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종상 Oct 25. 2021

노인과 바다-새 지평을 열다

번역의 묘미와 한계

얼마 전 노인과 바다 번역을 완료하고 책을 출간했다.


헤밍웨이가 풀어낸 서사와 세밀한 묘사를 우리말로 옮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책을 내게 되어 감사하고 만족한다.


그동안 노인과 바다 서사의 주요 인물은 노인과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간 소년으로 번역된 소설 속 boy의 나이대는 사실 20대다. 따라서 소년이라는 번역어는 어색하거나 또는 바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boy를 실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나이대로 번역한
최초의 우리말 번역서다.


같은 원문을 두고서도 번역가마다 번역문이 다를 수 있음은,

달리 말해 다양한 표현 중 번역가 자신이 최적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음은 번역이 주는 묘미 중 하나다.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번역서를 읽을 땐, 같은 제목의 다른 번역서(번역가가 다른) 몇 권을 비교해 읽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과 의미 자체를 다르게 풀어낸 것은 다른 얘기다. 문장의 의미를 최대한 넓혀 본다 해도 그 한계를 벗어난 의미의 문장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노인과 바다는, 그동안 필자가 번역한 다른 번역서에 비해 번역의 묘미를 잘 느낄 수 있는 번역서라 할 수 있다.


반면 원문이 라임(압운)을 활용한 문장일 경우, 원문에서 느껴지는 라임을 번역문에 녹여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문의 뜻과 발음을 다 살릴 수 있는 적절한 우리말이 있다면 모를까 보통은 둘 다를 살려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번역가들은 (어쩔 수 없이) 라임보다는 뜻에 초점을 두기 마련이다.


단편적이긴 하나, 이처럼 번역에 담긴 묘미와 한계를 이번 번역서의 여는 말과 닫는 말에 실어 놓았다.



소설 노인과 바다 속 실례를 통해 번역의 묘미와 한계를 함께 느껴 보길 권한다(아래는 필자의 번역서 <노인과 바다> 일부를 옮긴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번역은 단순히 이종 언어들 간 같은 의미의 단어를 대입하는 작업이 아니다. 번역 역시 작가적 역량을 요구하는 준창작의 범위에 속하는 분야다. 본 역자는 앞서 윤여정 씨의 수상 소감 중 일부를, 말의 흐름을 감안해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저를 밖에 나가 일하게 만든 장본인들이거든요.”라고 번역했지만 이는 “저를 밖에 나가 일하게 만든 두 아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여기서 ‘두 아들’을 ‘두 아들놈’으로, ‘싶네요.’를 ‘싶습니다.’로 바꿔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선택은 1차적으론 오롯이 번역가의 몫이 되는데, 이때 번역가의 문장력과 표현력 그리고 어휘력이 번역의 결과에 차이를 만든다. 물론 원작자의 문장을 해치지 않는 범위, 즉 원문의 의미와 어감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는 말이다. ‘의미만 맞는다면 다 똑같다.’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글이란 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같은 의미여도 문장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글이 주는 느낌이나 효과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외국어가 의미하는 우리말을 선택해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이 번역가마다 다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같은 외국어 문장이어도 번역가마다 다른 번역이 나오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실제 본 역자는 원문, ‘The shark was not an accident. He had come up from deep down in the water as the dark cloud of blood had settled and dispersed in the mile deep sea.’를 ‘상어의 출현은 우연이 아니었다. 물고기의 짙은 핏덩이가 바닷속 깊이 퍼지면서 심해에 있던 상어의 코를 자극한 결과였다.’로 번역했다. 이를 원어의 문자에 좀 더 충실하게 번역하면 ‘상어는 우연이 아니었다. 짙은 핏덩이가 바닷속 깊이 내려앉으며 퍼져 나가자 물속 깊은 곳에서 상어가 올라온 것이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외에 같은 의미의 다른 문장으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본 역자는 첫 문장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번역에 대해 다른 견해를 지닌 누군가는 본 역자의 번역문을 탐탁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 본 역자는 그 견해 역시 존중할 뿐 아니라 심지어 맞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 데다가 원문이 주는 어감과 맥락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 판단해 과감히(?) 선택한 것뿐이다.

                                                                                                                         -여는 말 14~16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원문은 이 소설 속 유명한 문장 중 하나이고, 우리말 문장은 이 원문을 번역한 모 포털 사이트 번역기의 번역문이다. 일부 『노인과 바다』 번역서들은 이 원문을 보통 이와 유사하게 번역했다. destroy를 ‘파괴’ 또는 ‘파멸’로 번역한 것이다. destroy가 기본적으로 ‘파괴하다’, ‘파멸시키다’의 의미를 담고 있으니 틀린 번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번역문 역시 우리말 어감을 감안하면 적절한 번역이라 말하긴 어렵다. 우선 ‘파괴’를 생각해 보자. 보통 우리가 사람을 대상으로 ‘파괴되다.’라는 말을 잘 쓰는 편인가? 그런 것 같진 않다. 조금 어색하다. ‘파멸’은 어떠한가? 이 말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파멸되다.’라고 표현한다고 치자. 여기서 파멸은 어떤 느낌인가? 여러 의견이 있을지 모르나, 대충 ‘몰락’, 또는 ‘처절한 실패’가 아닐까? 심지어 그 안에는 패배의 의미도 일부 담겨 있는 느낌이다. 그럼 원문의 어감은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destroy의 어감은 ‘죽음’이다. 몰락이나 처절한 실패가 아니라 ‘멸망’이고 ‘소멸’이다. 이 원문은 쉽게 말해 ‘인간은 죽으면 죽었지(죽임을 당하면 당했지) 지지는 않는다.’라는 말이다.

원문에서 destroy[distrɔ́i]와 defeat[difí:t]는 라임(압운, 이하 라임)을 잘 활용한 단어로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여기서 destroy를 파괴나 파멸로 번역함은 원문의 의미에 딱 맞아떨어지는 번역은 아니다. 실제 destroy는 ‘멸하다’, ‘죽이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 문장을 “인간은 죽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로 번역했다. 온라인에서 검색해 본 결과 이처럼 번역한 번역서도 일부 존재함을 확인했다.

‘파괴’와 ‘패배’ 또는 ‘파멸’과 ‘패배’는 원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약하지만 ‘ㅍ’이 주는 라임을 다소 느낄 수 있고, ‘죽음’과 ‘패배’는 라임의 효과는 없지만 의미 면에서 조금 더 원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앞선 설명처럼 ‘패배’를 ‘지다’라는 단어로 대신하면 ‘죽음’과 ‘지다’에서 ‘ㅈ’이 주는 라임이 어느 정도 느껴지지만 ‘지다’보다는 ‘패배’가 더 잘 어울리는 번역어로 여겨진다. 그렇게 나는 라임보다 의미를 선택했다. 이처럼 번역에는 원문과 번역어 사이에 존재하는 뜻과 발음의 불일치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상존한다. 물론 이 역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닫는 말 158~159

작가의 이전글 철학, 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