30. 2022

15살 소녀, 프랑스로 가다. 마리 앙투아네트 (1)

오브라제의 재미있는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 특집 1편>

지금 들려드릴 이야기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들려드리려고 하는데요, 이것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의 무서움, 세상의 무서움이 잘 들어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흔하게 알려져 있는 내용이라 생각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준비해 보았고, 역사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해 보았으니, 즐겁게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1770년 5월 16일,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는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와 결혼을 하고 왕세자 비가 되면서, 프랑스어 발음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불리게 됩니다.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오귀스트 (루이 16세)의 결혼식


사실, 이들은 부부가 될 인연도, 프랑스의 왕과 왕비가 될 운명도 아니었습니다. 이전부터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앙숙 관계였는데요. 두 나라는 전쟁도 많이 치러서 서로의 아버지와 형제, 아들들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이였죠. 그래서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각국의 왕자와 공주를 맺어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여제(여자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9번째 딸인  마리아 카롤리나를 프랑스로 보내기 위해 준비를 차곡차곡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라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그런데 카롤리나 바로 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 되자, 자매의 운명은 한순간에 뒤바뀌게 됩니다. 카롤리나는 요제파가 결혼하기로 했던 나폴리 왕세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막내딸이었던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는 언니 카롤리나가 결혼하기로 했던 프랑스 왕세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와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왼쪽)와 마리아 카롤리나 (오른쪽)


루이 오귀스트 또한 처음부터 왕세자가 아니었습니다. 루이 15세는 루이 오귀스트의 할아버지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아버지가 왕세자, 형은 왕세손이었습니다. 전혀 왕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던 소년은,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병으로 잃게 되면서 왕세자가 되었죠. 원래대로라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 운명의 장난으로 부부로 맺어지게 된 겁니다.


어린시절의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린 시절은 나쁘다면 나쁘고, 좋다고 하면 좋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식들 편애가 심한 어머니로 유명했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자식은 연애결혼을 허락해 주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식은 사귀고 있는 남자와 강제로 떨어뜨리고 정략결혼을 시킬 정도로 차별이 심했어요. (편애한 이유는 자신과 생일이 같거나, 자신이 마음에 드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정말 황당하죠:::)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 1세,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그래서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던 자식들과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자식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랑받지 못하는 쪽에 속하였어요. 어머니는 나라를 다스리기 바빠서 앙투아네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궁은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우며 나름 즐겁게 생활했죠. 그런데 프랑스 혼담이 바뀌고 나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딸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공주시절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할 당시, 루이 16세는 16살, 마리 앙투아네트는 15살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꼬마 신랑과 꼬마 신부의 결혼을 축하해 주며, 앞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관계가 좋아지길 기원을 하였죠.


왕세자비 시절 마리 앙투아네트


왕세자 시절 루이 16세


하지만 딸이 걱정스러웠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로 편지를 보냅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하면 마음이 침착 해 질 것이다. 남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라. 프랑스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행동하고, 사치를 부려 백성들의 마음을 잃지 말거라.”

하지만, 막 베르사유에 입궁한 어린 왕세자비는 갑자기 달라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벅차, 어머니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른 언어와 문화에 적응을 하기 힘들어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온지 1년이 되었을때의 모습 (당시 16살)


전부터 유독 프랑스어를 어려워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서도 실수가 잦아, 비웃음을 샀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랑스는 하나부터 열까지 엄격한 예법을 요구했죠. 더군다나, 내성적이고 숫기 없는 남편과는 어색했고, 자신이 적국인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입방아에  항상 오르내려 외롭고 힘들었지만, 밝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람들과 나름대로 잘 어울렸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랑발 공비가 언제나 함께 있어 주어서 힘낼 수 있었습니다.


