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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13. 2018

잠수도 그의 대답이었다@소개팅 망한 사람들


그날도 역시나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주말이었다. 눈은 반쯤 일어났지만 뇌는 아직 곤히 자고 있는 그런 상태. 자극적인 기사가 있나 없나. 오늘 인기 동영상은 무엇인지 슥슥 아래로 내리던 중 반가운 메시지가 왔다. "소개팅할래." 뇌가 깼다. 바로 "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없어 보이기는 싫어서 "누군데."라고 되받아쳤다. 사실 내 속마음은 "응. 빨리 탈출하고 싶으니까 당장 소개팅 시켜줘."였다. 친구들의 "연애 좀 해. 제발." 멘트가 질리고 질렸던 때이기도 했고. 소개팅남은 평소 내가 굉장히 신뢰하는 친구의 동료였다. 괜찮은 사람이니까 할 건지 말 건지 대답이나 하란다. 아 이 리더십. 너의 이 리더십이 소개팅 주선에서 빛이 발하는구나. 너를 향한 나의 신뢰감과 이 강력한 소개팅 추진력이 내 마음을 깊게 감동시켰어. 제대로 된 소개팅남 사진 한 장조차 받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추진력이라면 기대해볼 법했다.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못이기는 척 "그럼 한번 부담 없이 만나볼까."라고 답했다.

 

소개팅 3일 전부터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했다. 착장 코디 3가지 예시를 친구들에게 보냈다. 모두 투 머치 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섰나 보다. 인정. 처음인 거 티 내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조언들이 날라왔다. 연애 선배님들 팁을 적극 반영해 내 어질러져 있는 방과는 사뭇 다른 최대한 깔끔하고 단정한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로 결정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소개팅 날이 다가왔다. 안 신던 구두를 신고, 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내 친구들은 소개팅하고 있는 내 모습이 궁금하다며 약속 장소로 따라왔다. 멀찍이 떨어져 인사하는 것만 보고 가겠다며. 그만큼 오늘 이 하루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궁금한 건 둘째치고 낯선 사람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내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너무 궁금했다. 내 모습이. 상상은 그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멀리 주선자 친구 옆에 소개팅남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친구들이 그를 먼저 보고 "야. 느낌 좋다. 괜찮은 것 같아." 란다. 친구들을 뒤로 한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 운명이 여기 있었다. 첫 소개팅에 결혼까지 할 것 같은 이 기분. 결혼할 사람들은 처음 보자마자 느낌이 다르다던데 이거구나.

“우린 우리 그대로 괜찮다는 것” / 영화 네이든

그와 만나기 전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습보다 훨씬 느낌이 좋았다. 같이 있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이 사람이 무슨 말을 내게 던지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공기와 분위기는 내가 평소 느끼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가 준비해온 썰렁한 농담에도 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옛날 유머집에 나올 법한 참새 이야기 시리즈에 웃어버렸다. 웃음에 야박한 내가. 그런 농담에 웃다니. 심지어 꺄르르 웃고 있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첫눈에 반했다. 심하게.'  

 

사람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에게 전화가 왔다. 애프터와 함께. 다행히, 아니 역시나 우린 운명이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고, 이전보다는 나에게 더 정확히 호감이 있는 듯한 말투와 행동으로 다가왔다. 내가 먼저 전화나 카톡을 하지 않아도 연락이 왔다. 그렇게 우리는 온종일 일상을 공유했다.

결정적으로 한 달 정도 만났을 때쯤 나에게 편지를 주었다. 편지에 적힌 글에서 그의 진심이 보였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로 인해 자신이 많이 행복하다." 고. 사실 이 편지를 읽고 그의 마음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대로 잘 사귀다가 결혼하게 될 줄 알았다. 그래, 이게 운명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내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이야.

 

부푼 꿈을 앉고 잠이 들었다. 무기력했던 지난날의 아침은 지났다. 오늘 하루는 어떤 행복한 일로 가득할까 궁금증 가득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점심이 되었다. 점심에서 햇볕 쨍한 낮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어둑한 저녁이 되어갈 무렵이었는데,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곧 있으면 시험이 있다고 했었는데 많이 바쁠 것 같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으니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그에게 웃음 주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해봤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아주 바빴단다. 그날은 이전처럼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했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다음날도. 시험이 끝난 날도. 이상했다. 우리는 분명 운명이었는데, 전처럼 내게 적극적이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믿음직한 주선자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다. 근데 더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돌아왔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란다.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말해주지 않았다. 추측건대 주선자는 내가 상처받을까 봐 말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약 6개월간은 그렇게 지독히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이 말은 즉 내가 이 이유를 6개월간 아주 깊숙이 생각했다는 말이다.


“자길 좋아해달라고 사람을 강요하거나 고통스럽게하면 안돼는거야” / 영화 저스트 프렌즈

'내가 왜 싫어졌을까. 왜 갑자기 연락이 없을까. 앞머리를 너무 짧게 잘랐을까. 그날 옷이 별로였을까. 내 메신저 말투가 오해를 샀을까. 마침표를 찍은 게 너무 딱딱해 보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잘못한 점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명확한 답은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안고 시작한 첫 연애로 알게 된 것. 첫 소개팅에 나온 그 남자는, 내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지닌 여러 모습들 중 나의 특별한 점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는 존재를 '나'로 봐주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이 변치 않던 사실이었던 것처럼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내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마음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사람의 마음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나와 그는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은 없었다. 짧아진 앞머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우린 운명이 아니었고,

타이밍이 아니었고, 인연이 아니었다.

난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과 만나면 그만이었다.

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은 느린 속도라도

나를 향한 마음이 진심인 사람과 만나면 된다.

 

물론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 함정.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난 함정에 빠져있지만.

 

나는 상대방이 좋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나와 같지 때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만큼 어쩌면 그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 누군가 아무리 나에게 사랑해달라고 강요해도 내 마음이 아니라면, 절대 내 마음이 안 변하는 만큼. 내가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한다 해도 그 사람이 요지부동일 수도 있겠구나.'

 

결국, 그의 잠수도 그의 답이었다.

답이 없는 것도 답.

예외는 없답니다 여러분... /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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