랑발공비, 마리 앙투아네트 보다 6살 더 많았으며, 왕세자비의 시녀로 배정을 받고 그녀를 잘 돌봐 주어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족같이 지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깝게 지냈던 랑발 공비와 함께 있는 것이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활달하고 외향적인 반면 랑발 공비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죠. 그때, 왕세자비 앞에 폴리냑 백작 부인이 나타났습니다.


폴리냑 백작부인


보통의 귀족들은 왕세자비에게 뜯어먹을 것이 없을까, 하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거나, 뒷담화 하기 바쁘거나, 랑발 공비 같이 전형적인 정숙한 귀족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는데, 폴리냑 부인은 그들과 다르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모습에 매료되어, 곧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됩니다. 사실, 그녀는 간사하면서도 영특한 사람이라 왕세자비의 마음을 잘 알고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렸고, 주변인들에 의해 쉽게 물들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잊은 채, 그녀를 따라 유흥에 빠지게 되면서, 랑발 공비와도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책을 읽고있는 랑발공비


그러다 1774년 1월, 파리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웨덴 귀족인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을 만나게 되는데, 동갑이라는 것과,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고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 해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20살과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랑스라는 대국을 이끌어야 할 왕과 왕비가 되죠. 페르센은 왕비가 된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안 좋은 소문이 날까 봐 프랑스를 떠납니다.


페르센 백작


루이 16세는 즉위하자마자, 커다란 짐을 떠안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재정 상황은 정말 최악이 었는데요. 선선대 왕인 루이 14세 때, 이미 수많은 전쟁과 사치로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루이 15세가 그대로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빚을 갚으려고 또 빚을 내다보니,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루이 15세가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어서, 자신에게 아부를 잘 떠는 사람에게 높은 자리를 주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내쫓아 버리다 보니, 충신보다 간신(간사한 신하)이 더 많아져, 궁은 심한 사치와 타락에 빠지게 되었어요.


루이 15세


거기다, 평민 출신의 정부(첩)인 퐁파두르 부인이 왕의 총애로 막강한 권력을 가져, 정계 인사를 좌지우지한 것은 물론, 정치와 전쟁에도 관여를 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언니가 루이 16세와 혼담이 오가게 된 것도 퐁파두르 부인이 살아생전 오스트리아 여제와 동맹을 맺었던 영향이 끼쳐진 것이죠.) 그런데, 그녀가 관여한 7년 전쟁이 큰 실패로 끝나자, 프랑스가 소유한 많은 식민지를 잃었고, 막대한 빚을 지게 되면서 왕실의 재정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왕비도 가만히 있는데, 첩 따위가 뭔데 나대?” 라며 많은 비난을 하였지만,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왕의 총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퐁파두르 부인


상황을 악화시킨 건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후, 루이 15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부 뒤바리 부인은 매춘부(몸을 파는 여자) 출신이었지만 왕의 총애가 막강하다 보니, 아무도 그녀의 출신에 대해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서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망한 왕비를 대신해 궁의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엄청난 사치를 부렸는데요, 드레스, 구두, 목걸이, 반지, 보석 등 마음에 드는 것들은 모두 다 쓸어 모으다 보니, 나라 재정은 바닥을 쳤습니다. 루이 15세가 그녀를 위해, 하나에 170억 이상이 나가는 목걸이를 주문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사치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뒤바리 부인


이 외에도 수많은 정부들과, (왕을 위한 하렘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결혼을 안 하고 궁에서 살았던 딸과 손녀들이 베르사유에서 쓰는 돈은 상당했습니다. (루이 14세도 이에 못지않은 정부들이 있었고 낭비도 심했지만 루이 15세와 다른 점은 태양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정부들은  모두 나갔지만, 선대 왕들이 남긴 막대한 빚과, 유흥에 찌들어버린 베르사유, 굶고 있는 백성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을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 나약했죠.


왕이 된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되고,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당연히 후계자 문제였어요. 루이 16세와 결혼했을 때부터 왕비가 되고 난 지금까지, 남편과 잠자리를 제대로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10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었어요.) 그래서 루이 16세에게 성 불구 아니냐는 말이 나 돌았고, 왕비에게는 ‘왕비가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왕이 저렇게 관심이 없겠어?’ 쑥덕쑥덕-. ‘오스트리아 여자가 왕의 후계를 끊어놓으려 하네,’ 쑥덕쑥덕 - 하였죠. 거기다 동서(남편의 남동생의 부인)가 아들을 출산하자 위기감을 느끼는 와중에, ‘언제 임신하냐, 반드시 왕자를 낳아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게 되면서 왕세자비 시절보다 더 심한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왕비가 되고 1년뒤의 마리 앙투아네트 모습 (당시 20살)


그다음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프랑스 왕실 예법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죠. 당시, 신분이 높은 고위 귀족들만 왕비의 옷을 입혀줄 수 있었는데요. 왕비가 아침에 일어나 하녀가 잠옷을 벗겨 가면, 귀족 부인이 바로 드레스를 입혀주어야 하지만… 귀족부인이 (여러 절차로 인해) 늦을 경우, 알몸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겨울에는 추위에 벌벌 떨며 기다려야 했어요. (나중에는 이 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는 밥을 먹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해야 했는데, 자신이 밥을 먹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으니,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아 불편했죠.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실의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전통이 지긋지긋했습니다.


20살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


그럴수록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부인과 함께 유흥과 사치를 부리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밤새도록 파티를 열어 놀고먹거나, 매일같이 연극을 보았죠. 그리고 어떨 때는 밤에 혼자 궁을 몰래 나와, 얼굴을 가리고 도박장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왕비를 알아본 귀족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다른 귀족들에게, “나 도박장에서 왕비 봤어”라고 말을 했고, 곧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왕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더욱 퍼져 나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바로 딸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너는 모든 것에 쉽게 물들고, 금방 빠져 드는구나.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너의 잘못으로 큰 불행과 위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쾌락만을 쫒다가는 결국 파멸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오스트리아 여제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그리고 딸과 사위를 위해 큰 아들 요제프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큰 오빠)를 보냅니다. 요제프 2세는 결혼 선배로서 루이 16세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었죠. 그것이 잘 먹혔는지, 곧 첫 잠자리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했고, 서로가 어색했던  왕과 왕비는 점점 가족이 되어갔어요. 그리고 그리웠던 옛 친구인 페르젠 백작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기뻐하며 전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왕 또한 그를 마음에 들어 하여, 왕실의 연대장(군사 연대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죠. 그리고 얼마 뒤, 나라의 큰 경사가 생깁니다. 왕비가 결혼 한지 8년 만에 임신을 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차기 국왕의 탄생을 기대했어요.

출산일이 다가오자, 프랑스 왕실의 독특한 전통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한번 기겁했어요. 프랑스는 남자만 왕위 계승을 할 수 있어서, 혹시라도 아기를 바꿔치기할 수 있으니, 왕비의 몸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비가 있는 방에 많은 귀족들이 몰리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만 도중 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선대 왕비들도 이 부분을 수치스러워하거나, 힘들어했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마리 앙트아네트가 장녀 마리 테레즈를 출산할 당시 모습


백성들과 귀족들은 오랜 시간 기다려온 왕자가 아니라서 실망을 했지만 국왕 부부는 자신들의 첫 자식인 공주를 보고 무척 행복해했어요. 그런데 다른 의미로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루이 16세의 두 남동생인데요. 그들은 자신들도 왕이 될 기회가 있다며 하늘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좋아했죠.


마리 테레즈를 보고 기뻐하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국왕 부부는 결혼 기간에 비해 늦은 24살과 23살에 부모가 되었다 보니, 주변에서 후계자에 대한 압박이 계속 있었지만 전처럼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주의 이름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식 호칭은 ‘마담 루아이얄’) 로 지어주고 많은 사랑을 주었어요. (공주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식들에게 첫 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지으라고 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로, 그 외 형제들은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레사’, ‘(어머니와 똑같은) 마리아 테레지아’, 로 짓게 됩니다.)


딸 마리 테레즈와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베르사유 궁 외각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루이 15세가 이전에 뒤바리 부인에게 주었던 별장)을 선물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꽃을 좋아하는, 부인, 제가 꽃다발을 드릴게요. 그건 바로 프티 프리아농 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우 기뻐했어요. 그녀는 별장에 작은 농장과 텃밭 등을 만들어 전원스럽게 꾸몄고, (뒤바리 부인이 쓰던 것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을 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돈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난 먹거리로 검소하게 생활하며, 소소한 생활을 즐겼죠.


프티 트리아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예법과 격식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 장소를 매우 좋아해서 되도록 궁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밀한 사람들만 (폴리냑 부인과 페르센 백작 등) 별장에 부르다 보니,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은 왕비가 편애를 한다고 욕을 하며,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렸죠. 그럴수록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친구들을 더 가까이하였습니다.


프티 트리아농에서 폴리냑 백작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


1년 뒤, 다시 임신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차 사고로 유산을 하였고, 그다음 해에 어머니까지 사망을 하면서, 연달아 생긴 불행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 있는 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많은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지주를 잃었다는 생각에 많이 슬퍼했어요.) 하지만 1781년, 모두가 기다리고 기다린 아들인,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가 태어나자, 많은 이들의 축복과 환호를 받았습니다.


왕세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들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1785년에는 루이 샤를(훗날 루이 17세)을, 1786년에는 막내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를 낳으면서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루이 16세가 아내를 배려해, 장녀 이후로는 왕비가 출산을 할 때,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외에도 왕과 왕비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아르망 (아들 / 고아), 아밀카르 (아들 / 세네갈 총독이 국왕 부부에게 바친 아이), 에르네스틴 (딸 / 하녀의 아이), 조이 (딸 / 하녀의 아이) 이렇게 네 아이를 입양해, 자신들의 자식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왕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입양을 했다고 왕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대우를 잘 받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프랑스혁명 이 일어난 후, 고아원에 맡겨지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는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에르네스틴”을 꼭 기억해 주세요. 나중에 중요한 사건으로 다시 등장을 하게 되니까요.


아이들과 함께 있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식들을 낳고 점점 성숙한 모습들을 보여주었어요. 검소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친 자식들에게 보통 왕족들과는 다른 교육을 했습니다. 잘 사용하지 않는 장난감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눠주도록 했고, 고아들을 궁에 데려와 공주와 왕자와 함께 밥을 먹이고 신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어울리도록 했으며, 트리아농에서 자녀들과 함께 자급자족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느라 돈을 많이 써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선물을 사주지 못하게 되자, 첫째인 마리 테레즈가 투정을 부리니, “밖엔 굶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많이 있어. 선물보다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따뜻한 잠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지!”라고 따끔히 말을 하였죠, 이에 심통이 난 마리 테레즈는 자신을 돌봐주는 귀족에게 엄마 욕을 했다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은 엄한 엄마보다 항상 다정다감했던 아빠를 더 좋아했어요.


마리 테레즈 공주, 루이 조제프 왕세자와 함께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그런데 공주와 왕자들이 왕의 자식이 아닌 페르센 백작의 자식이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1778년 페르센 백작이 프랑스에 돌아온 후부터, 왕비의 애인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가까이 지냈기 때문입니다. 특히, 트리아농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왕비가 허락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페르센 백작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었죠. 하지만 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았고, 그런 소문이 돌 수록 루이 16세는 아이들에게 더욱 신경을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 …? 아닌가…?” 라며 소문은 흐지부지 됩니다.


페르센 백작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식을 낳고 나면 프랑스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데요, 그녀에게 어떤 스캔들이 있었는지,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평판은 어떠했는지는 다음 편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자료 : 나무 위키, 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영원한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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